최종 : 17/12/16 22:36



[今天歷史-10월8일] 蔣 3분 국민정부 통합, 몽롱시

체 게바라 체포, 을미사변

1928년 10월 8일 장제스(蔣介石)가 중국 국민당 난징(南京)정부의 주석에 취임하였다.

1927년 2월 국공합작 하의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은 북벌 혁명군 총사령관 장제스의 난창(南昌) 천도 주 장에 반대하고 우한(武漢)으로의 천도를 강행하여 국민혁명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했다.

천도 논쟁은 장제스가 이끄는 북벌 혁명군이 양쯔강(揚子江)에 진출하면서 정부를 광저우(廣州)에서보다 대륙의 중심지로 옮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제스는 좌파와 공산당의 움직임에 대항하여 1927년 4월 12일 상하이(上海)에서 반공쿠데타(4.12 상하이 쿠데타)를 결행하고, 그 뒤 4월 18일 난징(南京)에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이리하여 난징과 우한 두 정부의 대립정세가 되었다.

그러나 국민당 좌파의 수뇌부는 장제스의 경제적 압박과 열강의 압력으로 동요하기 시작했고, 특히 토지개혁 문제를 둘러싼 공산당과의 대립이 심각해졌다.

우한정부는 M.M.보로딘 등 소련인 고문들을 해임했고, 7월에는 행정 수반 왕자오밍(汪兆銘)이 공산당과의 관계를 단절하여 반공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해 9월 난징·우한·시산(西山 :

시산(西山)회의
를 통해 성립한 국민당우파의 일파)의 3파에 의한 국민당 임시중앙위원회가 열려 두 정부의 통합과, 난징을 국민정부 소재지로 결정하며 우한정부는 소멸했다.

장제스는 이처럼 좌우파가 통합하여 성립시킨 난징정부의 주석에 취임함으로써 국민당의 최고 실권자로 떠오르게 됐다.

1993년 = 중국 ‘몽롱시파(朦朧詩派)’시인인 구청(顧城)이 뉴질랜드에서 부인을 도끼로 살해하고 자살했다.

뉴질랜드 북부 인구 2,000명이 불과한 외딴 작은 섬 와이하키 섬에서 37세의 한 동양남자가 나무에 목을 매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자살한 사람은 1987년 뉴질랜드로 이민 온 중국의 젊은 시인 구청이었다. 그리고 이 섬의 한 작은 길에서는 그의 부인인 셰예(謝燁)가 남편이 사용하던 도끼에 머리에 상처를 입고 사망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뉴질랜드로 온 뒤 구청은 오클란 대학에서 교수를 지내기도 하고 세계를 순회하며 강연을 하기도 하였으나 도시와 이데올로기 및 국가를 떠난 자신만의 이상향을 꾸미기위해 이 곳 외딴 섬에 와 황무지를 개간하고 닭을 키우며 살아왔다.

이 끔찍한 사건의 전말은 자살하기 직전 탈고한 그의 소설 『잉얼』이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아내이름만 바꿨을 뿐 등장인물 모두 실명으로 쓰여진 이 작품은 구청이 와이하키 섬에서 아내와 아들, 그리고 연인 잉얼과 함께 살았던 기억을 형상화한 것이다.

잉얼은 문학 전공의 여학생으로 구청부부가 평소 잘 알고 아끼던 소녀의 이름이다. 아내 레이가 구청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웃들과 사귀고 시장에도 나가는 등 현실 사회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자 구청은 오랫동안 서신왕래를 해온 잉얼에게 다가간다.

레이의 주선으로 잉얼은 뉴질랜드로 오게 되지만 헤어진 지 3년 만에 만나는 구청과 잉얼은 예전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다. 깊은 사모의 정, 산산조각 나버린 환상, 혼돈과 갈등 속에서 세 사람은 동거를 시작한다. 레이와 잉얼은 매우 다정하게 지낸다.

두 사람의 이런 모습은 구청을 감동시킨다. 구청은 남성은 비열하고 혐오스런 존재이며 여성만이 세상에서 때묻지 않은 순결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잉얼과 구청의 애정은 깊어가지만 영주권을 얻은 잉얼은 다른 남자와 애정도피 행각을 벌인다. 또한 자신의 삶의 지주였던 부인 레이마저 그를 떠나려하자 이로 인한 충격으로 미칠 지경에 이른 구청은 자살을 결심한다.

구청의 죽음 후 그는 ‘나르시즘에 빠진 이기적 인간’,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인물’ 등으로 비난 받았으나 애정참회록과도 같은 이 소설이 출간되면서 재평가되었다.

『잉얼』은 중국뿐만 아니라 홍콩과 대만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1997년 2월 실천문학사에서 2권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구청은 5세부터 시를 짓기 시작한 천재였다. 열 살 무렵에는 혁명시인이었던 아버지와 시로 화답할 정도였다고 한다. 13살이던 1969년 우파분자로 몰린 부친을 따라 산둥(山東)성의 한 농장에 하방(下放)되어 19살에 베이징(北京)에 다시 돌아 올 때까지 그 곳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내었다.

그는 초원지대인 그 곳에서 자연과 정밀한 교감을 나누는 순수시를 쓰고 독서에 탐닉하는 시절을 보냈다. 몽롱시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생명환상곡(生命幻想曲)’도 하방시절인 14세 때 쓰여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1세가 되던 1977년부터 정식으로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으며 훗날 장허(江河), 베이다오(北島), 수팅(舒婷), 양롄(楊煉) 등과 더불어 ‘5대 몽롱시인’으로 불리웠다.

