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2/24 22:44



[今天歷史-2월7일]북한 광명성 4호 발사...혼란 전술

북한이 그동안 구사한 핵 전략은 공산 세력의 성공적인 전략들이 녹아 있다.

살라미 전술, 위장 전술 그리고 용어 혼란 전술 등이다.

살라미 고기를 꽁지에서부터 조금 조금씩 먹어가 종국에는 살라미 고기 모두를 먹어치운다는 것이 살라미 전술이다.

살라미 전술은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에서 시작, 팔다리를 거쳐 몸둥아리를, 최종적으로는 팔다리와 몸통 없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머리통마저 꿀꺽하여 떡은 물론 할머니 몸 전체를 몽땅 먹어치우는 우리나라 전래 동화 '햇님 달님'(이야기의 전반부에서 호랑이가 쓴) 꼼수 전략을 연상하게 한다. .

위장 전술은 앞에서 평화를 말하고 뒤에서는 전쟁을 준비하는 한 손으로 악수하면서 뒤통수 치기 전술이다.

그리고 용어 혼란 전술은 위장 전술과 맞물려 구사되는 것으로 '까마귀'를 '백로'라 부르며 이를 믿도록 강요하는 꼼수다.

핵 개발은 핵 폭탄과 핵 폭탄을 목표 지점에 실어나르는 투발체 즉 미사일 개발 두 축으로 구성된다.

북한은 영변의 방사화학실에서 원자폭탄 제조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것이 드러나자 전력 부족을 메꾸기 위한 원자력 발전소를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위장 전술이었다.

1998년에는 대륙간 탄도 미사일 개발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일본 열도를 넘어가 태평양 상에 떨어지는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한 뒤에는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기 위한 것이라며 북한은 그럴 권리를 지닌다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이 역시 위장 전술이다.

북한의 핵개발이 국제적 안보 이슈화할 때마다 북한은 항상 자국의 안보를 보장받기 위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침략에 맞서기 위한 평화 보장책이라는 논리를 폈다. 위장 전술이자 용어 혼란 전술이었다.

'미사일'이란 명칭 대신 '로켓'이라고 블렀고 '은하', '광명성' 등 우주 개발을 연상하는 명칭을 붙이는 것은 용어 혼란 전술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북한 핵전략 추진 과정에서 백미는 살라미 전술이다.

1차 핵위기 때는 '원자력 발전소만 있다면...'이란 전제 아래 영변 원자로 대신 경수로를 설치 교환하는 제네바 북미합의를 끌어냈다.

경수로를 제공받는 데는 실패했지만 중유를 제공받으면서 핵 개발을 추진할수 있었다.

2006년 10월 9일 1차 핵실험 후에는 비핵화와 북미 평화체제 구축을 맞교환하는 합의를 도출해냄으로써 기존의 핵 개발 진전을 사실상 인정받았다.

북한이 2017년 말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시점에서 보면 1993년 1차 핵위기 시작 이후 2017년 말까지 살라미 전술과 위장, 용어 혼란 전술로 히트앤드런 작전을 구사하며 한발짝씩 쉬지 않고 목표 산에 올랐다.

북한은 화려하게 또 영리하고 때로는 아주 과감하게 구사하며 설정한 고지를 눈 앞에 바라보는 단계에까지 이른 셈이다.

하지만 바로 앞에는 그동안 등정 결과를 단번에 집어 삼키는 크레버스가 놓여있기는 하다.

또 한번 우리나라 전래동화의 이야기로 비유하자면 할머니 소쿠리의 떡은 모두 먹고 할머니의 팔과 다리까지 먹어 치우고 머리통을 바라보며 혀를 날름 거리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보아야 하지 안을까.

그런데 머리통을 먹으려면 '크레버스'를 건너야 하는데 두 가닥의 로프 중 어느 것이 '황금 동아줄'이고 '썩은 동아줄'인지 아직 알 수 없다는 점이 문제다.

미국은 지금까지 북한의 핵전략에 '전략적 속아주기'로 국제 전략상 실리를 톡톡히 챙겼다.

북한의 핵개발을 빌미로 미사일 방어체제(MD)를 추진하는 꺼지지 않는 동력원을 활용했다.

이를 통해 한국과일본의 미국에 대한 안보 의존을 강화하여 중국으로 양국 접근을 일정 부분 제어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또한 중국의 해양 굴기를 적절하게 차단하는 효과도 보았다.

북한과 미국 간 북핵을 둘러싼 적대적 윈윈게임은 북한의 핵개발이 레드라인에 근접하고 미국의 대중 전략이 대전환에 도달하는 시점이 교차하면서 제로섬 게임으로 넘어가느냐 아니면 새로운 포지티브섬을 도출해 내느냐는 불확실성의 블랙홀 속에 접어든 것이다. <스위프트-버크왈드>

兩個凡是, 京漢철도 노동자 파업

< 2016년 2월 7일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쏘아 올렸다. 북한이 인공위성 광명성 4호로 명명한 장거리 미사일은 탑재한 물체를 일단 위성궤도에 안착시켜 지구궤도를 돌게하기는 성공했다.

