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11/15 17:18



[今天歷史-1월28일]판첸라마 사망...‘宗弱’에서 ‘宗恐’으로

1차 상하이 사변

티베트 역사를 당(唐)나라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현재까지 내려오면서 살펴보면 '종약(宗弱')이라는 말이 자연스레 나온다.

송(宋) 나라는 문약(文弱)한 국가였다. 중국 대륙의 북방을 기마유목 소수민족 여진족에게 내어주고 남쪽으로 쫓겨간 남송(南宋)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로 평가된다.

그러나 지나친 문치로 방대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국방력이 미약했다. 결국 여진족의 (金)나라보다 더 강한 군사력의 몽골군에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우리나라 조선은 '군약신강(君弱臣强)'으로 평가됐다. 왕의 힘이 약했고 신하의 권력은 왕권을 압도했다는 이야기다.

조선 중기 이민족 군대가 남과 북에서 잇달아 수도를 포함한 국토를 유린했고 반성없이 용케 버티다가 서세동점의 세계사 대전환 시기에 종국에는 일본에 의해 나라가 멸망하고야 말았다.

'티베트에서 7년간'이란 영화에서 마오쩌둥이 베이징에서 젊은 시절의 달라이 라마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마오는 티베트에 대해 "과거 우리나라(당나라)의 수도를 포위할 정도로 강력한 때가 있었죠"라고 어린 티베트의 최고지도자에게 말한다.

티베트가 토번으로 불리던 시절은 중국이 두려워 할 정도로 군사력이 강한 국가였다.

그런 토번이 불교를 받아들여 그 계율을 철저화하는 라마교가 세속사와 문화 그리고 정치마저 지배하게 되면서 군사력이 급속도로 약화하였다. '종약'한 티베트가 된 것이다.

티베트족 주변의 유목민족 몽골족, 여진족, 거란족, 그리고 돌궐족으로 부르는 투르크족에서 분파한 위구르족 등은 중국을 지배하거나 약화하였을 때도 위협적 존재로 중국을 심각하게 괴롭혔으나 티베트족은 라마교화한 뒤부터는 중국을 더는 위협하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유교의 주자학을 받아들여 이를 철저화하면서 문약한 국가가 된 것을 연상하게 한다.

'종약'한 티베트는 중국이 공산화하면서 가혹한 종교탄압 정책에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시달려야 했다.

티베트 라마교 1대 종파의 수장으로 최고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는공산중국 수립 10년 째인 1959년 죽느냐 사느냐의 봉기를 감행했다. 인내심의 '낙타 허리'가 부러지고 만 셈이다.

이는 로마시대 예루살렘 지역에서 축출된 뒤 전세계를 유랑하면서 '돈'을 중시했으나 '창과 칼'은 외면했던 유대인이 나치독일의 유대인 말살정책에 직면하면서 바르샤바 게토 봉기를 시발로 총을 잡기 시작한 것을 연상하게 한다.

둘 다 역사적으로 의미 심장한 터닝 포인트였다.

티베트 라마불교의 2대 종파 수장 판첸 라마는 달라이 라마와는달리 실리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그는 1959년 봉기 이후에도 티베트를 떠나지 않고 중국 중앙정부 정책에 순응하며 부족한 가운데서도 티베트의 종교적 문화적 정체성을 보존,유지하려 하였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은 판첸 라마가 달라이 라마를 따르는 또 하나의 터닝 포인트를 만들고야 말았다.

봉기 30 주년인 1989년을 앞둔 시점 판첸 라마의 티베트 귀환과 갑자스런 사망은 티베트가 '종약'의 시대에서 '종공(宗恐)'의 시대로 전환하는 분기점이 되었다.

티베트족은 이웃 신장 위구르의 이슬람교 신앙 위구르족처럼 유혈불사 시위와 폭동 그리고 더 나아가 테러 행위와는 여전히 담을 쌓거나 분명하게 거리를 두고 잇다.

