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2/18 10:10



[今天歷史-1월29일]4개 현대화... ‘붉은 중국’ 雖舊邦 其命維新

공산중국은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도 존속할 뿐만 아니라 날로 부강해지고 있다.

공산중국은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소련이 지향하려던 목표와 여러 점에서 닮았다.

고르비는 연방체제를 유지하고자 필사적 노력을 기울였다. 공산 중국은 56개 민족을 끌어안고 가려하고 있다. 신장 위구르와 티베트는 중국의 발트 3국이다.

연방체제 유지와 강력한 중앙집권 유지라는 공통점에도 블구하고 두 공산주의 대국의 해체와 지속 부강 발전이라는 하늘과 땅 차이의 분기점은 저우언라이가 이론적 기초를 마련한 '4개 현대화 노선'이다.

덩샤오핑이 4개 현대화 노선을 발전 심화해 게급 투쟁을 배척하고 '큰 한솥밥 나눠 먹기'를 '먼저 부자되기'로 대체하는 시장 경제화를 추구하면서 마오이즘의 뇌수와 척추를 들어냈다.

고르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4개 현대화 노선의 뒤쫓기였고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모방이었다

그러나 1991년 8월 소련 보수파 쿠데타 실패 후 고르비가 "나는 사회주의자다"라고 실토한데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고르비가 추구한 페레스트로이카는 '전족을 풀지 않은 채의 행보'였다.

개혁개방이라는 양개 기본점의 꼭지점, 즉 1개 중심 경제 발전은 고르비의 페레스트로이카 소련에서는 구현되지 않았다.

또한 고르비는 투명화라는 글라스노스트에 치중했는데 이점에서는 덩샤오핑은 정반대였다.

붉은 중국은 소련처럼 낡고 퇴락한 이념의 공산주의 국가이나 근본적인 개혁으로 새롭게 되살아 날 수 있었다.

시경에 나오는 '주수구방 기명유신(周雖舊邦 其命維新) 즉 '주나라는 비록 오래되었지만 개혁으로써 천명을 새롭게 했다라는 말을 빗대어본 표현이다.

저우언라이-덩샤오핑 노선을 충실하게 뒤쫓는 공산국가 베트남도 중국처럼 존속할뿐만 아니라 부강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 길을 쫓지 않는 북한은 '핵 카드'로 연명은 하고 있으나 날로 궁핍해지고 있어 가사 상태 목전에 있다.

핵 도박 기사회생 잭팟 터지기를 고대하며 묘수패 돌리기에 골몰하고 있다.

중국호는 덩샤오핑 사후 장쩌민과 후진타오 등 후발 조타수들은 덩이 설정한, '실력을 감춘 채 더욱 키워라'라는 도광양회(韜光養晦)의 레드라인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덩샤오핑은 4개 현대화 노선의 다음 단계로 민주화라는 제5의 현대화 노선이 나오자 이를 결연하게 배척했다.

덩샤오핑은 1979년 웨이징성이 주도한 베이징의 봄을 그 싹에서부터 짖뭉갰고 1989년 천안문 시위도 무자비하게 탄압 압살했다.

4개 현대화 노선을 승화 발전시킨 공산중국의 새로운 비전이 없는 상태가 지속하면서 그 모순점이 축적되자 나온 것이 보시라이의 '붉은 꿈'이었고 시진핑이 이를 차용, 발전시키고 있다.

그러나 시진핑은 좀더 일찍 아니면 아주 빨리 덩이 설정한 선을 넘어서려는 것처럼 보인다.

힘을 충분히 기르고 그 기반을 다지지 않은 가운데 꾸는 '꿈'은 몽유병자의 꿈이 될 수도 있다. <스위프트-버크왈드

鄧 방미서 대만에 대해서도 홍콩과 같은 일국양제 적용 비전 제시

1963년 1월 29일 중국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상하이(上海) 과학기슬공작회의에 참석, 연설을 통해 중국의 4개 현대화를 처음으로 제시했다.

저우언라이는 중국이 사회주의 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농업현대화 ▲공업현대화 ▲국방 현대화 ▲과학기술 현대화라는 4가지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 4 가지 목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 현대화라고 강조했다.

저우언라이는 1년 11개월 뒤인 1964년 12월 21일 개막한 제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1차 회의(그 다음해 1965년 1월 4일까지 계속)에서 중공중앙(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을 대표하여 이를 제기하고 전인대가 채택함으로써 이를 당정의 노선으로 확립시켰다.

[今天歷史-12월21일] 저우언라이 4개 현대화 목표 제시

저우언라이의 4개 현대화 목표는 마오쩌둥(毛澤東)의 대약진 운동(大躍進運動)이 중국의 경제에 초래한 재앙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제안된 것이었다.

대약진운동은 마오의 주도로 1958년부터 1960년 초까지 노동력 집중을 통해 철강산업 등을 발전시켜 경제성장을 이룩하자는 대중 경제 부흥 운동을 말한다.

대약진 운동은 인민공사 설치와 함께 수레의 두 바퀴처럼 함께 추구됐으며 마오의 낭만적인 혁명주의가 표현된 정책이었다.

