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5/25 23:12



[今天歷史-1월21일]華國鋒 총리 지명...가장 내게 적합한 자에게

마오쩌둥은 '영원한 총리" 저우언라이의 후임으로 저우 타계 13일 간의 장고 끝에 '듣보잡' 화궈펑을 지명했다.

알렉산더 대왕은 숨을 거두기 전 후계자로 누구를 지명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가장 강한 자에게"라는 말을 남겼다.

당시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마오는 후계자로 '능력'과 '실권'을 모두 배제했다.

알렉산더의 말을 빗대어 마오의 선택을 내심의 말로 표현해 보자면 '가장 적합한 자'가 되지 않을까.

수석 부총리인 상무 부총리 덩샤오핑은 외교, 국방 그리고 경제 부문에서 능력이 뛰어나고 실적으로 이를 입증햇다.

그러나 덩의 궁극적 노선이 자신과는 다르다는 점을 가장 확실하고 정확하게 마오 자신이 파악하고 있었다.

마오에게 있어 옐친이 고르바초프가 여겼던 겇처럼 덩샤오핑은 '허가 받은 반골'이었다. '마오는 비상도 약이다'라는 심정으로 그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장춘차오는 복수의 부총리군에서 덩 다음 서열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확고하게 장악하던 선전 매채를 동원, 총리가 된 것처럼 김칙국 마시듯 거들먹 거렸다.

마오는 장츈차오가 선전과 선동에 뛰어났고 권력 탈취와 이를 유지하는 권모술수에 탁월하다는 점을 인정했고 그 이유로 중용했다.

하지만 경제는 물론 행정 면에서는 대책 없이 무능했다. 더군다나 지도자의 그릇으로는 마오 자신의 비전 무게를 고스란히 담다가는 깨저버릴 사기 그릇과 같은 존재라는 점을 일찌감치 확인하고 있었다.

마오는 4인방의 실질적 리더 장춘차오를 '호랑이 가면 속 여우'로 그 실체를 판단했다. '보약도 독약이 된다'는 경계감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인물이 능력 면에서는 덩샤오핑에 크게 뒤지고 경제와 행정 면에서는 창춘차오보다는 나은 화궈펑을 택한 것이다.

화궈펑은 충성 면에서는 창춘차오 못지 않았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러나 창춘차오의 교활함이 없었다. 중국의 권력 세계에서 이는 치명적 약점이었다.

마오는 이 '마오이즘의 우등생'에게 권력 의지를 키우고 홀로 설 때까지 화를 지켜줄 '호위 무사'를 배치하고 '병풍 체제'를 설계할 생각이었다.

다만 그 시간이 너무 짧았다. 마오는 화궈펑 총리 지명 7개월 19일 뒤 세상을 떠났다.

그러함에도 마오 노선이 자신의 사후 2년 3개월 뒤인 11기 3중전회 때까지 지속되고 또 천안문에 마오의 대형 초상화가 지금까지 여전히 걸려져 있는 요인 중의 하나는 마오의 시각에서는 양극단인덩과 장을 모두 배제하고 중용적 인물인 화궈펑을 최후의 후계자로 선택한 때문이다.

알렉산더 대왕의'무책임한' 유언으로 거대한 그의 제국은 곧바로 분열됐다.

스탈린도 구체적으로 후게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묵시적으로 '알렉산더 대왕의 유언인 가장 강한 자에게란 말을 한 셈이다.

스탈린 사후 권력투쟁, 정변을 통해 흐루시초프, 브레즈네프 등 최고 권력자가 바뀌었고 '가장 강한자' 옐친에 의해 소련도 해체됐다.

덩샤오핑은 '시대에 적합한 자'를 선택햇다. '유능'과 '강함'을 모두 배제했다는 점에서 마오와 같았으나 덩은 시대의 흐름'에 따를 수 있는 인물을 택했다는 것이 결정적 차이였다.