그러나 티베트족도 비폭력 경게를 넘어 강력한 시위를 펼치고 있다. 또한 자신의 몸을 불태우는 분신 저항을 끈질기게 벌이며 세계의 관심을 지속하게 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발생한 기독교가 로마를 '정신적으로 정복'하고 결국 칼로 흥한 로마를 무너뜨리게 한 것처럼 티베트는 공산주의로 통일 상태를 유지하는 중국을 분열시키고 공산주의 이념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

공산중국으로서는 신장 위구르의 잔혹한 테러 활동보다 티베트의 종교적 신념을 더 두려워 한다. 더 나아가 미국의 군사력과 자유 민주주의보다 더 가공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이야기다. '초원을 불태울 불티'로 두려워 한다. <스위프트-버크왈드

1989년 1월 28일= 티베트 불교의 2인자 판첸 라마 10세가 사망했다. 1938년 2월3일생으로 향년 51세였다.

판첸 라마는 티베트에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화신으로 믿어져 오고 있으며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전생활불(轉生活佛)로 여겨지는 달라이 라마에 버금가는 추앙을 받아왔다.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불교의 법왕이라면 판첸 라마는 부법왕에 해당된다.

판첸 라마는 티베트 라마 불교 제2대 종파 수장의 명칭으로‘지용을 겸비한 대학자’라는 뜻이다.

판첸 라마는 역대로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으며 이 때문에 달라이 라마의 티베트 중앙정부와 반목하기도 했다.

판첸 라마 10세는 3세 때 제9대 판첸 라마의 환생으로 선정되었으며 1949년 6월 3일 당시 국민정부에 의해 10대 판첸 라마로 인정되었다.

판첸 라마 10세는 1959년 3월 10일 티베트 무장 독립 봉기 이후 달라이 라마 14세가 인도로 망명한 뒤에도 중국에 남아 중국 정부에 비교적 협조하는 태도를 취했다.

1959년 4월 전인대 상무위 부위원장에 선출되어 베이징(北京)에 사실상 억류되었던 그는 중국의 티베트 문화 파괴활동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는 7만자 상서를 제출, 마오쩌둥(毛澤東)의 심기를 거슬렸다.

결국 문화대혁명 기간 9년 동안 연금되었던 그는 1979년 정협 부주석으로 복권되었으며 1980년에는 다시 전인대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89년 1월 판첸 라마는 티베트에 돌아오게 되는데 이는 독립 봉기 30주년을 앞두고 티베트족을 무마시키려는 중앙정부의 계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판첸 라마는 중앙 정부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과거 공산당의 잘못을 용서하자고 말하면서도 공산당이 아닌 달라이 라마를 찬양하고 신앙과 문화를 보호하고 유지할 것을 역설했다.

판첸 라마 10세는 티베트 중남부 도시인 시가체에서 판첸 라마 5세와 9세까지 제사를 주재하던 중이던 1월 28일 심장발작을 일으켰다. 죽음을 예감한 판첸 라마 10세는 목욕을 한 뒤 옷을 갈아입고 결가부좌를 하고 입적했다.

판첸 라마의 돌연한 사망은 티베트의 긴장을 고조시켰으며 이 해 3월 5일 독립봉기 30주년을 맞아 대규모 시위 사태를 불러일으켰다.

[今天歷史-3월5일] 89년 티베트인 독립항쟁 발발

티베트의 중국 당국은 이들 시위대를 유혈 진압하였으며 이틀 뒤인 3월7일 티베트족은 저항을 포기했다.

당시 티베트 서기가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되는 후진타오(胡錦濤)였다.

판첸 라마의 갑작스런 죽음과 티베트족의 봉기, 그리고 유혈진압으로 이어진 이 패턴은 이해 4월 15일의 후야오방(胡耀邦)의 돌연한 죽음과 민주화 시위, 그리고 6·4 유혈진압으로 확대 반복되었다.

