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5/25 23:12



[今天歷史-1월18일]南巡...중국 천하를 뒤바꾼 5주간 米壽 순례

덩샤오핑이 마커쓰(馬克思) 선생, 즉 마르크스와 마오쩌둥을 만나러 이 세상을 떠난 지 21년이 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공산중국은 여전히 '덩샤오핑의 중국'이다.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인 시진핑이 유사 이래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중의 최고지도자의 위상을 확보하고 있지만 그에게 덩샤오핑은 '넘사벽'이다. 부처님 손바닥 안의 여의봉을 쥔 손오공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의 하부구조' 경제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덩샤오핑이 씨를 뿌렸고 골격도 덩샤오핑의 손에서 갖춰졌다. 시진핑은 체중을 불렸을 뿐이다.

'시황제'로 불리는 것을 은연 중 즐기는 시진핑은 상부구조 정치체제를 건드리려 하지만 덩 브랜드의 '격대 교대'라는 최고 지도자 임기 및 질적 교대 틀과 대립하는 세력 간의 정권 교체라는 중국 특색의 정권 교체 시스템의 틀은 확고하다.

마오쩌둥은 중국 수도 베이징 한복판 천안문에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지만 그는 '박제된 우상'일뿐이다. 마오는 '진리'로 여전히 존숭되지만 실제로 작동되는 '실천'은 덩샤오핑이다.

당정군의 모든 직책에서 물러난 중국공산당의 원로 평당원 덩샤오핑이 남방 시찰을 시작한 날은 1992년 1월 18일이다.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 한복판 크렘린궁 앞에 걸려진 '낫과 망치'의 소련 국기 적기가 내려진 1991년 12월 25일부터 23일 뒤였다.

한번 내려진 크렘린궁의 적기는 다시 올려지지 않았다. 1991년 12월 25일 밤 모스크바에서 '낫과 망치 깃발'의 하강은 '완전하고 불가역적인' 깃발 내리기였다.

소련 공산주의의 '환상의 종말이자 눈물 없었던 영결식'이 치러진지 채 한달도 못되어 시작하여 2월21일까지 5주간 이어진 이 시찰 여행은 즁국 공산주의 체제가 소련 공산주의 붕괴 도미노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한마디로 중구 공산주의는 '유신'하여 '중흥'의 모멘텀을 만들었고 오늘의 '굴기'의 토대를 구축했다.

이해 10월 14차 중국공산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덩샤오핑의 질적 변환 선언 이후 8개월 동안의 시간은 반대자, 기회주의자와 야심가들을 낱낱이 노출시키는 기간이었다.

그들의 숙청, 정리와 재교육을 철저히 실행하는 방식을 통해 '새 부대에 새술'로 반드시 필요한 인적 청산과 미래와 걸맞은 물갈이가 이루어졌다.

이로써 사회주의 시장경제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양축으로 하는 오늘의 중국 공산주의 체제가 그 총설계자 덩샤오핑이 죽은 뒤에도 여전히 굳건하게 지속하게 만들었다. < 스위프트-버크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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批孔批林, 21개조 요구

1992년 1월 18일 중국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이 남방시찰을 시작했다.

당시 덩샤오핑의 나이는 88세였다. 또한 1989년 11월, 1990년 3월 각각 당과 국가의 군사위 주석 직을 장쩌민(江澤民)에게 모두 넘겨준 터라 당정의 아무런 직책을 갖지 않은‘평당원 원로’의 신분이었다. 하지만 그의 남방 시찰은 황제의 남순(南巡), 즉 '남방 순시'에 비견되었다.

2월 21일까지 우창(武昌), 선전(深?), 주하이(珠海), 그리고 상하이(上海) 등을 시찰하며 덩샤오핑이 행한 담화는 ‘남순강화(南巡講話)’로 불리웠는데 이는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침체된 개혁개방에 대한 복음이었다.

남순 기간 덩의 일거수 일투족을 홍콩 등 비(非)공산 중화권 언론은 대대적으로 보도하였으나 정작 중국 중앙의 언론은 침묵을 지켰다.

