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11/19 03:46



[今天歷史-1월31일] 중공군 베이징 입성...내부의 적

1949년 1월 31일 중국 공산군이 베이핑(北平; 현재 베이징)에 입성했다. 당시 중화민국 수도는 난징(南京)이었다.

1928년 12월 북벌 완료로 1916년 위안스카이 사망 이후 분열 혼란의 군벌 시대를 종식시킨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수도를 1929년 7월 6일 난징으로 정하면서 베이징의 이름도 수도를 뜻하는 '경(京: 중국어 발음 '징')을 '평(平: 중국어 발음 '핑')으로 대체한 베이핑으로 바꾸었다.

수도 함락은 아니었으나 1271년 원(元)대부터 명나라, 청나라 그리고 중화민국이 세워진 뒤 17년 동안 통일 국가의 수도로 있었기에 그 심리적 타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946년 시작한 국공내전은 바로 베이징 함락으로 공산군의 승리로 대세가 결판이 났다.

이로부터 꼭 6년 전 같은 날 소련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과의 전투를 지휘한 나치 독일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가 백기를 앞세운 전령을소련군 사령부로 보내 항복 의사를 전달했다.

하루 전 나치 독일 총통 히틀러로부터 대장에서 원수로 승진한 파울루스는 "상병(1차대전 때 히틀러의 최종 계급으로 히틀러를경멸적으로 지칭한 말)을 위해 죽을 수는 없지"란 말을 던지고 항복을 결심했다. 정식 항복은 이틀 뒤인 2월 2일에 이루어졌다.

히틀러가 파울루스에게 원수 계급을 수여한 것은 명예롭게 자살하라는 무언의 지시였다.

파울루스는 자신이 지휘하는 독일군 정예 제6군 20만여명이 스탈린그라드 도심 깊숙이 들어간 뒤 더 이상 진전하지 못하고 묶인 상태에서 후방으로 침투한 소련군에 의해 포위되자 느슨한 포위 고리를 뚫고 일단 후방으로 퇴각하려 하였으나 히틀러의 거부로 이를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독일군은 맹추위와 탄약과 음식품 등 보급의 극심한 부족 속에서도 놀랄만한 투지로 버티며 처절하게 싸웠다. 결과는 참혹한 대재앙이었다.

독일군은 항복 당시 9만여명이 남았고 항복 뒤에 추위와 영양 부족에 따른 질병 등으로 독일로 귀환한 수는 불과 600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파울루스는 재앙을 안긴 최대의 적은 소련군이 아니라 히틀러라고 보았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내부의적이 히틀러였다면 베이징 함락의 최대 내부의 적은 국민정부 베이핑 방어사령관 푸쭤이였다.

최고 지도자 장제스가 수립한 작전 계획은 적절했으나 마오쩌둥의 전략이 그 허점을 간파했고 장제스의 장군들이 장제스의 작전을 이행하는데 실패했다.

장제스는 '병가지 상사'의 작전 실패를 했으나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히틀러처럼 재앙을 초래한 치명적 오판을 하지는 않았다.

푸쭤이는 자신의 지역적 근거지인 서북지구로 퇴로가 막히자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않고 항복하고 만 것이다.

군벌 출신 푸쭤이는 근거지에서 격리된 군벌 군대가 힘없이 무력화하거나 소멸하는 예를 군벌 시기 때에 수 없이 보아왔기에 병력을 온전히 보존한 채 투항함으로써 훗날을 기약하려 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산군은 항복 직후 푸쭤이군의 해체 작업에들어가 소멸시켰다. 게도 구럭도 다 잃고 오히려 공산군에게 50만여명의 손상 받지 않은 신병을 보강시켜준 것이다.

최고의 사기 진작과 막대한 규모의 병력 공급 등 적에게 이중의 지원을 안긴 내부의 치명적 최대 적은 푸쭤이 사령관 자신이었던 셈이다. 스위프트-버크왈드

베이징-모스크바 직통 여객열차 노선 개통, 스탈린그라드 전투 종료

1949년 1월 31일 랴오선 전투(遼瀋戰役), 화이하이 전투(淮海戰役)와 더불어 국공내전의 3대 전투 중 하나이며 또 3대 전투 중 가장 마지막에 시작된 핑진(平津 : 北京의 국민정부 당시 이름인 北平의 平과 天津의 津을 합한 것이다)전투(平津戰役)가 공산군의 승리로 끝나고 공산군이 베이징(北京)에 입성했다.

베이핑을 수비하던 국민당군은 공산군의 진주에 앞서 1월 22일 항복했다. 화이하이 전투 역시 이해 1월 10일 공산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今天歷史-1월22일] 베이징 항복, 湘南 폭동

국공 간 전세를 역전시킨 랴오선 전투와 옛 수도를 점령, 대세를 결정한 핑진 전투를 일선에서 지휘한 이는 동북 야전군( 1949년 1월 15일 제4야전사로 개칭) 사령원 린뱌오(林彪)였다.