[今天歷史-11월 29일] 중국 판첸라마 11세 선임

1932년 1월 28일 야음을 틈타 일본 해군 육전대(해병대)가 상하이(上海)에 주둔하던 민정부의 국민혁명군 제19로군을 공격함으로써 1차 상하이 사변이 일어났다.

중국인들은 이를 ‘1·28 상하이 사변’으로 부르며 일반적으로는 '1차 상하이 사변'으로 불린다. 중일전쟁으로 확대된 1937년 8월 9일의 상하이 사변과 구별하기 위해서다.

[今天歷史-8월9일] 소련군 만주 일본군 공격, 2차 상하이 사변 발생

당시 공격을 지휘한 일본 해군 육전대 사령관 시오자와는 “작전 개시 후 4시간이면 상황은 종료된다”고 호언했으나 차이팅제(蔡廷?)와 장광나이가 이끄는 19로군은 만만한 적수가 아니었다.

공격하던 일본군은 장갑차 3량을 탈취당했는가 하면 1개 연대가 반격한 중국군에 의해 포위되어 전멸당하기까지 하였다.

결국 공격 개시 1주일 만에 시오자와는 사령관에서 해임되고 일본은 3개 사단의 육군을 추가 파병하였다.

19로군은 2월 20일 일본군 9사단장(植田謙吉)이 지휘하는 총공세도 격퇴했으나 결국 3월 중순에는 일본군의 거센 공격에 밀려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로군의 영웅적 투쟁으로 중국 전역에서 항일 의지가 고취되었으며 쑹칭링(宋慶齡) 등이 상하이 시민을 대표하여 전선을 위문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상하이 공격은 괴뢰국인 만주국 건국 공작에 쏠린 내외의 관심을 분산시킬 목적으로 일부러 도발한 것이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청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溥儀)를 끌어들여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려는 공작을 진행시키고 있던 상황이었다.

상하이에서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던 3월 1일에 만주국 건국선언이 발표됐고, 3월 9일에는 푸의가 만주국 행정수반인 집정(執政)에 취임했다.

1차 상하이 사변은 결국 5월 5일 정전협정으로 마무리 되었다. 공산군 토벌을 위해 일본과 전면적 대결을 회피하고자 했던 장제스(蔣介石)가 상하이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중재를 받아들여 정전협정이 성립된 것이다.

정전협정은 19로군과 전체 중국 인민에게는 굴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광둥(廣東) 출신 장교가 주축인 19로군은 이후 푸젠(福建) 인민혁명정부에 참가하는 등 반장(反蔣) 활동을 전개하다 장제스의 직계부대에 의해 괴멸되었다.

1934년 1월 7로군으로 개편되었고 주둔지도 근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허난(河南)성으로 옮겨져 사실상 해체되었다.

원래 정전협정은 4월 29일 체결될 예정이었으나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虹口 : 홍구) 공원의거로 늦춰졌다.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군은 4월 29일 일본 천황(일왕)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맞아 홍커우 공원에서 대대적인 전승 기념행사를 하던 중 윤봉길 의사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일본군 사령관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와 거류민 단장 가와바타 사다지(河端貞次)가 즉사했고 해군 중장 노무라 기티사부로(野村吉三郞)는 한쪽 눈을 실명했으며 주중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는 한쪽 다리를 잃었다.

시게미쓰는 훗날 외무장관으로 미국의 미주리호 함상에서 태평양 전쟁 항복문서에 조인한다.

윤봉길의 의사의 의거로 만보산(萬寶山) 사건으로 한때 악화되었던 중국 거류 한국인과 중국인 간 감정이 호전되었다. 아울러 한국의 임시정부는 이후 중국 정부의 지원을 꾸준히 받게 된다.

장제스는“중국의 100만 대군이 못하는 일을 한 의사가 능히 하니 장하다”고 격찬하였다.

[今天歷史-7월2일] 萬寶山 사건 발생


2018/01/28 15:08


경제| IT | 사회 | 정치 | 양안 | 문화 | 대만 | 홍콩 | 한중Biz | 한반도 | 인물동정

 
Copyright 2000 ChinaWatch.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