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5/24 23:50



[今天歷史-1월24일]鄧 小南巡...개혁은 南, 개방은 바다

덩샤오핑에게는 오뚝이라는 '부도옹(不倒翁)'와 함께 '개혁개방 총설계사'라는 별명이 있다.

전자가 그의 정치 역정을 압축한 것이라면 후자는 그가 정치를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목표를 응축한다.

덩샤오핑이 3번의 숙청·실각을 딛고 최고지도자가 된 때는 1978년 12월 11기 3중전회(중국공산당 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에서였다.

이후 그의 개혁, 개방 정책 추진의 핵심 퍼포먼스는 '남순(南巡)', 즉 남쪽 지방 시찰이었다.

덩샤오핑은 춘제(春節 :설날)를 전후한 혹한 시기에 따뜻한 연 해지역을 찾아 휴식을 취하면서 외국 투자 합작 기업을 시찰했다. 이 기간 그의 발언들은 사전에 정교하게 다듬은 것으로 정책 방향에 대한 울림이 큰 메시지였다.

'남쪽의 따뜻함'이 개혁을 상징한다면 해외로 이어지는 '바다'는 개방을 상징한다.

혹한기 속의 따듯한 지역의 소식은 '봄이 멀지 않았다'는 시사다. 바다로 향한다는 것은 만리장성에 갇혀 있는 폐쇄적인 마음자세에서 벗어나 세계를 호흡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양안 간 단절 관계를 허무는 삼통(三通)이 소(小)삼통과 (大)대삼통으로 단계적으로 발전했듯이 남순도 1984년의 소남순과 1992년의 대남순으로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점에서 시작, 점을 이은 선을 거쳐 면으로 확대되는 순차적 방식이었다. <스위프트-버크왈드>

1984년 1월 24일중국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 개방 정책 시작과 함께 지정한 연해특구에 대한 시찰을 시작했다.

1992년 덩의 유명한 남순강화가 있기 8년 전 일이다.

92년‘대남순(大南巡)’이 잦아들 위기에 처한 개혁과 개방의 불길을 재점화하여 활성화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84년 '소남순(小南巡)'은 어렵게 지펴 막 타오르는 개혁과 개방의 불꽃을 유지하고 이를 확산시키는데 목적이 있었다 .

덩이‘소남순’을 통해 방문한 특구지역은 선전(深?), 주하이(珠海), 샤먼(廈門) 등 3곳이었다. 덩샤오핑은 1978년 11기 3중전회를 통해 집권한지 1년만인 1979년 후반 광둥성의 선전, 주하이, 산터우(汕頭) 등 3 곳과 푸젠(福建)성의 샤먼 등 모두 4 곳을 특구로 지정했다.

특구 지정 아이디어를 내놓은 사람은 시중쉰(習仲勛 : 1913~2002)이다. 당시 광둥성 서기 겸 성장으로 있던 그는 1979년 초부터 이를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덩샤오핑은 ‘ 새장(鳥籠)경제론’으로 유명한 천윈(陳雲)의 반대를 무릅쓰고 특구지정의 결단을 내렸다.

시중쉰의 아들이 바로 현 국가주석 시진핑(習近平)이다. 시진핑은 특구의 하나인 샤먼시의 부시장을 지냇다.

시중쉰의 특구 발상 모델은 박정희의 마산 수출자유지구다. 박정희는 일본의 자본을 끌어 들이기 위해 일본과 가까운 마산을 선택했고 시중쉰은 광둥성에 인접한 홍콩 자본을 우선적으로 겨냥햇고 대만을 넘겨 보았다.

시중쉰 아들이 중국 최고 지도자가 되고 한국 대통령으로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당선된 이후 중국과 한국 관계가 긴밀해진 배경에는 이런 인연도 도사리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2016년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양국의 관계가 악화했다. 박근혜 정부는 북한의 4차 핵실험과 연이은 미사일 발사 이후에도 중국이 여전히 평양에 우호적이라는 판단 아래 이해 7월 8일 주한미군 기지에 사드 배치를 허용햇다.

중국은 한국 정부의 이 조치가 중국의 전략적 이해를 훼손한다고 강력 반발하였으며 경제 및 인적 교류 제한 조치를 취했다.