마오와 덩은 사이비 관계다. 덩의 사후 21년째'붉은 중화 제국'은 순항하고 있다.

시진핑은 자신 스스로 '가장 강한자에게'를 추구하고 있다

시진핑은 덩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분열의 싹을 티우고 있는 것이다. <스위프트-버크왈드>

宣統帝 즉위 蔣介石 사임, 대만 일본 총통부 아편 전매 실시, 청와대 기습 기도 11.21 사태 발생
1976년 1월 21일 마오쩌둥(毛澤東)은 화궈펑(華國鋒) 부총리 겸 공안부장을 총리 대리로 지명했다.

이해 1월 8일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사망함에 따라 이루어진 인사는 모두의 의표를 찌르는 한편 상호 대립하는 정치세력 간 '견제와 균형’을 도모한 마오의 절묘한 선택이었다.

당시 상무(수석) 부총리는 덩샤오핑(鄧小平)이었으나 저우의 생전에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을 펼치며 저우와 덩을 공격했던 4인방은 4인방의 일원으로 사실상 리더인 부총리 장춘차오(張春橋)가 후임 총리에 지명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마오는 화궈펑이 지덩쿠이(紀登奎)와 천시롄(陳錫聯) 등 2명의 부총리의 보좌를 받아 국무원의 일상 업무를 처리하도록 하고 덩샤오핑은 외교 문제를 전담하도록 했다.

마오가 화궈펑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55년 7월이다. 마오는 당시 고향 후난(湖南)성 상탄(湘潭)현 서기로 있던 34세의 화궈펑이 작성한‘농촌 합작화 사업은 반드시 빈농에 의존해야 한다’라는 글을 읽고 그를 주목했다.

이후 마오는 정치적 위기 때마다 화궈펑을 활로를 찾는 '신의 한 수'로 활용했다.

'화궈펑 수'는 나름 효과적이었으나 그것은 '착점한' 마오의후 속수를 전제하고 있었다. 마오가 권력게임의 반상에서 사라진 뒤 화 스스로 한 행마는 평범하거나 악수였다는 이야기다. 상대방이 던진 회심의 응수에 여지없이 일패도지했다.

마오가 대약진 운동 실패 뒤 펑더화이(彭德懷)의 거센 비판을 가까스로 제압한 1959년 여산(廬山 : 뤼산)회의 후 화궈펑을 후난성 서기로 직접 임명했다.

1971년 9월 린뱌오(林彪)의 쿠데타 실패 이후 마오는 화궈펑을 후난성에서 중앙으로 불러 올렸고 1975년 국무원 부총리 겸 공안부장 직을 맡겼다.

이와 동시에 제2야전사 정치위원 출신 덩샤오핑을 복권, 중용하였는데 이는 '문혁의 우등생'과 문혁 초기 '2호 주자파'로 지칭되며 표적 2순위와 '문혁의 매브릭' 4인방을 한 바구니에 담아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마의 절묘한 인사 행마였다.

마오의 화궈펑 총리 임명 67년 전인 1909년 이날은 청나라 마지막 황제이자 중국 역사상 마지막 황제이기도 한 푸이(溥儀)가 즉위식을 갖고 정식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날이다. 연호가 선통(宣統)이어서 선통제로 불린다.

1908년 11월 15일 사망한 서태후(西太后)가 죽음을 앞두고 당시 만 2세에 불과한 그를 후임 황제로 지명했다. 1911년 10월 일어난 신해혁명으로 인해 선통제는 1912년 2월 황제에 오른 지 3년만에 퇴위해야 했다.

죽음을 앞둔 마오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된 화궈펑은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鄧小平)과의 노선 투쟁에서 패배, 사실상 실각했다.

마오에 의해 총리에 지명된 지 만 3년을 한 달여 남겨 둔 시점이었다.