한편 국부군에 가장 심대한 타격을 안긴 화이하이 전투는 중원 야전군(제2야전사로 개칭) 과 화둥 야전군(제3야전사로 개칭)의합동 작전으로 수행됐다.

중원 야전군 지휘부는 사령원 류보청(劉伯承), 부사령원 천이(陳毅), 정치위원 덩샤오핑(鄧小平)이었고 화동 야전군 지휘부는 사령원 대리 겸 정치위원 대리 쑤위(粟裕), 부정치위원 탄전린(譚震林)이었다.

덩샤오핑은 이들 양 야전군 지휘부로 구성된 총선전위원회의 서기로 있으면서 전선의 일체 사무를 관장했다.

랴오선 전투와 핑진 전투에서 린뱌오가 한 역할을 화이하이 전투에서 덩샤오핑이 상당 부분 맡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오가 훗날 린뱌오가 쿠데타 미수 후 소련으로 도주하다 추락사 한 뒤 덩샤오핑을 등용하여 군부 내 린뱌오의 인맥을 제거케 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3대 전역의 승리 주역이었던 린뱌오와 덩샤오핑은 해방군 내 대표적 파벌의 대표로 성장했다.


[今天歷史-1월10일] 淮海전투종료, 국공 첫 정협회의 개최


동북지방을 상실한 이후 국부군의 화북(華北) 토벌사령부(剿總)의 푸쭤이(傅作義) 군단은 장자커우(張家口), 베이핑(北平), 톈진(天津), 탕산(唐山)으로 이어진 전선에 5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배치하고 인민해방군의 동북야전군과 화북야전군과 대치하였다.

[今天歷史-12월5일] 平津전투 개시, 유엔군 평양 철수

푸쭤이는 해상 출구를 확보한 가운데 베이핑과 톈진을 지키면서 전국(戰局)의 변화를 기다린다는 자세였다.

마오쩌둥은 동북야전군으로 하여금 탕산, 탕구(塘沽), 그리고 톈진의 국민당군을 포위하도록 했다.국민당군의 전선을 둘로 가르고 해상 출구를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함께 타이위안(太原)을 공격하고 있던 쉬샹첸(徐向前)으로하여금 양청우(楊成武) 군단과 함께 푸쭤이 군단이 그들의 본거지 서북지방으로 탈출하지 못하도록 했다.

마오는 서북 변경지역 쑤이위안(綏遠 )을 지역 기반으로 한 군벌인 푸쭤이가 서북으로 탈출로가 막히면 그가 장제스에게 등을 돌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장제스의 세력 기반인 남방으로 탈출을 선택하기보다는 항복할 것이라고 판단 한 것이다.

<참고> 쑤이위안성(綏遠省)은 청조 멸망 이후 공산화 이전까지 러하성(熱河省), 차하얼성(察哈尔省), 닝샤성(寧夏省)과 함께 색북(塞北) 4성(四省) 중 하나였다.

현재는 네이멍구 자치구(內蒙古自治區)로 중·서부의 우란차부멍(烏蘭察布盟)·이커자오멍(伊克昭盟)·파옌나오얼(巴彦淖爾) 동부 지방에 해당한다.

남부의 징바오선(京包線:包頭∼北京) 주변은 한족(漢族)의 농경지대이고 나머지 부분은 몽골족의 유목지대이다.

1928년 국민당(國民黨) 정부가 이 지방의 몽골족을 통제하기 위하여 설치된 성(省)이었다. 그후 두 민족 사이에는 분쟁이 계속되었으며 공산화 이후 1954년 네이멍구 자치구에 편입되었다.

국부군의 군내 파벌은 공산군의 경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독립적 성향이 강했는데 대다수가 장제스의 북벌에 밀려 자의반 타의반으로 합류하거나 투항했기 때문이다.

국공내전 당시 국민정부 군부는 크게 장제스에게 충성하는 황푸(黃埔)파와 서북군벌이자 '크리스찬 군벌'로 유명한 펑위샹의 영향 하에 있는 바오딩(保定)파와 리쭝런 세력 하의 광시(廣西)파로 나뉘어졌다.

황푸파 외에는 장제스가 북벌 후 군사, 정치 독재권을 강화하는 와중에 정도 차이가 있었으나 이런저런 반장제스 운동을 벌이거나 동조하는 반장제스파의 이력을 갖고 있었다.

2차대전 종전 후 장제스와 불화하여 미국으로 나갔던 펑위샹은 국공내전이 벌어지자 공산당 지지를 선언했고 리쭝런은 평화협상을 주장하며 장제스와 엇박자를 내었다.

마오쩌둥은 장샤오량의 동북 군벌이 자신들의 근거지인 만주 회복에 관심이 없이 공산군 토벌에 몰아부친 장제스를 연금한 1936년 시안사변을 기억하고 있었다.

또한 푸쭤이의 딸이 공산당원이었고 그의 비서 역시 공산당원이었다. 이는 장샤오량과 함께 시안사변을 일으킨 양후청의 측근이 공산당원이던 사실과 비슷한 상황이다.

