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2/21 14:37



[今天歷史-2월3일]낙타상자 라오서...무릎꿇고 살기보단

공산 중국에서 최고 권력자의 낭만적 이상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노회하며 맹목적인 권력 의지와 젊은이의 혁명적이며 무분별한 열정이 결합하여 문화대혁명이라는 '붉은 쓰나미'가 몰아 닥쳤을 때 지식인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불운하고 불행한 타깃은 '마녀 사냥'의 놀이감 역할을 감수했고 대다수는 열정없는 추임새 노릇을 하거나 침묵했다.

그러나 일부는 젊은이의 혁명적 열정에 의미를 부여하며 '곡문아새(曲學文世)'에 열정적으로 동참하기도 했다.

전자의 대표적 인물이 '해서파관'의 작가로 타깃 넘버원 강요를 당한 우한이다.

'메피스토펠레스'로부터 빌어온 '젊은 열정'으로 젊은이의 젊은 열정에 아부한 인물은 갑골문 연구에서 큰 업적을 남긴 궈모뤄였다.

궈모뤄의 처절한 자기 비판은 '늙다리'의 진정성 없는 반성을 열정을 증폭시키는 휘발유로 쓰는데 익숙했던 홍위병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낙타상자'의 작가 라오서는 '쓰나미 속의 역류'였다.

이 소설은 농촌 출신 인력거꾼을 주인공으로 하는데 성실하게 살아가려 하는 주인공이 도시 하층민으로 각종 세파를 겪으면서 점차 타락가는 과정을 그리고 잇다.

베이핑(베이징의 국민정부 시대 때 바뀐 이름)의 인간 군상을 통해 당시의 세태를 보여주고 있는 이 소설은 1945년 영어로 번역되어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라오서를 국제적 작가로 만들어 주었다.

라오서는 어린 홍위병의 '마녀 사냥극' 통과 의식에 따르기를거부했다. 그는 반동분자라는 패찰을 떼어 땅바닥에 내팽겨첬고 고개를 꼿꼿히 세우고 허리조차 굽히지 않았다.

홍위병의 마녀 사냥 극에는 국가주석 류샤오치마저 그대로 따랐다. 류샤오치는 무릎을 굽히고 두 손을 앞으로 뻗는 이른바 제트기 타기 등 각종 수치스런 동작을 새파랗게 어린 홍위병 지시대로 따라하며 모역을 감내했다.

'2호 주자파'로 낙인 찍힌 덩샤오핑도 반성을 압박하는 홍위병에게 "나는 나이가 들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거부했는데 이마저도 예외적이어서 대단한 용기로 간주됐다.

라오서가 백주 대낮에 집단 린치와 모욕을 당하는 것을 공안은 멀찌감치에서 지켜볼 뿐이었다. 더나아가 파출서 안에서도 린치를 당하였다.

이런 상황이 되자 라오서는 다음날 파출소로 출두하라는 지시를 따르는 대신 호수에 투신하여 더 이상 치욕을 당하기를 거부했다.

덩샤오핑은 귀양살이 도중 땅을 파서 머리를 그 구덩이에 박는 자세로 반성하고 참회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마오에게 써서 다시 기회를 얻었고 마오의 사후 마침내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고진감래였다.

그러나 작가 라오서는 모욕을 참고 때를 기다리는 정치적 자세를취하기 보다는 '서서 죽기를 택했다. <스위프트-버크왈드

1899년 2월 3일 낙타상자(駱駝祥子: 인력거꾼, 영어 번역명으로는 Rickshaw Boy)의 작가 라오서(老舍)가 베이징(北京)에서 태어났다.

중국 근대문학의 대표적 작가 중 한 사람인 라오서는‘해서파관(海瑞罷官)’의 작가 우한(吳?)과 함께 문화대혁명 때에 희생당한 지식인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1966년 홍위병의 모욕을 받은 뒤 호수에 투신자살했다. 향년 67세였다.

소설가 이문열(李文烈)은 국민의 정부 당시 홍위병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신문 기고에서 라오서를 언급한 바 있다.

이로 인해 이문열은 '책 장례 퍼포먼스'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 퍼포먼스의 주최자는 어린 아이을 앞세웠다는 점과 홍위병도 라오서에게 린치를 가하년서도 차마 하지 못햇던 나치 독일 괴벨스와 고대 중국 진시황의 '분서'와 다름없는 행동에까지 치달았다는점에서 극좌의 홍위병과 극우의 괴벨스를 통합한 셈이다.

라오서는 필명이며 본명은 수칭춘(舒慶春)이다. 자는 스위(舍予). 만주족 출신으로 호군(護軍)이었던 라오서의 부친은 라오서가 한 살이던 1900년 8개 연합군의 베이징(北京) 포위공격에 맞서 싸우던 중 사망했다.

역시 만주족의 8기(旗) 출신인 라오서의 모친은 남편 사망 후 남의 옷을 세탁해주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1918년 라오서는 베이징 사범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으며 베이징 제17소학교 교장에 임명되었다.