이들 몽롱파 시인들의 시는 기존의 시가 사회적 대주제를 내세우면서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직접적인 것에 반발하여, 주관과 서정을 강조하고 모호한 시적인 분위기의 창조에 노력했다.

즉 감각, 변형, 은유, 자기고백적인 분방함, 모호한 이미지의 구사 등을 통해 현대 중국인의 고통과 낙담을 표출하고 있는데, 알 듯 말 듯 한 내용과 표현이 이루어내는 몽롱미 속에서 기존의 정치 선전시와는 전혀 다른 일종의 농후한 사회 정치적 색채를 보여주었다.

사실 그들의 시 세계는 인도주의 사상을 중심으로 문혁을 비판하고, 문혁 발생에 일단의 책임을 가진 자로서의 자신을 반성하고, 여전히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여겨진 봉건적 문화를 극복하고자 하는 데서 출발했다.

이 때문에 중국 정부의 공식 입장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오늘(今天)》이라는 비정규 잡지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그들의 활동은 1983년 말 정신오염척결운동의 전개와 더불어 중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이 몽롱시의 창작을 통해, 몰개성적이고 공식적인 기존의 문학을 거부하고 개인의 자아 표현을 강조하면서 그 예술적 수단으로서 서방 모더니즘적 요소를 적극 활용했던 것은, 문학 그 자체의 성격이 강조되는 신시기 중국문학의 새로운 진로 모색과 모더니즘 부활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이들의 대표적인 시집으로는 구청의 《무명의 꽃(無名的小花)》과 함께 수팅의 《쌍돛배(雙船)》, 베이다오의 《태양성메모(太陽城札記)》등이 꼽힌다.

이중 베이다오는 1989년 천안문 시위 때 전혀 '몽롱'하지 않은 저항시를 천안문 광장 담벼락에 써붙였다. 기법을 유지하면서 그 내용에 저항 정신을 담았던 것이다.

北島의 ‘대답’과‘일무소유’

몽롱시의 기법과 이들의 작품이 현대 중국 시단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상반된 시각이 존재한다. 하지만 구청이 몽롱시파 시인 중에서도 뛰어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한 평론가는 “구청의 시중에 뻬어난 시는 드물고 평범한 작품들이 많다. 구청은 시는 감상, 모색, 초월에 대한 탐구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구청의 시에서는 어린아이의 시각과 치기(稚氣)가 자주 동원되어 ‘동화시인(童話詩人)’이라는 별칭을 듣기도 했다. 그의 시집으로는 《무명의 꽃》외에 《구청 우언동화 모음(顧城寓言童話遜)》《검은 눈동자(黑眼睛)》《벼락쌀(雷米)》《샘구멍(水眼)》《구청시집》등이 있다. 그의 작품들은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었다.

비극의 동반자인 부인 셰예와는 1979년 기차에서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4년간의 교제 끝에 1983년 결혼했는데 교제기간 4번이나 헤어졌으나 그 때마다 구청의 열렬한 구애로 관계가 회복되곤 하였다고 한다.

셰예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녀가 “시인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착하고 아름다웠으며 활달하고 마음이 너그러웠으며 고난을 능히 견디는 인내심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했다.

기계와 과학, 명예와 이데올로기 등 남성적인 것을 광적으로 거부하고 자연과 대지 등 여성적인 것에 환상적인 집착을 가졌던 구청이 자신의 인생을 끝맺는 과정에서는 야만적인 원시적 남성성을 보였다는 사실은 아이로니컬하다.

구청의 다음 시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는 듯하다.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나의 세계를 내려놓았다

아주 가뿐해, 마치 미농지로 만든 작은 배처럼

어두운 바다의 파도가

천천히 뱃전에 와 닿을 때

나는 떠날래

표표히 저 영원한 공간을 향해"


세계사 속의 오늘

미국 의회가 술 소비, 제조를 금지하는 금주법을 가결했고(1919), 쿠바 혁명의 영웅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 정부군에 체포됐다(1967).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

청일전쟁 후 변화한 국제 정세 속에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에 접근하던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피살되는 을미사변이 발생했다(1895, 음력 8월 20일). 명성황후(명성황후는1851년 생으로 향년 44세였다. 청일전쟁 승리를 전후 한국을 속국화하려는 시도를노골화하고 있던 일본에 맞서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청나라를 대신할 견제 세력으로 끌어들이려 햇고 이것이 잃본의 만행을 불러 일으켰다. 고종은 명성황후의 이같은 참혹한 비극적 최후에도 불구, 다음해인 1896년 2월 11일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이른바 아관파천을 통해 황후의 외교 전략을 실현시켰다. 그러나 자국의 힘이 없는 조선 국왕의 이 같은 선택은 이리를 쫓아내기 위해 늑대에 의존한 격이었다. 이 같은 불안항 균형도 1904~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파탄이 났다.

신민당의 김옥선(金玉仙)의원이 ‘관제안보 궐기대회’ 발언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1975). 당시는 베트남 과 캄보디아 공산화로 국민적 위기 의식이 팽배하던 때이다. 김옥선 의원은 13일의원직을 자진 사퇴했다.



2017/10/08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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