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7/18 06:10



[今天歷史-2월11일]戴季陶 丁汝昌..실패한 책사 패전지장

건곤일척의 싸움에서 패한 쪽의 책사(策士)는 주군(主君)보다 먼저 죽기 마련이다.

'경국지장(傾國之將)'은 주군의 모든 잘못까지 뒤집어쓴다. 초한쟁패의 항우 책사 범증은 항우보다 먼저 갔고 촉한의 대를 이은 책사 제갈공명은 유선보다 앞서 갔다.

우리나라에서도 안평대군의 책사 이현로는 계유정난 직후 목이 잘려 효수됐다. 안평대군에게 형님 수양대군을 먼저 쳐야 한다고강력하게 권유한 그는 주군이 사사되기 전에 죽었다.

주군의 과오를 몽땅 뒤집어쓴 '경국지장' 대표적 예로는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패전한 나치 독일군의 장군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다.

그는 총통 히틀러의 후퇴불가 명령을 어기지 않아 피할 수도 있는 패배를 회복 불가능한 처참한 패전으로 만들고 말았다. 나치독일 장군들 중 가장 수치스런 오명을 역사에 남겼다.

우리나라에서도 정유재란 당시 칠천량 패전의 원균은 선조의 엉터리 전략을 충성스럽게 따르다가 만고의 무능장군이자 부패한 장군으로 낙인 찍혔다.

장제스의 책사 다이지타오는 국민당과 국민정부의 본격적인 몰락에 앞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범증이 항우에 앞서 울화병으로 사망하고 제갈공명이 노심초사하다가 유선에 앞서 역시 병사했듯이 다이지타오는 자신의 죽음으로써 국민정부 미래에 대한 '카산드라 예언'을 한 셈이다.

다이지타오는 국부(國父)적 존재인 손문의 '연소용공' 전략을 손문 사후 채 2년도 안된 시점에 대담하고 과격하게 무너뜨리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고 공산주의의 도전과 일본의 침략이라는 내우외환 상황에서 '먼저 내부를 안정시킨 뒤 외세를 배척한다(先安內後攘外)'전략을 장제스로 하여금 선택토록 하였다.

범증과 제갈량이 그랬던 것처럼 전자는 화려한 성공이었으나 두 번째는 참담한 실패였다.

범증은 진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성공했으나 초한쟁패에서 먼저 유방을 죽여야 한다는 주장을 항우가 받아들이도록 하는데 실패, 천하의 패권이 한나라에게 돌아가는 결과를 막지 못했다.

제갈량은 적벽대전 대승으로 천하삼분 지계를 달성했으나 '출사북벌'을 완성시키지 못하여 결국 촉한의 멸망을 초래했다.

다이지타오는 공산 세력을 배제한 가운데 북벌을 완성시켜 청조 멸망 후 군벌 분열 시대를 끝내고 수립된 통일 중국을 장제스의국민당이 오로지 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시안사변과 일본 침략 등으로 인해 다이지타오의 '선안내(先安內)'전략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으면서 결국 2차대전 종전 후 공산당과의 싸움에서 대륙을 공산세력에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전략 방향이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이의 실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이다. 다이지타오보다는 장제스의 책임이 더 크다.

북양함대 사령관 정여창은 패전에 변명하지 않고 자결했으나 그의 관이 땅속에 못들어가고 상당기간 내팽겨졌고 무능한데다 싸우지도 않은 장수라는 오명을 후세에 남겼다.

그러나 이 모든 책임은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있다.

우리나라에서 원균이 이순신 장군때문에 패전지장 이상으로 욕을먹는 것이라든가 파울루스가 롬멜과 대조되기에 더욱더 욕을 먹는 것이다.

승자 독식이라고 하지만 그룹이 이아니라 한 사람으로 수렴되는 경향이 있기에 책사는 성공 이후가 문제다. 처신을 잘해야 한다.

마오쩌둥의 정책과 이념 담당 책사 류샤오치와 군사 부문 책사라고 할 수 있는 린뱌오는 모두 마오의 의심 때문에 불행한 종말을 맞았다.

책사는 성공에도 불구하고 주군과 영광을 공유하기가 힘들다.
유방의 책사 장량이 '성공한 책사' 본을 보였으나 그런 예는 아주 드물다. <盲瞰圖子>

한자병음 방안, 얄타협정 체결, 아관파천

1949년 2월11일= 국민당 원로 다이지타오(戴季陶)가 광저우(廣州)에서 수면제를 먹고 자살하였다.