'대약진'이라는 용어는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1957년 11월 13일자 사론에서 '전민을 발동하여 40조 강요를 토론하고 농업생산의 새로운 고조를 일으키자'고 주장하고 내부적으로 ' 7년 안에 영국을, 8년 혹은 10년 안에 미국을 따라 잡는다'는 슬로건을 내세운데서 비롯됐다.

이에 따라 공업생산의 지표를 높였는데 그 결과 급격한 공업노동력 수요로 농촌에서 과도한 인력을 강제로 차출하였고, 이로 인하여 도시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생활필수품의 공급부족이 일어났으며 노동력을 잃은 농촌의 농업생산력은 급격히 저하되어 농업경제의 파탄을 가져왔다.

잘못된 정책의 과도한 추구라는 구조적 모순에서 발생한 농업생산량의 부족에 설상가상으로 연이은 자연재해와 옛소련의 관계악화로 인한 경제원조 중단등의 외부적 모순이 겹치면서 수천만 명이 굶어죽는 일이 발생했다.

이러한 악재 속에서 기술 개발을 병행하지 않고 노동력 집중만으로 과다하게 성장시킨 중화학공업은 처음 설정한 경제지표에 턱 없이 못 미치는 성장결과를 보이면서 대약진 운동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그 결과 마오는 국가주석 자리에서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대약진 운동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저우언라이와 류샤오치(劉少奇)가 주도한 이 실용주의 노선은 1966년 마오와 그의 추종에 의해 시작한 문화대혁명에 의해 1차 좌절되었다. 홍(紅)과 전(專)의 대립에서 홍이 승리한 것이다.

문혁 말기 저우언라이는 문화대혁명의 최대 무력적 기반이었던 린뱌오 세력의 쿠데타 미수 사건 후 군부를 정돈하기 위한 마오의 정치 권력적 판단에 따라 등용한 덩샤오핑(鄧小平)을 중용하여 4개 현대화 노선을 재점화하려 하였으나 1976년 1월 8일 저우가 병사하고 잇달아 덩샤오핑이 실각하면서 2번째의 좌절을 맞았다.

하지만 마오가 사망(1976년 9월9일)한 후 다시 복권된 덩샤오핑이 1978년 12월 11기3중전회에서 집권하면서 4개 현대화노선은 불꽃을 다시 지피게 되었다. 1978년 이래 중국 지도부의 노선은 곡절은 있었으나‘주전종홍(主專從紅)’의 기조를 견지하였다.

결국 1963년 저우언라이가 처음 제시하고 덩샤오핑에 의해 강력하게 추진되었으며 장쩌민(江澤民)과 후진타오(胡錦濤)가 발전적으로 승계한 4개 현대화 노선은 중국이 미국과 어깨를 겨루는 G2 국가로 성장하는 길잡이 구실을 하였다.

2012년 11월 후진타오의 뒤를 이어 중국 제5세대 최고 지도자가 된 시진핑(習近平)도 이런 노선 기조의 연장선상 위에 놓여 있다.

후진타오는 덩샤오핑과 장쩌민 집권 시절 박제화하였던 마오의 평등 사상을 되살리려 부단히 노력하는 한편으로 과학발전관을 강조 했다.

후자는 저우가 1963년 4개 현대화 중 과학의 현대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한 것과 맥을 통하고 있다. 따라서 후진타오에 이르러 과거 대립하던 홍과 전의 노선 화해(和諧 : 허셰), 즉 조화 시도가 모색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허셰’사회 ‘허셰’를 먹다<和諧社會吃河蟹>

후진타오에서 시진핑에게 권력승계 직전 벌어진 보시라이(薄熙來) 사태는 홍과 전의 또 한 번 충돌이었으나 역시 이번에도 전의 승리였다.

시진핑의 슬로건은 '중국의 꿈(中國夢)'인데 이는 '홍'과 '전' 허셰의 바탕 위에 중국의 도약을 지향한다는 의미로 보시라이 사태에도 일단 후진타오가 추구한 홍과 전의 변증법에서 합(合)을 지향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2017년 19대에서 시진핑의 권력이 마오쩌둥에 버금갈 정도로 강력해져 1인 집중화 경향을 보임으로써 덩의 노선을 벗어나려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을 부르고 있다.

1979년 = 덩샤오핑(鄧小平) 국무원 부총리가 29일부터 미국 방문을 시작했다.

그는 30일 워싱턴에서 “어떤 방식으로 대만문제를 해결할지는 중국의 내정문제”라고 강조하고“‘대만을 해방한다’는 표현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겠으며 대만이 조국에 회귀하게 되면 대만의 현실과 현행제도를 존중하겠다”고 밝혔다.

대만에 앞서 홍콩에서 구현되는 '일국양제(一國兩制)'란 개념이 첫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덩샤오핑은 자신의 이러한 구상을 1981년 8월 26일 정리된 형태로 공개적으로 표명하였는데 처음 시사 한 때와 마찬가지로 대만에 초점이 맞추어 졌다.

[今天歷史-8월26일] 일국양제, 경제특구, 陳毅

2018/01/29 14:14


경제| IT | 사회 | 정치 | 양안 | 문화 | 대만 | 홍콩 | 한중Biz | 한반도 | 인물동정

 
Copyright 2000 ChinaWatch.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