천윈은 덩샤오핑이 특구를 지정한 뒤 자신의 반대 논리를 가다듬어 1980년 12월 2일 이를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덩샤오핑의 연안특구 지대 방문은 천윈의 공개 반대 천명 이후 3년여에 걸쳐 물밑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노선 투쟁에 대한 덩샤오핑의 응수였다.

덩샤오핑의 소남순 이후 개혁개방에 박차가 가해졌으나 아직 완전한 대세가 되지는 못했다.

1992년 '대남순'이 있기 전까지 '새장 경제론'은 무시못할 소수파 이론으로 중국 경제를 이끌고 나가는 한 축이 되었다.

1989년 천안문 사태 후 리펑의 이른바 치리정돈 정책은 '새장 경제론'의 구현이었다.

덩샤오핑의 최후 승부수 대남순, 즉 남순 강화로 대세가 결정된 뒤에도 천윈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천윈은 덩샤오핑에 2년 앞선 1995년 사망하기 전까지 특구를 단 한 차례도 방문하지 않았다.

덩샤오핑은 이 '소남순'을 통해 개방의 성과를 점검하고 보다 많은 지역으로 개방을 확대하려는 의도를 밝혔다.

덩샤오핑은 선전에서 “선전의 발전과 경험은 중국이 경제특구를 설립한 정책이 올바른 것이었음을 입증했다(善戰的發展和經驗證明中國建立經濟特區的政策是正確的)”라는 휘호를 남겼다.

덩은 특구를 건립한 정책목표는 단순히 이곳을 통해 “수입하고 수출하자는 것이 아니고 이곳을 (개혁과 개방의) 창구로 하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특구는 창구이다, 기술의 창구이며, 관리의 창구이고 지식의 창구이며, 지식의 창구임과 동시에 대외개방 정책의 창구이다. 특구는 기술을 도입하고 지식을 획득하며 관리방법을 학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특구가 성장하며 경제가 발전하여 소득이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한 지역이라도 먼저 부를 이룩하도록 해야 하며 평균주의가 실시돼서는 안된다(讓一部分地區先富起來 平均主義不行)”고 말하기도 했다.

92년 대남순에서 강조된‘선부론(先富論)’의 맹아를 여기서 엿볼 수 있다.

2월 7일부터 10일까지 샤먼 경제특구를 방문한 덩샤오핑은 역시 휘호를 남겼다. “경제특구가 추진하는 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把經濟特區辦得更快些更好些)”였다.

덩샤오핑의 시찰이 있은 뒤인 1984년 3월 26일부터 4월 6일까지 중국공산당 중앙서기처와 국무원은 14개 연해도시 항구 도시 좌담회를 개최하고 이들 도시의 진일보한 개방을 건의하였다.

여기에 포함된 도시는 다롄(大連), 친황다오(秦皇島), 톈진(天津), 옌타이(烟臺), 칭다오(靑島), 상하이(上海) 등이다.

덩샤오핑의 이 시찰에는 양상쿤(楊尙昆)과 왕전(王震)이 수행했다.

두 사람의 수행은 덩의 시찰이 노선 투쟁이자 권력 투쟁의 속성을 갖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1989년 천안문 사태 당시 두 사람은 각각 국가주석과 부주석으로 있으면서 시위 진압 여부를 놓고 벌어진 당내 투쟁에서 자오쯔양 일파를 제압했다.

또한 1992년 남순강화 때도 국가주석 양상쿤이 당 중앙 군사위부주석으로서 인민해방군 지휘관들을 이끌고 덩샤오핑을 강력하게 지지, 좌고우면하던 장쩌민 총서기 겸 당 중앙 군사위 주석과 리펑 총리의 '투항''을 이끌어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한편 2006년 1월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선전과 주하이를 찾았다.

중국은 북한이 특구 모델을 따르기를 바랬고 김정일 생전에는 이를 미온적이기는 했으나 받아들일 자세를 취했다.

개성 공단이 북한판 특구 지정이라면 김정일이 선전과 주하이를 방문하고 돌아오고서 중국과 황금평 개발에 합의 한 것은 특구의 확대 조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김정일의 후계자 김정은은 이를 꾸준히 추진해온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함으로써 '김정은의 북한'이 중국의 길을 따라가지 않을 것임을 중국과 국제사회에 선포한 셈이다.

2018/01/24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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