화궈펑의 ‘탈당’과 천두슈의 ‘출당’ 2001/11/13 12:08

1949년 = 장제스(蔣介石)가 공산군과 내전에서 연이은 패배를 당한데 대해 책임을 지고 총통 직을 사임한 뒤 수도 난징(南京)에서 고향인 펑화(奉化)현으로 떠났다.

바로 하루 뒤 공산군에 포위당하고 있던베이핑(北平 : 현 베이징) 방어 총사령관이 공산군에 항복했다.

장제스의 사임 변이 인상적이다. ‘인고불능시사(因故不能視事)’였다. "업무를 볼 수 없다"란 말이지만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총통 대리가 된 리쭝런(李宗仁)은 공산당과의 평화회담을 희망한다고 밝히고 샤오리쯔(邵力子)와 장차(張洽) 등 5명을 대표로 파견했다.

1897년 = 대만의 일본 총통부는‘대만 아편령'을 공포하고 아편의 전매를 실시했다.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b>

김신조 등 북한 특수 부대 124군 부대 소속 게릴라 31명이 청와대 기습을 기도햇다(1968).

1.21 사태로 부르는 청와대 기습 기도 사건에 참가한 북한 게릴라 31명은 생포된 김신조 외에 생포된 뒤 무장 해제 과정에서 폭사한 1명을 포함한 27명이 교전 중 사살되거나 폭사됐고 1명은 후에 시체로 발견됐으며 나머지 2명이 북한으로 복귀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측에서는 민간인이 7명 사망했고 당시 종로 경찰서장 최규식 경무관 등 30명이 전사했다.

청와대 기습 기도 사건의 실무 책임자는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로 한국전쟁 때 사망한 김책의 둘째 아들 김정태이다.

그는 2013년 사망했을 때 북한이 국장으로 장례를 치러준 김국태의 친동생이기도 하다.

김일성은 청와대 기습 시도 4년 뒤인 1972년 남북대화 교섭을 위해 북한을 비밀 방문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1.21사태는 맹동주의자들의 소행이었다고 변명하며 박정희 대통령에게 미안하다는 뜻을 전해달라고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불과 2년 뒤인 1974년 8월 15일 북한은 재일동포 문세광을 통해 또 다시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다. 박 대통령은 무사했으나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피살됐다.

참여정부 당시 김정일이 송이버섯을 선물로 보냈을 때 이를 들고 남한에 온 북한군 장성 박재경은 살아서 북한으로 돌아갔던 2명중 한 사람이라고 한다.

조선 제26대 국왕이며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이 타계했다(1919년). 1852년생으로 향년 67세.

아버지 대원군과 왕비 명성황후의 간섭으로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허약한 군주로서 왕조 말기 내우와 서세동점기 외환이 동시에 벌어지는 어려운 시기를 만나 국권을 지키려 나름 애썼으나 결국 망국을 막지 못한 불행한 그리고 또 무능한 군주였다.

고종은 1863년에 왕위에 올랐으며 1897년에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로 즉위했다.

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외교권을 박탈당했으며 1907년 일본의 침략을 세계에 폭로하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일으켜 강제 퇴위됐다.

3년 뒤인 1910년 일제의 병탄 늑약으로 대한제국은 국권을 상실했다.

고종의 죽음과 관련 일제에 의한 독살설이 나돌았으며 이는 이 해 3월 1일국권 회복 3·1 독립 만세 운동이 폭발하는 단초를 마련했다.

고종은 독립 자주를 표방한 대한제국 수립 뒤 1904년까지 러시아와 일본 등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팽팽히 대립하는 등 강대국 간 세력 균형이 형성된 호기에 정치 개혁과 군사력 강화라는 절대절명의 과제를 수행해야 했다.

3·1 운동 뒤 수립된 상하이 임시정부는 정체를 대한제국의 군주제에서 공화제로 선택했는데 이는 고종의 과오를 잊지 않고 그와 대한 제국에 대한 미련을 버렸기 때문이다.

2018/01/21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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