1924년에는 영국 런던대학의 중문강사로 초빙되었으며 영국 체제 기간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장편 소설 ‘라오장의 철학(老張的哲學)’이 이때 쓴 첫 작품인데 1926년 7월부터 문학잡지‘소설월보(小說月報)’에 연재되면서 문단을 진동시켰다.

6년 동안 영국에 체재하면서 라오서는 이밖에도‘조자왈(趙子曰)’, ‘이마(二馬)’ 등 지식인의 생활 모습을 씁쓰레한 유머로 그린 장편을 잇달아 발표했다.

라오서는 이러한 작품 활동을 통해 유머작가이자 중국 신문학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 문단에 독자적인 지위를 쌓았다.

1930년 귀국한 라오서는 치루대학(齊魯大學), 산둥대학(山東大學)의 교수로 있으면서 ‘묘성기(猫城記)’, ‘이혼’, ‘낙타상자’ 등의 장편소설, ‘초승달(月牙兒)’, ‘나의 일생(我這一輩子)’ 등 중편소설과 ‘미신(微神)’ 등의 단편소설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이중 ‘낙타상자’는 비판적 리얼리즘 방향에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항일전쟁 중에는 우한(武漢)에서 중화전국문예계항적협회(中華全國文藝界抗敵協會)의 지도적 역할을 맡는 한편 ‘잔무(殘霧)’ 등의 희곡 집필에 착수하였고 1944년에는 장편소설‘사세동당(四世同堂)’을 쓰기 시작했다.

일본군 점령하 베이징에서 4대(代)의 대가족이 사는 모습을 그린 4부작 ‘사세동당’은 1만 여자에 달하는 거작으로 1,2 권은 충칭(重慶)에서, 3권은 1946년 초청을 받아 도미한 뒤 미국에서 발표하였고 4권은 베이징에 돌아와 완성했다.

공산 정권이 수립된 뒤 여드레 만에 미국에서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당시 50세였던 라오서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에서 수필가이며 소설가인 린위탕(林語堂)을 제외하고는 가장 유명한 중국 작가였다. 린유탕이 국민정부를 선택한데 반해 라오서는 공산정부를 택했던 것이다.

그가 서방세계에 널리 알려진 결정적 계기는 1945년 에반 킹(Evan King)이란 필명을 쓰는 톈진(天津) 주재 미국영사관의 미국인 직원이 그의 대표작 ‘낙타상자’를 번역, 미국에서 출간하면서였다.

번역자에 의해 원작의 여러 군데가 생략되거나 바뀌어졌고 낭만적인 해피엔딩이 첨가된 이 영어 번역본은‘이달의 책클럽’선정 도서가 되었으며 미국 외에 일본과 유럽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귀국 뒤 베이징 빈민굴의 변모와 새삶을 그려 신중국을 찬양한 희곡‘용수구(龍鬚溝)’로써 베이징시로부터 인민예술가 칭호가 수여되었다.

또 전국문련(全國文聯) 및 전국 작가협회 부주석, 베이징시 문련(文聯) 주석 등과 전국정협 상무위원을 지냈다.

1978년 6월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라오서가 생전에 베이징에서 거주하던 집인 단시소원(丹?小院)’이 1999년 2월‘라오서 기념관’으로 일반에 공개되었다.

라오서는 복권 후 루신(魯迅), 바진(巴金) 등과 함께 중국의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4대 작가의 한사람으로 공인되었다.

라오서에게 모욕을 가했던 홍위병은 베이징 제2, 12, 23, 63 중학교(중고교에 해당) 학생과 중앙예술학원 출신 학생으로 당시 10대 후반이었다.

이들은 라오서를 ‘제1호 반동분자’라고 규정하고 갖은 린치를 가했다. 라오서는 이들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았고 이들이 들쒸운 ‘흑색 우파분자’, ‘괴물’,‘반동학자’라는 표찰을 당바닥에 내동댕이 치는 바람에 더욱 심한 폭행을 당했다.

시단(西單) 경찰서에 넘겨진 뒤에도 폭행을 당했던 라오서는 다음날 오전 8시까지 다시 출두하라는 지시를 받고 일단 풀려났다.

라오서는 다음날 경찰서에 출두하는 대신 집 근처 더성먼(德勝門) 밖 타이핑 호수에 투신하는 길을 택했다. 1966년 8월 24일의 일이었다.

라오서의 자결을 통한 문화대혁명에 대한 반항은 이 시기 처절한 자기 비판서를 공개 발표한 궈모뤄(郭沫若)와 뚜렷이 대조된다.

궈는 작가로서 또 역사학자로서 우뚝한 업적을 남겼고 86세로 장수한 가운데 1978년 와석종신했으나 사후 권력자에 아부한 '어용학자'라는 비판을 면하지 못했다.

2018/02/03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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