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5/25 23:12



[今天歷史-1월27일]岳飛와 莫須有罪...없으면 있게

삼국연의의 관운장 즉 관우와 함께 중국에서 무인을 대표하는충신으로 기리는 남송 장군 악비의 묘 앞에는 당시 재상 진회의 철제상이 꿇어 엎드린 자세로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정치적 필요에 따라 악비를 모살한 진회는 살아 생전 그 죄로 처벌은 커녕 부귀영화를 누렸다.

악비의 억울함과 생전에 사필귀정을 용케도 피한 진회에 대한 분노를 상기시키려는 조형물이다.

옥에 갇힌 악비의 죄를 추궁하러 간 관리에게 악비는 변명을 늘어 놓지 않고 등에 먹물로 새겨놓은 '진충보국(盡忠保國)' 네글자를 보였다고 한다.

권력자 진회에게 '막수유(莫須有)' 즉 '아마도 있겟지'는 정적을옭아 매는데 필요 조건일뿐이다. 대체로 털면 먼지라도 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간혹 막히는 경우가 있는데 악비의 경우가 그랬다. 하지만 막히면 뚫는다는 말처럼 이를 돌파하는 방법이 만들어진다.

계속 막히면 '없어도 있게 하라' 아니면 '발가락이 닮았다'로 밀어 붙인다.

결국 진회는 독살로 악비를 죽게 했다.

'아마도 있겠지'에서 출발, '아마도 있었을거야'로 아니 '있었다고 만들자'로 한 뒤 이를 굳혀라로 마무리 지었다.

시진핑의 반부패 캠페인에서 적지 않은 정적에 대해서도 '아마도 있겠지'에서 출발한 혐의가 짙다.

다만 아직까지는 악비처럼 '털어도 먼지가 나지 않는다'는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반부패 캠페인에서 조자룡의 헌칼 노릇을 한 왕치산, 시진핑 집권 1기의 기율검사위 서기 왕치산은 적어도 진회의 철제상 굴욕은 면할 듯하다.

털어보니 예외 없이 금덩이가 우수수하였기 때문이다.

진회가 '무릎 꿇은굴욕'을 영원토록 감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천재일우의 예외적 존재를 만났기 때문이다. 예외는 있기 마련이다. 중국에도 우리나라에도...<스위프트-버크왈드

宋慶齡 탄생,프랑스 중국과 수교, 미국 통일 베트남과 관계 정상화, 미국 북베트남과 파리평화협정 체결, 미국 몽골 승인

1142년 1월 27일 남송(南宋)의 명장 악비(岳飛)가 금(金)과 화의를 추구하던 진회(秦檜)에 의해 임안(臨安)-현재 항저우(杭州)- 풍파정(風波亭)에서 독살되었다. 향년 39세였다. 아들 악운(岳雲)과 부장 장헌(張憲)도 함께 화를 입었다.

악비는 문약(文弱)한 장수와 비능률적인 대군을 보유한 송(宋) 나라의 장수였음에도 군사 전략에 아주 능해 생애 동안 126번의 전투를 지휘했으나 송나라 군대는 한 번도 패하지 않아 그에게는‘상승장군(常勝將軍)’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이중에는 금나라 군의 최정예 철기병(鐵騎兵)인‘철부도(鐵浮圖)’와 ‘략자마(掠子馬)’군대와 벌인 전투도 포함되어 있다.

등에 '진충보국(盡忠報國)'이라는 글자를 먹으로 문신했을 정도로 충성심도 대단했다. 그러나 악비는 정략(政略)에는 문신 책략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금나라는 화의를 제의한 진회에게‘먼저 악비를 죽이고 그 다음에 화의를 논의하자’고 말하였다.

이를 받아들인 진회는 황제 고종을 부추겨 금나라가 장악하던 북송(北宋)의 수도였던 개봉(開封) 앞까지 진출한 악비의 군대를 철군하게 한 다음, 모반을 꾀했다고 무고하여 투옥시킨 뒤 모살하기에 이른 것이다.

영종(寧宗) 때 신원되어 악왕(鄂王)에 봉해졌으며‘충무(忠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후 악비는 악왕(岳王)으로 불리며 관왕(關王)으로 일컬어져온 삼국시대의 관우(關羽)와 함께 중국의 무인(武人)을 대표하는 존재로 추앙되어 왔다.

진회는 악비의 모반죄의 내용을 묻는 다른 신하의 질문에 대해‘막수유(莫須有: 아마도 있겠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후 중국에서는 정치적 목적에 따라 조작된 죄목을‘막수유죄’라고 부르게 되었다.

‘막수유’라는 표현은 2006년 1월 24일 중국 당국에 의해 정간된《빙점(氷點)》의 편집장 리다퉁(李大同)이 정간 조치에 항의하며 사용하기도 했다.

?點사태 ...중국판 ‘인식’과 ‘재인식’ 2006/03/02 16:37

악비는 정성공(鄭成功)과 함께 대만으로 쫓겨온 국민당 정권에 의해 민족 영웅으로 추앙되었다. 금문도의 해안 초소에는 악비의 슬로건인 ‘조국 강산을 돌려 달라(還我河山)’가 쓰여 있다.

하지만 대만 독립을 추구하는 민진당 천수이볜 정부는 집권하고 있던 기간(2000~2008) 대만을 근거지로 하였던 정성공을 부각시킨 반면 악비는 외면하였다.

악비는 공산당 집권 중국에서도 민족 영웅으로 추앙되었으나 중국이 최근 들어‘다민족 국가’라는 새로운 역사 이데올로기를 확립하면서 평가절하식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양안의 악비에 대한 재평가는 또 다른 형태로‘막수유죄’를 뒤집어 씌운 것이다.

