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8/22 09:03



[今天歷史-2월10일]지하총서기 鄧力群...지상 못나와

마오쩌둥에게 덩샤오핑은 '옐친'이었고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보리스 옐친은 '덩샤오핑'이었다.

덩샤오핑은 마오 사후 마오이즘을 철저하게 무너뜨렸다. 옐친은 고르비가 힘을 잃기가 무섭게 고르비가 끝까지 지키려던 소련식 사회주의 이념과 그 바탕에 세워진 연방체제를 해체했다.

CVID 구현이었다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이킬 수 없는 파괴였다.

옐친은 '소련의 덩샤오핑'이었고 덩샤오핑은 '중국의 옐친'이었다.

옐친에게는 '허가 받은 반골'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덩샤오핑에게는 '계륵 반골'이란 별명을 붙여줄 만하다.

덩리췬은 '덩샤오핑의 덩샤오핑'이었다.

그는 덩샤오핑이 마오 절정기 시절의 자신을 연상케 할 정도로 집요한 반골이었다.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산주의란 이념을 포기하지 않는 한 결코 소멸시킬 수 없는 '이론 교두보'을 공고히 지켰다.

그래서 덩리췬에게는 '지하 총서기'란 별명이 붙여졌던 것이다.

덩리췬은 덩샤오핑 사후 18년을 더 살았다. 덩은 마오가 죽은 뒤 불과 3년 뒤부터 마오이즘의 관에 못질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좌(左)왕'은 3년의 6배가 되는 시간이 주어졌으나 끝내 지상으로 나올 수 없었다.

옐친과 고르비와의 관게도 비슷하다. 옐친이 세상을 떠난 지오래고 고르비는 여전히 살아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이념이 부활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소련에서 이제 사회주의 이념은 물레방아를 넘어간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거슬러 올라가기에는 불가능해졋다. 시대의 조류를 역류시킬 수는 없다. .<스위프트-버크왈드>

중국 잡지‘인권’, 北洋함대 기함 정원함 자침

2015년 2월 10일 덩샤오핑 집권 시기에 = 개혁개방의 속도와 범위를 놓고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과 정면 대결을 벌이며 첨예한 대립각을 세워 '지하 총서기', '좌왕(左王)' 으로 불렸던 덩리췬이 사망했다. 향년 100세.

마오쩌둥(毛澤東), 류사오치(劉少奇)와 같은 후난(湖南)성 출신인 그는 선전과 이론 부문에서 활약했다.

류샤오치의 정치비서였던 관계로 문화대혁명 내내 정치권 밖에 밀려나 있다가 마오가 죽고 4인방이 축출된 다음 해인 1977년 정치 무대에 복귀했다.

그는 마오가 지명한 후계자인 화궈펑(華國鋒)과 덩샤오핑 간 권력투쟁 과정에서 덩샤오핑 편에 섰다. 덩샤오핑 세력은 화궈펑의 "마오 결정과 정책은 모두 옳다"라는 이른바
범시파(凡是派) 노선을 공격하면서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實踐是檢驗眞理的唯一標準)'이란 슬로건을 내세웠는데 그 이론 골격은 덩리췬이 마련했다.

이 슬로건은 '실천이 진리를 검증한다(實踐檢驗眞理)'라는 마오의 말을 변용한 것이다.

하지만 덩리췬은 개혁과 개방 방향과 속도를 놓고 덩샤오핑과 갈라섰다.

덩샤오핑이 1979년 시중쉰(習仲勛, 시진핑 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아버지)의 경제특구 제안을 받아들여 대담한 개혁과 과감한 개방을 추진한 것이 결정적 계기다.

당중앙 선전부장을 맡고 있던 덩리췬은 정신 오염' 문제를 제기했다.

덩리췬의 이 같은 주장은 제한적 경제 개혁과 개방을 주창한 천윈(陳雲)이 내놓은 '새장 경제론'의 이데올로기 버전이었다.

그런데 어조는 문화대혁명 시절의 4인방과 홍위병을 연상할 정도로 직설적이고 도발적이었다.

덩리췬은 "덩샤오핑의 노선은 착오적이다(鄧小平的路線是錯誤的)"라고 조금도 주춤거리지 않고 덩샤오핑을 직접 겨냥했다.

이는 마오가 홍위병 세력을 부추긴 선동 슬로건인 '사령부를 포격하라'를 연상시킨다. 여기서 '사령부'란 국가주석이자 당내 실권파의 우두머리 류샤오치다(당주석은 마오쩌둥).