단지 선전특구보 등 지역 언론만이 그의 동정을 보도할 뿐이었다. 이는 천안문 시위를 유혈 진압한 기초 위에 세워진 장쩌민(江澤民)-리펑(李鵬) 체제에 대해 물구나무 선 자세를 바로 하라는 식의 근본적인 노선 전환을 촉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중앙의 침묵은 덩샤오핑발 노선투쟁에 대한 당시 중국 최고 지도부의 좌고우면을 상징했다.

1978년 12월 11기3중전회 이래 가장 치열한 노선투쟁은 또 다시 덩샤오핑의 승리로 끝맺게 된다.

1992년 3월 31일 당기관지 인민일보는“동쪽에서 바람이 불어 와 눈앞 가득 봄이 전개되다(東方風來滿眼春)‘이라는 제목의 1면 머리기사로 1980년대 개혁개방의 상징도시인 선전에서 덩의 활동과 발언을 르포 형식으로 소개한다. 당 중앙은 덩에게 완전 백기를 든 것이다.

그리고 이해 10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14차 당대회는 덩의 남순강화를 구체화하는 절차였다.

덩샤오핑이 사망한지 21년이 흘렀지만 중국은 아직도 남순강화 노선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후진타오(胡錦濤)-원자바오(溫家寶) 체제 기간(2002~2012) 남순강화 노선의 발전적 극복을 위해 마오쩌둥(毛澤東)의 평등주의 노선을 강조하였지만 여전히 생산력의 확대가 주이고 분배가 종임은 부인하지 못한다.

현 최고 지도자 시진핑(習近平)은 경제특구 구상을 처음 제안한 시중쉰(習仲勳)의 아들이다. 그는 현재 경제성장보다는 구조개혁에 역점을 두고 있으나 크게 보아 후진타오보다는 더 남순노선에 가까운 인물이다.

덩샤오핑 남순강화의 주요 발언은 다음과 같다.

“기본노선(개혁개방을 지칭)은 1백년동안 견지되어야 한다. 동요가 있어서는 안된다."

“각 부문 공작의 시비(是非)를 가림에 있어 판단의 표준은 사회주의 사회의 생산력에 유리한가, 사회주의 국가의 종합국력 증강에 유리한가, 인민의 생활수준을 높이는 데 유리한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사회주의의 본질은 생산력 해방, 생산력 발전, 착취의 소멸, 양극분화의 제거를 통해 최종적으로 공동부유를 달성하자는 것이다."

“계획이 많으냐 시장이 많으냐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가르는 본질적 기준이 아니다."

“개혁개방은 대담하게 기회를 포착하여 자기를 발전시켜야 하는데 관건은 경제발전이다."

“발전이 가장 중요한 도리이다(發展是更道理)."

“중국은 우(右)를 경계해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좌(左)'를 방지하는 일이다."

“인재배양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4화(연경화, 전문화, 혁명화, 지식화)의 기준에 따라 덕재겸비(德才兼備)한 후계자 그룹을 선발해야 한다.”

[鄧小平 100주] 추억(1)-덩샤오핑과 술래잡기2004/08/21 10:47
1974년= 중공중앙(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명의로 장칭(江靑)이 주관하여 편집한‘린뱌오와 공맹지도(林彪與孔孟之道)’가 발표됐다. 이를 계기로 중국 전역에서 비림비공(批林批孔)이 전개되었다.

비림비공이 겨냥하는 목표는 저우언라이(周恩來)었다.

1월 24일, 25일 이틀간 장칭은 중앙정치국의 토론을 거치지 않고 또 마오쩌둥에게도 보고하지 않은 상황 하에서 베이징 주둔 부대, 중앙 직속기구, 그리고 국가기관을 동원하여 비림비공 운동을 위한 군중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군중대회를 통해 장칭 일파는 저우언라이와 중앙영도 인물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오는 장칭 일파의 이러한 탈권활동을 뒤늦게 알고 장칭 일파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마오의 제동으로 장칭 등 4인방으로 대표되는 홍(紅)과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이 대표하는 전(專) 간의 권력 투쟁은 1976년 1월 저우언라이 사망 때까지 잠시 연기됏다.

