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7/10/21 00:10



[今天歷史-10월10일] 신해혁명, 쌍십협정, 長征 출발

클린턴 PNTR 서명, 쑨원 중화 혁명당 국민당으로 개조 출범, 베이징 고궁 첫 개방, 도쿄 올림픽 개막, 미국 애그뉴 붗통령 사임,이봉창 의사 순국, 김일성 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 설치, 한국군 해병대 해군에 통합, 김일성 고려 연방제 통일 방안 제안

1911년 10월 10일 '멸만흥한(滅滿興漢)'의 기치 아래 소수민족 만주(滿州)족의정복 왕조를 무너뜨리고 한(漢)족의 새로운 공화정 국가를 세우자는 혁명파의 영향을 받은 중국 청(淸)나라 후베이신군(湖北新軍)이우창(武昌)에서 봉기했다.

이로써 중국에서 2,000년 동안 지속돼 온 제정을 종식시킨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시작됐다. 이 우창봉기를 ‘제1혁명’, ‘민국혁명(民國革命)이라고도 한다.

우창봉기의 계기는 이해 5월에 있은 청조의 철도국유화 조치였다. 청나라는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철도국유령을 선포하고 민영철도를 국유화하고 철도를 담보로 열강의 금융자본 연합체인 4국 차관단으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빌리려 하였다.

철도 국유화에 반대하는 운동이 후난(湖南), 후베이(湖北),광둥(廣東) 등지에서 일어났으며, 쓰촨(四川)에서는 대규모 무장투쟁으로 발전하였다(쓰촨폭동).

10월 초 청나라가 쓰촨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후베이신군(湖北新軍)을 동원하자, 우한(武漢) 지역에서 문학사(文學社)와 공진회(共進會) 등을 조직하여 군대에 대한 혁명공작을 하며 후베이신군 내에서 세력을 확장해 오던 혁명파는 마침내 10월 10일 봉기한 것이다.

혁명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파급되어 1개월 이내에 거의 모든 성이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혁명군이 난징(南京)일대를 장악한 뒤 각 성의 대표가 1912년 1월 1일에 해외에서 군자금 모집을 맡은 손문(孫文 : 쑨원)을 맞아들여 난징 임시정부의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하고 중화민국을 발족시켰다.

손문은 '혁명시대의 정부'의 과제는 민족, 영토, 군정, 내치, 재정의 통일에 있다고 하였으나 밖으로는 일본·영국 등의 열강이, 안으로는 임시정부 내 입헌 군주제를 지향하는 입헌파 등이 책동하고 혁명파의 내부대립 등으로 말미암아 '북벌'에 의한 혁명의 철저화가 곤란해짐으로써 베이징의 청 정부와 남북화의(南北和議)가 진행되었다.

이에 앞서 청 정부는 권력 투쟁 과정에서 밀려 은거하고 있던 북양 군벌의 실력자 위안스카이(袁世凱)를 기용하여 혁명군의 토벌을 명하였지만, 내각을 조직하여 군정 양권(軍政兩權)을 장악한 그는 영국을 중개자로 난징 임시정부와 화평을 모색하였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청나라의 선통제(宣統帝)를 퇴위시키는 조건으로 손문으로부터 임시 대총통의 지위를 양보받았다.
이에따라 1912년 2월 12일 선통제가 퇴위 청나라가 멸망하고 같은 해 3월 10일 위안스카이가 정식으로 대총통에 취임함으로써 혁명파의 난징 임시정부와 대립하는 베이징정부(北京政府)가 발족되었다. 혁명파는 위안스카이에게 법제적 구속을 가하기 위해 다음날 난징에서 '중화민국임시약법'을 공포하였는데, 이것은 헌법의 초안이라고 할만한 것이다.

임시약법은 주권재민(主權在民)과 인민의 자유·평등의 권리를 규정하였다는 점에서 획기적 의의를 가진다. 또한 내각책임제를 도입하고 국무총리에게 큰 권한을 부여하여 대총통의 전횡(專橫)을 예방하려고 하였다. 이해 4월 1일에는 손문이 정식으로 난징 임시정부의 대총통 직을 사임하고, 5일에는 임시정부의 베이징 이전이 결정되어 이른바 '혁명시대'는 막을 내렸다.

위안스카이에게 정권을 위양(委讓)한 후, 손문 등 혁명파 내 급진세력은 재야의 입장에서 실업진흥과 사회개혁을 추진하였고, 쑹자오런(宋敎仁) 등의 온건 세력은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다수정당의 수립과 내각책임제의 실현에 힘썼다.