덩리췬은 "개혁과 개방으로 탐관오리가 많아졌고 자산계급이 다시 출현했으며 흑사회(黑社會 : 마피아 집단)가 생겨났고 가난한 이들이 소송 기회를 얻지 못하며 당원이 군중과 유리되고 노동자가 대거 직장을 잃으며 자본가가 다시 착취를 시작하고 농민이 농토를 뺏기며 기녀와 성병이 만연할 것"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이데올로그 덩리췬에게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반은 가장 득의의 시절이었다. 1987년 1월과 1989년 6월 개혁개방 노선의 쌍두마차였던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이 각각 학생시위 여파와 천안문 사태 와중에서 총서기직에서 잇따라 불명예 퇴진했다.

형식은 덩샤오핑이 위기 상황 수습을 위해 자신의 오른팔과 왼팔을 스스로 자른 것이지만 덩리췬의 집요하며 지속적인 이데올로기 공세가 강요한 상황이었다.

이와 함께 경제는 총리 리펑의 주도 아래 수도꼭지 밸브가 잠기듯 위축됐고 대학생에 대한 군사 교육과 모든 부문에서 사상 교육이 강화됐다. 이는 분명히 개혁과 개방의 유턴이었다.

덩리췬에게 지하 총서기와 좌왕이라는 별칭이 붙여진 때도 이즈음이다.

그러나 1992년 10월 14대(중국공산당 14차 전당대회)에서 덩리췬은 덩샤오핑의 미래 정치 설계도에 따라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야 했고 이후 정치적 재기를 이루지 못했다.


[Pensees] 三金’과 ‘三鄧’ 그리고 ‘벌겋게 물든 서산’
2015/02/26 20:36
2002년 중국에서 인권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학술잡지‘인권’이 창간되었다.

중국 관변단체인 중국인권연구회가 영문판과 중문판으로 격월간 발행한 잡지는 천안문(天安門) 유혈 진압의 주역으로 서방으로부터 인권 탄압자라는 비난을 받아 온 리펑(李鵬) 전인대 상무위원장이 축하 서신을 보낸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적 인권’ 개념을 개발하고 서구, 특히 미국의 비판에 응전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인권’은 창간 취지에서 인권사례를 소개하고 인권이론을 탐구하며 인권대화를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국제사회에 중국의 인권상황을 이해시키는 하나의 창구 역할을 하고, 고금의 내외 인권이론과 실천을 탐구하는 학술 공간이 되며, 중국 인권의 진보와 국제 인권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대한의 논단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자오치정(趙啓正) 국무원 신문판공실 주임은 인권문제는 이론 문제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현실문제라고 강조하고‘인권’이 학술활동 뿐만 아니라 중국이 개혁개방과 현대화 건설 실천 과정에 존재하는 인권문제를 탐구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한편 리펑은 인권은 보편성과 아울러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하고 인권의 보편성원칙의 실현은 각국의 구체적 국정 상황과 결합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중국은 자체의 국정상황에 입각, 인민의 생존권과 발전권을 수위에 두어 왔으며 이와 동시에 경제, 사회, 문화 권리와 공민(시민), 정치 권리를 부단하게 증진시켜왔다고 주장했다.

리펑은 중국은 자국 사정에 맞게 인권을 촉진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정확한 도로에 도달했다고 강조하고 중국의 인권 상황은 부단히 개선되고 있으며 역사상 가장 좋은 시기에 있다고 말했다.

중국 외교부는 미국 국무부가 세계 각국의 인권 상황을 밝히는 연례 세계 인권 백서 발표에 맞추어 미국 인권백서를 발표하고 있다.

중 .“너나 잘하세요”...미 인권기록‘ 맞불 발표 2006/03/09 13:08

1895년= 청나라 북양(北洋)함대의 기함‘정원(定遠)’호가 웨이하이(威海) 해상에서 자침(自沈)했다.

6000마력에 7500톤의 정원호는 당시 최신식 해군 함정으로 톤수와 대포 구경 면에서 일본 군함을 월등히 앞질렀다.

다만 청나라 해군은 훈련과 작전 수행 준비 등 '소프트웨어'에서는 일본 해군에 못미쳤다.

1894년 9월 17일 황해(서해)압록강 하구 해전에서 일본 해군의 집중 포격을 받아 기동력을 상실한 채 웨이하이웨이 항으로 퇴각했던 정원호는 이곳을 포위한 일본 해군과 육군에 맞서 싸우다 포탄이 떨어지자 적에게 선박을 넘겨줄 수 없다며 자침한 것이다.

정원호의 침몰은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 정부가 추구했던 중체서용(中體西用)의 파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청일전쟁시 침몰 定遠-致遠號 복원

2018/02/10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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