저우 사망 뒤 벌어진 권력투쟁에서 덩샤오핑이 실각함으로써 일단 4인방이 승리했으나 이해 9월 마오의 사망과 바로 다음 달 일어난 10월 정변으로 4인방이 체포됨으로써 1978년 12월 11기3중전회에서 전의 최종 승리를 예고했다.

1915년 =일본이 중국 위안스카이(袁世凱) 정권에 5개항 21개조의 요구를 제출했다.

1914년 1차대전 발발 후 독일이 유럽 전쟁에 몰두하느라 아시아 문제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틈을 타 일본은 중국에서 세력 확대를 기도하였다.

1914년 8월 23일 독일에 대해 선전을 포고한 일본은 영국이 독일 선박의 운항을 막는 수준에서 군사 활동을 자제할 것을 주문했으나 이를 무시하고 병력을 산둥(山東) 반도로 파견하였으며 3개월 뒤 칭다오(靑島)의 독일 조차지와 자오지(膠濟)철로를 장악했다.

1차 세계대전은 아프리카에 대한 현상 유지를 원하는 영국을 대표로 하는 선발 제국주의 세력과 현상 타파를 추구해온 독일 을 선봉으로 한 후발 제국주의 세력 간 충돌에서 비롯됐다.

영국은 아시아에서도 식민질서의 현상 유지를 원했으나 동맹국 일본은 이를 무시한 것이다.

일본은 해양 세력으로서 영국과 지정학적 이해를 같이하고 있으나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서 영국과 다른 이해 관계를 갖고 잇엇다. 일본은 상호 충돌하는 입장에서 후자를 선택한 것이다.

1915년 1월 7일 중국 정부는 일본에 군대의 철수를 촉구하였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였다.

일본 정부는 1월 18일 오후 베이징 주재 일본 공사를 통해 위안스카이에게 21개조 요구 사항을 전달하고 중국이 이를 받아들이면 화친할 수 있다고 말했다.

21개조의 주요 내용은 독일이 산둥반도에서 획득한 일체의 이권을 일본에게 넘기고 남만주와 동부 내몽골 지역에서 일본의 우월적 지위를 향유하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또한 중국 중앙정부는 정치, 재정, 군사 고문에 일본인을 초빙하고 중국 내 일본 병원, 사원과 학교 등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며 지방 경찰을 중국과 일본이 합작하여 운영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위안스카이 정부는 수일간 내부 논의 끝에 주권에 제약을 가하지 않는 범위에서 일본의 일부 요구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방침을 정하고 일본과의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의 태도는 완강하였다.

위안스카이 정부는 외국 및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해 영미 외교관과 언론에 일본의 요구 내용 일부를 흘렸다. 어부지리를 겨냥 해 고래를 자극했으나 정작 사태를 끌고간 것은 새우들이었다.

21개조 내용이 알려지자 전국 각지에서 각종 각양의 애국활동이 전개되었다.

황제의 꿈을 갖고 있었던 위안스카이는 일본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 이해 5월 9일 21개조 요구를 수락했으나 중국 민중의 강력한 반대운동으로 일본의 야욕을 저지시켰다.

[今天歷史-5월9일] 위안스카이, 21개조 요구 수락u>

일단 잠복했던 21개조 요구는 4년 뒤에 부활한다.

일본은 1919년 1차대전 처리를 위한 파리 평화회의에서 서구 열강으로부터 21개조 요구를 승인받았으나 이해 5월 4일 중국 민중의 5.4 운동으로 또 다시 아무 소득도 얻지 못했다.

결국 21개조 요구는 1922년 워싱턴 회의에서 파기됨으로써 일본의 중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야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만 하고 일본으로서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역사 무대에서 퇴장됐다.

하지만 중국에는 민족의 굴욕을 상기케하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

이승만 대통령이 '평화선'을 선포했다( 1952). '이승만 라인'으로도 부르는 이 '평화선'에 대해 일본 정부와 대만의 국민당 정부가 항의, 반발했다.

이 선언으로 독도를 실효 지배하게 되었는데 이는 미국 8군 사령관 클라크가 제정한 '클라크 라인'이 '이승만 라인'과 거의 겹쳤기 때문이다.

'평화선'은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면서 소멸됐다.


2018/01/18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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