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2/21 14:37



[今天歷史-2월2일]威海衛...이홍장의 회피전략의 재앙

"나의 뒤에는 아무도 없다."

미국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의 말이다. 최고사령관의 고독과 무한책임을 토로하고 있다.

청나라의 중국과 일본 간 청일전쟁(1894년~1895년 )에서 중국 측 최고사령관은 이홍장이었다.

허울뿐인 황제 광서제가 있었고 최고실권자는 서태후였으나 전쟁 결과의 무한 책임을 져야 할 '뒤에 아무도 없는' 최종 결정권자는 북양대신 이홍장이었다.

이홍장은 청일전쟁 승패의 분기점이 된 웨이하이웨이 포대 함락에 100% 책임을 져야 한다.

이홍장은 전쟁에서 지더라도 자신이 육성한 북양 함대를 보존하기 위해 일본과 접전을 회피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로 인해 후퇴하여 북양함대 기지인 웨이하이웨이 앞바다에 집결한 북양함대를 높은 곳에서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핵심 포인트를 사실상 적에게 바쳤다.

이홍장의 꼼수는 북양함대의 완전 괴멸로 이어졌다.

나치 독일의 최고사령관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후퇴 요구와 항복 요청을 모두 거부, 전투에서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전투 초기 30만명 이상에 달했던 나치 독일 정례군 6군단이 9만여명만 남고 투항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중 단지 6천여명만 전후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북양함대 괴멸은 결국 1912년 청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스탈린그라드에서 괴멸적 패배는 '천년 왕국'을 꿈꾸던 독일 제3제국이 불과 2년3개월 뒤 잿더미 멸망으로 귀결되는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개전 당시 중국 청나라의 북양함대는 일본 연합함대보다 철갑 전함 규모와 성능 등 하드웨어 면에서 크게 앞질렀다.

사기 면에서도 적어도 청나라 북양함대 지휘 장수와 수병들은 연합함대에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청나라 일부 군전략가는 북양함대가 일본 열도를 공격하여 한반도를 통해 중국으로 쳐들어 오는 일본군을 해상에서 차단하거나 뒤통수를 쳐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당시 북양함대의 전력은 이런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될 정도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홍장은 개전부터 패배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정치 권력의 무력적 기반인 북양함대를 어떻케든 보존하기 위해도망치기 전략을 구사했으나 도리어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잃었다.

히틀러가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상징하득 '나의 사전에 후퇴는 없다'는 무첵임한 아집을 자살할 때까지 한 순간도 버리지 않았던 이유는 나폴레옹 러시아 원정군의 모스크바 철수를 반면교사로 삼았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 동원한 프랑스군과 그 동맹군으로 구성한 대륙군은 모스크바 철수 과정에서 전투다운 전투도 하지 못한채 눈사태나듯 소멸됐다.

나치 독일군은 퇴각 과정에서 소멸된 나폴레옹군의 비극은 피했으나 더 참담한 철저한 패배를 당했다.

오늘날 중국은 19세기의 치욕은 다시는 없다는 다짐 아래 해양굴기를 추구하고 있다.

현재 항공모함 2척을 보유하였고 대양에서 훈련을 확대하는 등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발전에 일신우일신의 자세로 차근차근 매진하고 있다.

시진핑이 '시황제'로 불리는 것처럼 시진핑에게는 '뒤에 아무도 없는'처지가 더욱 강화되고 있다.

전쟁의 승패는 최종 결정권자 1인에 좌우된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 이홍장의 북양함대 궤멸 그리고 나치 독일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패배 등에서 보듯 '최종 일인'이모든 전력상, 전략적 우위를 물거품으로 만들어 왔음을 보여주었다

시진핑의 '시황제 지향'은 중국 굴기의중국 몽(夢)의 악몽을 키우고 있는지 모른다.

도태 생산설비 분야 발표,, 친지웨이 전 국방부장 사망, 스탈린그라드 독일군 소련군에 백기 투항/b>

1895년 2월 2일 = 청일전쟁(중국에서는 1894년 발발한 이 전쟁을 발발한 해 간지에 맞추어 갑오전쟁으로 부른다) 기간 중 일본군에 의해 산둥(山東)성 웨이하이웨이(威海衛)가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웨이하이웨이는 옌타이(烟台)와 청산(成山)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곳으로 전략적으로 뤼순(旅順)을 마주보며 뤼순과 함께 보하이(渤海)만의 입구를 통제하는 곳이다. 웨이하이웽이와 뤼순은 이홍장(李鴻章)이 심혈을 기울려 육성한 북양해군(北洋海軍)의 양대 기지였다.

웨이하이웨이는 북양해군의 기지 중 전함이 정박하는 곳이었고 뤼순은 선박 수리를 하는 곳이었다

이홍장은 북양해군의 제독인 정여창에게 육로를 통해 웨이하이웨이 배후로 침입한 일본군과 대적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지시, 일본군은 소수 병력이 지키는 웨이하이웨의 양안(兩岸) 포대를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이홍장은 전쟁이 패하더라도 자신의 무력기반인 북양함대를 보존하기 위해서였으나 북양해군은 일본군의 지상과 해상 연합 공격으로 불과 8일 뒤인 2월 10일 궤멸되고 말았으며 청일전쟁에서의 청나라의 패배를 확정지었다.

1999년 = 중국 국가경제무역위원회가 도태시킬 생산설비, 기술, 그리고 상품 목록을 발표했다.

이 목록에 포함된 항목은 석탄, 야금, 유색, 석유화공, 경공업, 방직, 기계, 건자재, 건축, 전력 등 10개 산업 114 항목이었다.