마오는 푸쭤이와 그의 군단 군사 전략은 물론 사령관 푸와 그 휘하 지휘관과 병사의 심리 동향마저 손바닥을 들여다 보듯 보고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살펴보면 마오가 푸쭤이 군단의 서북 지구로 퇴로를 차단한 조치는 군사전략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심리전 면에서 '신의 한수'였다.

마오는 퇴로 차단과 아울러 푸쭤이와 정전협상을 진행하는 화전 양면 전술을 사용하도록 했다.

이 전투에 동원된 인민해방군은 국민당군의 2배에 가까운 100만 명이었으며 작전의 최고 책임자는 린뱌오였다.

1948년 12월 5일 총공세 개시에 앞서 공산군은 비밀리에 산해관(山海關)으로 들어와 톈진(天津), 탕구(塘沽), 루타이(蘆台), 탕산(唐山)의 국민당군을 포위하였다.

공산군은 국부군을 베이핑, 톈진, 탕산, 신바오안(新保安), 탕구 등 5개 거점으로 분리, 포위하는데 성공하고 각개격파 전략으로 나갔다.

2년 뒤인 1950년 10월 공 산 중국이 한국전에 개입하면서 또다시 구사한 이 전략은 또다른 '신의 한수'였다.

12월 22일 신바오안이 함락되고 24일에는 장자커우가 떨어졌다.

해를 넘긴 1949년 1월 14일 톈진을 총공격하여 29시간 격전 끝에 13만의 국민당 수비군을 섬멸하고 수비군 총사령관 천장제(陳長捷)를 생포했다.

전투는 마오의 구상대로 진행되어 베이핑에 주둔하고 있던 25만 명의 국민당 군대는 고립되기에 이른다.

베이핑이 파괴되는 것을 막자는 명분을 내세우며 공산군은 푸쭤이와 협상을 진행했고 마침내 푸쭤이가 1월 22일 항복함으로써 해방군은 1월 31일 베이핑에 무혈입성하였다.

푸쭤이는 베이핑의 자신의 직계군이 근거지에서 멀리 떠나 남쪽으로 후퇴할 경우 해체될 것을 우려, 포위망 돌파를 시도하지 않고 항복을 선택한 것이다.

군벌 연합세력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던 국부군은 위기 상황을 맞게 되자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스스로 이처럼 무너진 것이다.

국민정부군 수뇌부에 침투한 고위급 공산당 프락치와 국민정부에 마지 못해 투항, 참여했던 군벌세력은 결정적인 순간 이처럼 '이적 행위'를 함으로써 내전 패배를 가속화하였다.

앞서 연이은 패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통 직에서 물러난 장제스를 대신해 대리 총통을 맡았던 리쭝런도 가망성 없는 화평 교섭에 매달림으로써 국민정부군의 와해를 한층 가속화하는데 일조를했다.

해상으로 철수에 성공한 탕구 수비대 5만 명을 제외한 항복한 국부군 52만 명은 해방군으로 재편되었다.

푸쭤이 직계군도 이와 함께 사라졌다. 남방의 호랑이를 피하려다 북쪽의 사자굴로 들어가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잡혀 먹힌 셈이다.

푸가 마오의 군대를 장제스군과 마찬가지로 공존이 가능한 단지 '붉은 군벌'로 착각한 시간은 얼마 지속되지 않았다.

이해 3월 15일 중공중앙은 쉬바이포(西柏坡)에서 베이핑으로 본부를 옮겼고 인민해방군 총사령부 역시 베이핑으로 본부를 이동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베이핑을 수도로 지명하면서 이름을 베이징으로 환원하였다.

공산군의 베이징 입성 후 국공 내전 주요 전투 일지는 다음과 같다.

1949. 4. 21. = 양쯔강 도하 전투(渡河戰役).
1949. 12. 27 = 국부군 대륙 내 최후 주요군 공산군에 섬멸. 이로써 대륙 내 국부군이 소멸됏다.

1950. 3. 28 = 중국 대륙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국부군 병력이 시캉(西康)성-현재 쓰촨(四川)성 서부와 시짱(西藏)자치구(티베트) 동부를 관할했다-시창(西昌)에서 철수.

1955. 1. 20 = 대만 철수 국민정부가 장악하던 저장(浙江)성 연안의 이장산다오(一江山島)가 중국 육해공군의 합동 공격으로 함락됨. 이 섬을 지키던 대만 군병 720명이 전사하였다.

한편 공산군이 베이징에 입성한 날로부터 꼭 6년 전인 1943년 1월 31일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되어 있던 나치 독일군이 소련군에 항복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한국동란 당시 장진호 전투와 함께 20세기 5대 동계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 사령관 파울루스는 포위된 직후 포위망을 뚫고 후방으로 퇴각해야 한다는 올바른 전략을 선택했으나 히틀러가 이를 반대하자 그대로 포위망 속에 주저 앉아 저항하다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고 항복한 것이다.

6년 뒤 베이핑의 선택과 결과는 같았으나 그 속내용은 정반대다.

1954년 = 베이징(北京)과 모스크바 간 직통 여객열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2018/01/31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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