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11/15 17:18



[今天歷史-2월5일]공업은 大慶서...세일가스 美의 ‘다칭’

중국에서 다칭(大慶) 유전의 발견은 중국으로서는 그야말로 '대경사(大慶)'이었다.

1959년 공산중국 건국 10년째에 당시 경제수준에 자급자족이 충분한 석유 매장량이 발견됨으로써 중국은 석유 빈국의 타이틀을 떼어낼 수 있었다.

1964년 다칭유전 개발에 대해 마오쩌둥은 간고분투의 전범으로 활용하려 하였다. 완전 실패한 대약진운동의 불꽃을 되살리려는 안간힘이었다.

그러나 류샤오치와 저우언라이는 실용주의적으로 접근했다. 공업 현대화의 도약대로 간주한 것이다.

다칭유전을 두고 홍(紅)과 전(專)의 물밑 대결이 펼쳐졌던 것이다.

1963년 저우언라이에 의해 공업의 현대화를 농업 현대화 다음에 위치시킨 4개 현대화 노선이 대약진 실패 극복 방안으로 모색되자 곧바로 마오의 다칭유전 개발 성취 과정을 간고분투의 전범으로 삼으라는 지침이 내려졌다.

하지만 1964년말 4개 현대화 노선이 채택됨으로써 마오쩌둥은 이론투쟁에서 완패했다.

중국이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4개 현대화 노선 암흑기를 극복하고 개혁개방을 거쳐 중국 굴기를 통해 미국의 뒤를 쫓으며 중국몽(夢)'을 꿈꾸는 상황에 이른 것은 바로 어느 정도의 석유를 자국 내에서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게 다칭유전이 없었다면 류샤오치-저우언라이-덩샤오핑으로 이어진 공업 현대화 노선의 실현은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처럼 신기루가 되지는 않았겠지만 그 과정은 매우 힘들었을 것이며 오늘의 성취를 이루지는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칭유전 발견이 마오의 대약진 운동의 참담한 실패로 서방 선진국을 따라잡기는 커녕 뒤쫓아 가기가 요원한 것이 아니냐는 좌절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 저우언라이에게는 농업 현대화에 이은 두 번째의 현대화 과제로 공업 현대화를 내세우며 오늘날 '중국 굴기'의 '남상(濫觴)'의 을 띄웠다. 이는 다칭유전이 뒷받침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중국의 현재 석유 대외의존도는 65%에 달하는데 공업화의 급격한 진전으로 석유 수요가 폭증, 자급자족선을 넘어선지 이미 오래되었다.

석유자원 확보를 위해 해양굴기와 남중국해에서 중동지역 해안을 거쳐 아프리카 대륙으로 향하는 '진주 목걸이' 전략을 추진하게 만들었다.

중국이 진정한 세계 강국이 되기 위해 불가결한 '바다로 진출'의 단초 역시 다칭유전 발견에서 출발했다고 보아야 한다.

다칭유전 발견이 중국의 대경사였던 것처럼 미국에서 셰일가스 체굴의 경제성 확보 성공은 미국의 '아메리카 퍼스트'를 복원하는 대박이다.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유일 초강대국 미국의 몰락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냐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인 2008년은 셰일가스 이 경제적 채굴 방법으로 첫 시추가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결국 2015년 셰일가스 혁명이 세계의 에너지 판도에 혁명적 변화를 몰아왔다. 기존 산유국 중동 국가와 러시아, 베네수엘라 등의전략적 지위가 위축됐다.

미국에서만도 앞으로 300년간 인류가 쓰기에 충분한 에너지 매장량이 발견됨으로써 미국은 여전히 세계 제1강대국으로 군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했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도전자들에 대한 미국의 응수가 본격화하였다. 도전자의 선두는 '다칭'을 '남상'으로 한 '굴기 중국'이다.

중국의 다칭유전 발견과 미국의 셰일가스 발견은 남중국해를 교차점으로 중국의 진주 목걸이 전략과 미국의 태평양-인도 라인 대결이 겹치는 각각의 출발점이다. <스위프트-버크왈드>

上海인민공사,오페라 중국서 첫 공연

1964년 2월 5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전국에‘공업은 다칭(大慶)에서 배우자는 운동을 전개할 것을 지시했다.

이로써 공산중국 건국 10주년이 되는 1959년에 발견되었다하여 ‘다칭’즉 ‘큰 경사'로 이름 붙여진 이 유전의 개발 과정이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자력갱생(自力更生)’과 ‘간고분투(艱苦奮鬪)’의 전범이 되었다.

다칭(大慶)유전
의 다칭은 2005년도에 들어와 중국과 일본이 러시아의 시베리아 송유관의 노선을 놓고 경쟁을 벌일 때 중국 내 노선의 종점으로 다시 한번 국제뉴스의 초점이 되었다.