기준은 네 가지로 법률과 법규에 의해 금지된 생산기술 및 제품, 생산방식이 낙후되어 있어 생산품의 질이 저열한 것, 환경오염을 심각하게 야기하는 것, 그리고 원자재와 에너지 소모가 아주 높은 것 등이었다.

1997년 = 전 국방부장 친지웨이(秦基偉)가 베이징(北京)에서 사망했다. 항일전쟁 기간 덩샤오핑(鄧小平)이 정치위원으로 있던 8로군 129사에서 유격지대 사령원으로 활동한 그는 덩샤오핑의 핵심 군부 인맥으로 분류되었으며 정치적 격변기마다 그의 움직임이 주목거리였다.

국무위원과 중앙군사위원, 전인대 상무위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친지웨이가 사망한 17일 뒤인 2월 19일 그의 평생 보스 덩샤오핑이 세상을 떠낝다. 삼국지에서 유비에 앞서 관우와 장비가 세상을 떠난 것처럼 또 마오쩌둥이 사망하던 그해 마오에 앞서 저우언라이와 주더가 타계한 것을 연상시킨다.

세계사 속의 오늘

2차대전의 한 분수령이 된 소련 스탈린그라드(현재 볼고그라드) 전투가 독일군의 백기 투항 항복으로 완전히 막을 내렸다(1943).

독일군의 투항 의사는 이틀 전인 1월 31일에 소련군에 전달됐다.

1942년 7월 17일 독일군이 소련군의 돈강 방어선을 공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된 지 160일만의 일이었다.

양측에서 200만 명이 이상의 병력이 투입된 이 전투에서 독일군이 궤멸적 타격을 입는 바람에 이후 동부전선에서 독일은 수세적 입장이 되었다. 전투의 양상은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1942년 여름 히틀러는 독소전선에서 남부에 주력하여 군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카프카스의 곡창·유전지대에, 다른 하나는 스탈린그라드로 진격시켰다.

스탈린그라드는 볼가강 하류 공업도시로 전략적 요충지였을 뿐 아니라 소련 최고지도자 스탈린의 이름을 붙인 곳으로서 군사 심리적으로도 상징성이 컸다.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를 빼앗음으로써 소련에 중대한 군사적, 심리적 타격을 주려고 했다. 그런 만큼 소련군의 저항도 치열했다.

독일군은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은 뒤 8월 23일 돈강 방어선을 돌파한 뒤 스탈린그라드 시를 직접 공격하게 되었다.

독일군의 선봉대는 치열한 전투 끝에 9월 13일 스탈린그라드 시에 진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독일군은 소련군과 700여 차례의 전투에도 불구하고 스탈린그라드를 완전 장악하는데는 실패하였다.

11월 들어서면서 양군의 양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공세적이던 독일군이 막대한 피해로 공세가 둔화된 반면, 소련군은 병력과 장비 면에서 독일군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소련군 지휘부는 반격을 결정했고 11월 19일 새벽을 기해 스탈린그라드 시가지에 진입해 있던 독일군 주력을 포위하는 작전을 개시했다.

11월 22일 밤 소련군은 돈강 도하에 성공했고 다음날인 23일 카라치에서 각기 다른 방향에서 반격을 개시한 소련군이 조우함으로써 스탈린그라드 포위망을 완성시켰다.

이 결과 독일의 제6군 20여만명이 포위망에 갇혀 버리게 되었다.

소련군이 이처럼 독일군의 주력을 의외로 손쉽게 포위할 수 있었던 것은 스탈린그라드와 후방 독일군 간 보급로 방어를 담당한 것이 독일군이 아니라 루마니아군이었기 때문이었다.

독일 6군단장 프리드리히 폰 파울루스 대장은 제6군을 남서쪽으로 후퇴시키기를 요청했으나 히틀러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대신 모든 원조를 약속했다.

그러나 괴링이 주도한 공수보급(空輸補給)은 요구의 1/7에도 미치지 못했고 F.E. 만슈타인 원수의 포위돌파 작전도 실패했다.

소련군은 1943년 1월 10일 50문의 대포를 동원 포격을 가하며 독일군에 대한 대대적 공격을 개시했다. 소련군은 궤멸상태에 빠진 독일군에게 항복을 권고했으나 독일군은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탄약마저 소진되는 상황에 처하자 파울루스는 히틀러에게 항복허가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히틀러는 이를 거부하고, 1월 30일 그를 원수로 승진시키고 117명의 장교들에게 1계급 특진을 시키며 독려했다.

히틀러는 파울루스가 자결하기를 기대했지만 파울루스는 다음날 항복을 결심하고 이를 소련군에 전달한 뒤 2월 2일에 정식으로 소련군에 백기투항했다.

스탈린그라드시 진입할 당시 33만 명이던 독일 제6군은 항복당시 9만1000명으로 줄어 있었다. 이들 포로 중에는 24명의 장성과 2500명의 장교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포로가 된 이들도 대부분 전사한 동료들을 뒤따랐다. 전염병과 혹한, 그리고 영양실조때문이었다. 스탈린그라드시에 진입하였던 33만명의 독일군 병사 중 종전 후 독일로 귀환한 사람은 단지 6000명이었다.

1942년 7월부터 1943년 1월까지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통해 독일군의 전사상자의 수는 150만명이었는데 이는 독소전선에 투입된 독일군 총병력 중 4분의 1에 해당하는 수자이다.

히틀러의 퇴각거부 지시를 수용한 파울루스는 히틀러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퇴각을 감행한 아프리카 전선의 롬멜과 비교된다.

파울루스는 참담한 패배뿐만 아니라 자신의 수하 병력을 전멸시킨 반면 롬멜은 비록 패배는 피할 수 없었지만 수하 병력 대다수가 전후에 무사히 조국으로 돌아 올 수 있게 하였다.

2018/02/02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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