입헌공화제를 원칙으로 한 중화민국의 발족에 따른 정당난립 속에서 쑹자오런 등은 중국동맹회를 개조(改組)하여 공개정당으로 만들고, 소당파(小黨派)를 합쳐 국민당을 만들어 정당정치의 실현을 꾀하였다.

1913년 1∼2월에 실시된 국회선거에서 국민당이 승리하자, 위기감을 느낀 위안스카이는 열강과 입헌파의 지지를 받아 국민당에 무력탄압을 가하고 쑹자오런을 암살, 제2혁명을 불러 일으켰다.

제2혁명을 진압하는데 성공한 위안스카이는 제제운동(帝制運動)을 추진했으며 이에 대한 지원을 대가로 1915년 5월 9일 일본의 대(對)중국 21개조의 요구를 수락하였다. 이는 결국 제3혁명을 불러일으켰다. 1916년 6월 6일 제정복귀를 시도한 위안스카이가 죽은 뒤 중국은 군벌혼전상태에 빠졌고, 결국 신해혁명은 완전하지 못한 상태로 끝을 맺었다.

1945년 = 일본 패망 후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간에 이루어진 협상에서 합의한 내용을 담은 ‘국공쌍방회담기요(國共雙方會談紀要)’가 충칭(重慶)에서 체결됐다. 이를 통상 ‘쌍십협정(雙十協定)’이라고 부른다.

양측은 각 당파가 평등하고 합법적으로 참여한 가운데 국가를 건설한다는 데 합의하고 국민의 민주적 권리를 인정했으며 정치협상회의를 소집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손문(孫文 : 쑨원)이 민주주의로의 전환에 선행된다고 말했던 정치적 훈정기를 끝낸다는데도 합의했다. '훈정 시기'는 장제스의 개인 1인 독재 시기로 비판받아왓다.

하지만 국민당은 공산당 해방구 내의 정권과 군대를 인정하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은 자신들의 관할 하에 있는 군대를 24개 사단 혹은 20개 사단으로 재편성하기를 희망하였고 광둥(廣東), 저장(浙江), 쑤난(蘇南 :장쑤성 남부), 환난(?南 : 안후이성 남부), 환중(?中 : 안후이성 중부), 후난(湖南), 후베이(湖北), 허난(河南) 등 8개 지역에 흩어져 있는 군대를 룽하이루(龍海路) 이북 및 쑤베이(蘇北: 장쑤성 북부)지역과 환베이(皖北 : 안후이성 북부)지역의 해방구로 집결시키기를 희망했다.

국민당 측은 군대 재편 문제는 차후 협상을 통해 해결하여야 한다는 원칙 아래 공산당이 관할하는 부대를 20개 사단으로 재편하겠다는 제안에 대해 이를 고려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하는 선에 머물렀다.

협정 서명이 이루어진 뒤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과 공산당의 마오쩌둥(毛澤東)은 서명이 이루어진 장소에서 10분간 회담을 하고 서로 상대방을 초청하는 연회를 개최했다.(사진)

다음 날이 마오쩌둥은 장즈중(張治中)과 왕러페이(王若飛)이와 함께 옌안(延安)으로 되돌아 갔다. 충칭에 온지 45일만의 일이였다. 한편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충칭에 남아 협상을 계속했다.

1934년 = 홍군 8만 6,000명이 장시(江西)성 루이진(瑞金)과 위두(于都), 푸젠(福建)성 창팅(長汀)과 링화(寧化) 등을 떠나 장정(長征) 길에 올랐다.

혁명 근거지였던 싱궈(興國), 링두(寧都)와 스청(石城) 등이 실함됨으로써 국민당 군의 5차 포위공격을 막아낼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짐에 따라 취해진 조치였다.

장정 도중인 1935년 1월 구이저우(貴州) 성의 쭌이(遵義)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이 군 지휘권을 장악함으로써 최고 지도자의 위치에 올랐다.

[今天歷史-1월15일] 遵義회의

장정에 오른 지 1년 후인 1935년 10월 19일 마오쩌둥이 지휘한 홍군 주력은 산베이(陝北 : 산시성 북부)의 혁명근거지인 우치(吳起)진(鎭)의 제 15군단과 만남으로써 장정의 막을 내렸다.

1년여의 장정 기간 홍군은 11개성, 2억 인구의 지역을 통과하였고 62개 현(縣)과 도시를 공격, 점령하였으며 2만 5,000리 장정 기간 동안 380차례의 전투를 치렀다.

장정 막바지인 1935년 9월 북상을 거부하고 남하하였던 장궈다오(張國燾) 휘하의 제4방면군과 후난, 스촨성 등지의 혁명근거지의 남아 있던 홍군들로 구성된 제2방면군 역시 1936년 10월 마오쩌둥의 주력군에 합류했다.