岳飛-文天祥 중국 민족영웅서 제외 2002/12/09 22:08

1964년 = 중국과 프랑스가 대사를 교환하는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서방 국가 중 가장 먼저였다.

그러나 서방국 중 공산중국을 가장 먼저 승인한 국가는 영국이다. 영국은 1950년 1월 5일 장제스의 국민 정부 즉 중화민국과 관계를 끊고 공산중국 즉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햇다. 식민지 홍콩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한국전 발발로 공산중국과 군사적 대립 관계가 되면서 영국과 공산중국은 어정쩡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역사적 중국 방문 직후인 1972년 3월 13일 대사를 교환하기로 합의하고 영국은 대만 타이베이의 총영사관을 페쇄했다.

1892년= 쑹칭링(宋慶齡)이 상하이(上海)에서 태어났다.

다음해인 1893년 12월 26일 태어난 마오쩌둥(毛澤東)이 20세기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남자라면 쑹칭링은 20세기 중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이 되었다.

쑹칭링은 중화민국 건국의 아버지 쑨원(孫文)에게 혁명 자금을 댔던 저장(浙江) 재벌 쑹자수(宋嘉樹 본명 宋耀如)의 3남3녀 가운데 둘째딸이다.

중화민국 재정부장, 외교부장과 행정원장을지낸 쑹쯔원(宋子文)은 남동생이고 정재계의 거물로 활약한 쿵샹시(孔祥熙)의 부인인 쑹아이링(宋靄齡)은 언니이며 장제스(蔣介石)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은 동생이다.. 이들은 '쑹가 3자매'로 유명하다.

'쑹가 3자매'를 두고 1930년대 중국에선 '한 명은 권력을 사랑했고 다른 한명 부를 사랑했으며 또 한명은 조국을 사랑했다'는 말이 오르내렸다.

'부를 사랑했다'라는 말을 들은 이는 국민정부에서 재정부장까지 지낸 쿵샹시에게 시집간 첫째딸 쑹아리링. '권력을 사랑했다'는 말을 들은 사람이 장제스의 부인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막내딸 쑹메이링이다.

쑹칭링은 '조국을 사랑했다'라는 말을 들었다.

23살 때인 1915년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손문과 결혼하였으며 1925년 5월 손문이 사망한 이후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이며 국민당 우파 지도자 장제스가 1927년 4월 상하이 반공 쿠데타를 일으켜 1차 국공합작을 붕괴시키자 대립하였다.

장제스가 자신의 손아래 여동생 쑹메이링과 결혼, 처형과 제부 관계가 된 뒤에도 대립 관계는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악화하였다.

1949년 공산정권 수립 후 중국에 남아 공산당의 어용 정당인 대륙 잔류 국민당의 지도자로 있으면서 국가부주석 등을 역임하였다. 1981년 5월 사망했다.

쑹칭링은 '권력을 사랑한 쑹메이링'에 비견, '조국을 사랑한 쑹칭링(宋慶齡)’으로 불리며 존경을 받아 왔다.

제부인 장제스와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 공산당을 지지한 것도 대의멸친(大義滅親)의 행동으로 추앙받았다.

하지만‘대륙의 딸'을 쓴 중국에서 영국으로 망명한 여성 작가 장룽(張戎)은 그의 남편 존 핼리데이와 함께 2005년 펴낸‘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마오’에서 그녀가 코민테른의 비밀요원이었다고 주장, ‘조국을 사랑한 쑹칭링’이란 신화에 타격을 가했다.

미국 제45대 대통령으로 2017년 1월 20일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가 추천한 도서 10권 중 다섯 권이 중국 관련 도서인데 그중 하나가 장룽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마오'이다.

1987년= 미국이 몽골 인민공화국을 국가승인하고 이와 동시에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세계사 속의 오늘

미국과 베트남이 상대국 수도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기로 합의, 관계정상화를 이룩했다(1995) 베트남전 종전 20년만의 일이다.

22년 전인 1973년 바로 이날 미국과 당시 북베트남(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월맹으로 불렸다)이 파리평화협정을 체결했다.

남베트남( 월남으로 불렸다)과 남베트남 지역에서 게릴라 활동을 전개한 베트콩도 평화협정 체결 당사자였으나 미국과 북베트남이 핵심이었다.

모든 참가국은 "베트남에 대해 제네바 협정 (1954년)에 의해서 승인된 베트남의 독립, 주권, 통일성, 영토를 존중한다"를 인정하였다.

이는 17도선으로 분단된 북베트남의 월맹과 남베트남의 월남을 상호 그리고 국제적으로 인정하기로 한다는 의미다.

조약 조인 후 미국은 1969년에 개시한 미군의 철수를 계속하였고 1973년1월 29일,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의 종전을 선언하였다.

미군은 1973년 3월 29일에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이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와 북베트남 정치국원 레 둑 토가 선정되었다.

키신저는 수상했으나 레 둑 토는 '( 진정한 )평화가 오지 않았다'며 수상을 거부했다. 이는 협정을 준수할 뜻이 없다는 시사였다.

이로부터 불과 2년 3개월 뒤인 1975년 남베트남 정권은 애초부터 파리평화협정을 지킬 의사가 없었던 북베트남 정규군의 춘계 대공세에 일패도지하면서 붕괴되고 이해 4월 30일 남베트남 대통령이 월맹군의 포로가 되어 항복함으로써 베트남은 적화통일이 이루어졌다.

3시간 체류에 一週초청 대응 2005/11/23 12:31


2018/01/27 01:17


경제| IT | 사회 | 정치 | 양안 | 문화 | 대만 | 홍콩 | 한중Biz | 한반도 | 인물동정

 
Copyright 2000 ChinaWatch.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