러시아는 2005년 일본 측이 제안한 동해로 연결되는 나홋카 노선을 시베리아 송유관의 주노선으로 삼되 다칭노선을 지선으로 삼아 이를 먼저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다칭 유전의 탐사와 발견은 중국에서는 대규모 유전이 형성될 수 없다는 통설에 도전했던 중국인 지질학자 리쓰광(李四光)에 의해 이루어졌다.


[今天歷史-10월 26일] 朴正熙 암살, 중국군 북한철수, 李四光


다칭은 중국 북동부 헤이룽장(黑龍江)성 남서부 쑹넌(松嫩) 평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 명칭 안다(安達)이다.

원래 투얼보트(杜爾伯特)기(旗)의 유목지였던 습한 초원이었는데 1906년 안다(安達)청((廳)이 설치되고, 1913년 안다(安達)현(縣)을 두었다.

중국 최대 유전지대의 중심도시로 룽펑(龍鳳)·싸위투(薩雨圖)가 중심 시가지이며 석유화학 공업단지가 입지하고 있다.

하얼빈∼만저우리까지의 빈저우철도(濱州鐵道)를 따라 퉁랑선(通讓線)이 분기(分岐)되어 있으며 베이징(北京)까지 파이프라인이 통하고 있다.

1957년 = 중국 중앙실험가극원이 베이징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椿姬)'를 공연했다. 이는 중국 역사상 첫 오페라 상연이었다.

1967년 = 상하이(上海) 인민공사가 성립되었다. 4인방의 리더 격인 장춘차오(張春橋)가 주임을 맡고 야오원위안(姚文元)과 왕훙원(王洪文)이 부주임을 맡았다.

기존의 당, 정 영도기구로부터 권력을 탈취한 이들은 새로운 영도기구를 ‘인민공사’ 즉 ‘코뮌’의 이념을 받든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제창으로1958년부터 농촌의 생산경제 단위로 자리 잡은 인민공사
(人民公社)
를 도시 지역으로까지 확대하자는 것이었다.

이들이 염두에 둔 모델은 1871년 3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파리 시민,노동자의 봉기로 세워졌던 파리의 혁명적 노동자 정권‘파리코뮌’이었다.

파리코뮌의 최고의사 결정기구는 코뮌 평의회로 프랑스 대혁명의 공포정치적 혁명 독재를 신봉하는 신 자코방파, 파리인민의 혁명 독재에 의한 사회주의 건설을 부르짖은 블랑키파, 제1인터내셔널파의 노동자와 이에 공명하는 지식인 등 시민이 선출한 의원으로 성립되었다.

입법권과 집행권을 아울러 장악하는 새로운 형태의 정부였다.

모든 관공기관의 공선제(公選制)와 리콜(recall)제, 즉 주민소환제 등 인민주권 원리에 바탕을 직접 민주주의적 체제 원칙을 표명하였다.

또한 공장시설의 접수 및 노동조직에 의한 민주관리와 집단적 소유에의 이행을 지향하고 분권적 사회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파리코뮌이 내부 분열과 베르사이유 정부군에 의해 2개월여 만에 와해되었듯이‘상하이인민공사’즉‘상하이 코뮌'도 18일 만에 사라졌다.

다름아닌 마오쩌둥의 제동으로 18일 뒤인 2월 23일‘상하이 혁명위원회’로 명칭이 바뀐 것이다.

'상하이 인민공사' 즉‘상하이 코뮌’에 대해 베르사이유 정부군 역할을 한 것은 다름 아닌 마오였던 것이다.

마오가 4인방에게 한 질책은 다음과 같다.

“당신들은 상하이 인민공사 성립 후 발생할 문제에 관해 생각해 보았는가. 각 성과 시가 인민공사로 명칭을 바꾸게 되면 국무원은 무엇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은 또 무엇으로 불러야 하나. 이는 정체(政體)와 국호를 바꾸는 문제를 제기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인민공사로 바뀌어야 하나,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은 중화인민공사의 주임으로 아니면 사장으로 불러야 하나.

보다 긴급하게 생각하여야 할 문제는 외국의 승인 문제이다. 소련이 골치 아파 승인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중화인민공사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좋지 않다.”

마오의 이 같은 제동은 탈권을 위해 4인방을 이용했던 마오가 탈권 작업이 끝나자 이들의 맹목적 급진 노선에 브레이크를 걸기 시작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마오는 홍위병의 급진 노선에 제동을 걸기 위해 문화대혁명 초기의 홍위병 지도자를 숙청했으며 대학생을 대거 하방시켰다. 마오의 토사구팽(兎死狗烹)이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로베스 피에르가 자신보다 더 급진적인 이른바 수평파(水平派)의 지도자 에베르를 단두대로 보내 처형한 것을 연상시킨다.

2018/02/05 00:49


경제| IT | 사회 | 정치 | 양안 | 문화 | 대만 | 홍콩 | 한중Biz | 한반도 | 인물동정

 
Copyright 2000 ChinaWatch.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