장정의 구체적 과정은 다음과 같다.

마오와 주더(朱德)가 지휘한 본진인 제1방면군은 허룽(賀龍)을 지휘자로 하는 제2방면군과 후난(湖南), 후베이(湖北), 쓰촨(四川), 구이저우(貴州)의 성(省)경계지구에서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국민당군의 심한 공격을 받아 구이저우로 방향을 바꾸어 구이저우 성의 쭌이(遵義)를 점령했다. 1935년 1월 이곳에서 열린 중앙정치국확대회의가 바로 준이회의이다.

이때부터 홍군의 행동은 일단 기동성을 띠게 되었고, 후베이, 허난, 안후이(安徽) 경계의 근거지를 버리고 쓰촨성 북부로 나와 있던 제4 방면군과 합류를 시도했다.

제1방면군은 다두강(大渡河)을 건너 5,000m에 이르는 다쉐산(大雪山)을 넘어 고난의 행군을 한 후, 쓰촨의 마오궁(懋功 :지금의 샤오진小金)에서 제4 방면군과 합류에 성공했다.

그러나 제4방면군의 지휘자 장궈다오(張國燾)는 당중앙의 방침에 반대하여 북상을 거부하고 시캉(西康 : 남서부의 옛 성이름)과 쓰촨의 변경에 머무르고 말았다.

마오쩌둥이 이끄는 제1방면군은 북상을 계속하였다 주력부대가 산시성 북부에 도착하여 새로운 근거지를 만들었다. 루이진을 출발한 지 368일만의 일이었다. 마오가 이끈 제1방면군은 며칠 뒤 산시 근거지의 제 15군단과 합류했다.

한편 제1방면군의 지원작전을 펴던 제2방면군은 약 2만의 병력으로 행군하여 시캉성에서 제4방면군과 합류했다. 정치투쟁을 거친 끝에 장궈다오도 마침내 북상을 받아들였고 이에 따라 양군은 1936년 10월 간쑤(甘肅)에서 제1방면군과 합류함으로써 장정은 완료됐다. 장정이 시작된지 2년만의 일이었다.

장정 출발 당시 본진인 제1방면군 8만 6,000명을 포함, 각지에 흩어져 있던 홍군의 전병력은 30만 명이었으나 장정을 마치고 새로운 근거지에 도착했을 때에는 그 10분의 1에 불과한 3만 명이었다.

한편 장시 등에 잔류한 천이(陳毅)의 소부대는 놀랄 만한 인내력으로 전력을 유지했고 이는 후에 신사군(新四軍)으로 발전했다.

장정에 대해 에드가 스노는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은 것도 여기에 비한다면 휴일의 소풍에 불과하다"고 말한 바 있다.

마오는 장정을 두고 “혁명의 씨앗을 전국에 뿌렸다”라고 그 의의를 평가했지만 쭌이회의 이전 당 지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28인의 볼세비키’의 리더 왕밍(王明)은 모스크바 망명 뒤 참담한 전력손실만을 야기한 불필요하고 무모한 후퇴였다고 평가절하한 바 있다. 왕밍은 장정 당시 모스크바에 머물러 장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2000년 =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중국과의 ‘영구정상무역관계(PNTR)' 법안에 서명했다. 미국의 상하 양원을 통과한 이 법안은 대통령의 서명으로 정식으로 미국 법률이 되었다.

이 법안은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 가입한 후 미국은 ‘1974년 무역법’ 중 관계 조항에 따라 중국에 대해 매년 ‘최혜국 대우(MFN : 실질적으로는 정상무역관계)’ 부여 여부를 심사하는 절차를 폐지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1925년 = 고궁(故宮)이 처음으로 개방되었다.

1919년 =쑨원(孫文) 중화혁명당을 중국 국민당으로 개조. 현재 대만의 국민당은 이날을 창당 기념일로 기리고 있다.

세계사 속의 오늘

제 18회 도쿄(東京)올림픽이 개막되고(1964), 스피로 애그뉴 미 부통령이 탈세혐의로 사임했다(1973).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

히로히토 일본 국왕에게 폭탄을 투척한 이봉창(李奉昌)의사가 이치가와 형무소에서 순국했다(1932). 해병대가 해군에 통합됐다(1973).

김일성이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설치했다 (1945),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은 1946년 7월 북조선 노동당으로 개편한 뒤 1949년 6월에는 남노당을 흡수해 조선노동당으로 확대했다.

김일성이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내놓았다(1980).

2017/10/10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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