그러나 전파 송신 등 인공위성으로의 기능을 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핵무기 이동수단으로 미사일 성능 실험에 초점에 맞췄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1977년 = 인민일보, 홍기(紅旗), 그리고 해방군보가 ‘문건의 핵심을 잘 학습하자(學好文件?住綱)’라는 제목으로 ‘양개범시(兩個凡是)’를 강조하는 공동사설을 게재했다.

화궈펑(華國鋒)의 정치노선을 상징하는 '양개범시'가 처음으로 중국 인민에 제시된 것이다.

‘양개범시'란 “마오 주석이 내린 결정이라면 우리들은 모두 이를 강력하게 지켜나가야 한다. 마오 주석의 지시는 우리들이 시종일관하게 벗어나지 않고 존중해야 한다(凡是毛主席作出的決策, 我們都堅決維護, 凡是毛主席的指示, 我們要始終不?地尊循)”를 말한다.

화궈펑이‘양개범시’를 내세웠던 것은 덩샤오핑(鄧小平)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마오 사후 덩샤오핑의 지지세력과 연합하여 4인방을 몰아낸 화궈펑은 덩의 정계 복귀를 막아야 한다는 인식에 도달했다.

화궈펑이‘4인방'을 축출한 직후인 1976년 10월 26일 당중앙 선전 부문으로부터 보고를 청취한 뒤 행한 지시는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4인방에 대한 비판은 덩에 대한 비판과 연계되어야 한다. 4인방의 노선은 (덩샤오핑의 것과 마찬가지로) 극우노선이다. 마오 주석이 말한 것, 중점을 둔 것은 모두 비판해서는 안된다. 천안문 사건(1976년 4월 청명절 천안문 사건을 말함)은 재론해서는 안 된다”고 지시했다.

현재 중국공산당은‘양개범시’가 마오가 만년에 범한 좌경적 착오를 그대로 견지하자는 것으로 사상해방을 막고 당이 문화대혁명의 착오와 이를 바로잡는데 중대한 장애가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今天歷史-9월16일] 兩個汎是 비판

1923년 = 중국 경한(京漢)철로(베이징-한커우)의 노동자들이 전면파업을 실시하는 가운데 한커우(漢口)의 장안(江岸)에서 노동자들이 군벌군경의 공격을 받아 수십 명이 피살당했다.

중국공산당은 이를 ‘2.7 참안(慘案)’으로 부른다. 사건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군벌 세력의 대항 세력인 도시 근로자와 이를 조직하고 지도하는 공산당의 존재감을 뚜렷이 부각시켰으며 다음 해인 1924년 1월 손문이 지도하는 국민당과 공산당 간 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는 배경의 하나가 되었다.

파업은 2월 1일 경한철로의 노동자들이 공산당원의 지도아래 정저우(鄭州)에서 경한철로 노동조합인‘경한철로총공회(京漢鐵路總工會)’을 결성하려는 것을 베이징 직예파(直隸派) 군벌(위안스카이 사후 북양군벌의 분파 중 하나로 베이징 등 수도권을 세력 기반으로 하였음) 오패부(吳佩孚:우페이푸)가 탄압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군벌 군경의 탄압을 무릅쓰고 결성식을 마친 총공회는 2월 4일부터 총파업에 들어갈 것을 결정했으며 본부를 한커우 장안으로 옮겼다.

총공회 지도부는 2월 4일 오전 9시부터 3시간 동안 전 노선에 걸쳐 수만 명의 노동자가 참가한 가운데 파업을 결행, 경한철로가 일시 마비되었다.

이후 각 지역단위별로 산발적인 파업이 계속되는 가운데 2월 7일 오패부의 지시를 받은 후베이독군(湖北督軍) 샤오야오난(肖耀南)은 협상을 갖자며 장안(江岸)공회 대표들을 만났다.

장안공회 사무실에서 협상이 진행되는 가운데 군벌의 군경은 노동자 대표들을 보호하기 위한 규찰대에 총격을 가하며 공격을 감행했다.

이 총격사건으로 30여명이 사망하고 200여명이 부상했으며 장안분회 위원장인 공산당원 린샹첸(林祥謙)과 우한공단(武漢工團)연합회 법률고문인 공산당원 스양(施洋)이 피살됐다.

린샹첸은 군벌 군경이 전봇대에 몸을 묶은 뒤 칼을 휘두르며 작업장 복귀 명령을 내릴 것을 요구하자 “내 목은 자를 수 있지만 파업은 풀 수 없다(我的頭可斷 工是不能上的)”고 말했다고 한다.

이 사건 발생 후 군벌의 대대적인 탄압에도 2월 9일까지 파업은 지속되었지만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고 조직 역량을 보존한다는 명목 하에 총공회 지도부는 결국 9일 파업 철회를 선언했다.

경한철로파업 과정 중에서 노동자 50여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했으며 체포되거나 수배된 사람은 1000여명이었다.

사건을 계기로 각 지역의 군벌은 노동운동에 대해 강력하게 탄압, 한동안 노동운동이 쇠퇴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2018/02/07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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