국공내전의 승패를 사실상 가른 3대전투 중 마지막 전투인 핑진 전투가 1월 31일 공산군의 베이핑 입성으로 완전 결말이 난지 열하루 뒤였다. 1890년생으로 향년 59세였다.

다이지타오는 1915년 일본 유학 중 중국동맹회에 가입했으며 신해혁명 후 상하이(上海)에서 민권보(民權報) 창간에 참여하는 등 손문(孫文 : 쑨원)을 도왔다.

이후 천궈푸(陳果夫)와 함께‘헝타이하오(恒泰號)’라는 증권회사를 차려 투기활동을 하기도 한 그는 1925년 손문 사망 이후 ‘국민혁명과 중국 국민당’, ‘손문주의 철학기초’등 논문을 통해 손문의 연소(聯蘇 혹은 聯俄), 연공(聯共), 부조농공(扶助農工)의 3대 정책을 반대하였다.

또한 계급투쟁과 노동자-농민 운동을 공격, 훗날 천두슈(陳獨秀)에 이어 공산당 당수가 되는 취추바이(瞿秋白)의 비난을 받았다.

1927년 장제스(蔣介石)의 4 · 12 쿠데타 이후 난징(南京) 국민정부의 위원, 고시원 원장을 역임하며 장제스의 책사로서 활동했다.

1931년 9 · 18 사변(만주사변) 이후 대일문제 전문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외세를 배격하기에 앞서 내부를 안정시켜야 한다(攘外必先安內) ’ 정책을 주창하였다.

1948년 말 난징 정부와 함께 광저우에 왔으나 정세 악화에 절망감을 느끼고 자살한 것이다.

1895년 = 청나라 북양(北洋)해군의 최고 지휘관 정여창(丁汝昌)이 진중에서 자결했다.

청나라 북양해군은 중국이 갑오전쟁(甲午戰爭)으로 부르는 청일전쟁 발발 후 압록강 하구 해역에서 벌어진 황해(서해) 해전에서 일본군에 패해 기지인 산둥반도의 웨이하이웨이(威海衛)항으로 철수한 상황이었다.

북양해군을 육성한 이홍장(李鴻章)은 남은 함선이라도 보존하기위하여 북양함대에 출진하지 말 것을 지시, 웨이하이웨이 항에 계속 대기하던 중 일본 육군과 해군함대에 의해 포위당하고 말았다.

일본군의 항복 요구를 거부하며 저항을 계속하던 정여창은 2월 10일 전 함대에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던가 자침(自沈)할 것을 지시하였으나 기동력을 상실한 기함 정원(定遠)호만이 자침하였을 뿐 대부분의 부하가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2월 11일 다시 남은 함선을 폭파할 것을 명령했으나 부하들이 반대하며 항복할 것을 권유했다. 정여창은 결국 이날 밤 자결하고 만다.

정여창의 자결 뒤인 12일 새벽 부하 지휘관은 정여창의 명의를 도용하여 투항서를 작성. 일본군에 항복했다.

잔여 함선 11척과 유공도(劉公島)의 포대 및 각종 군수물자가 일본군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로써 이홍장이 거금을 들여 육성하였던 북양해군은 이처럼 치욕적으로 완전 궤멸되고 말았다.

일본군은 자결한 정여창을 적장의 예우를 갖추어 장례를 치러주었으나 중국인들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북양함대를 스스로 괴멸시킨 정여창의 장수로서 행동에 대한 불만으로 그의 관을 곧바로 땅에 묻지 않고 상당 기간 방치해 두었다고 한다.

1958년 2월 11일 한자병음 방안이 전인대에 의해 채택되었다.

한자병음 방안은 한자의 음을 로마자로 표기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와 함께 전인대는 한자의 간체화를 계속 추진하고 푸퉁화(普通話)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며 한자병음 방안을 한자 학습에 활용하도록 했다.

한자병음 방안을 수립하고 한자의 간체화를 추진한 사람은 중국 문자개혁위원회 주임 우위장(吳玉章)이었다.

세계사 속의 오늘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영국 처칠 총리와 소련 스탈린 원수가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소련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회담을 갖고 2차대전 전쟁 완수와 전후 처리 문제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1945).

이 협정은 둘로 구성됐다.

1.‘크림 회의의 의사(議事)에 관한 의정서’는 세계기구(국제연합) 창설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회의의 개최, 대서양헌장 제원칙의 재확인, 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소련 4개국에 의한 독일의 분할
점령, 배상위원회의 설치, 전쟁범죄인의 조사, 폴란드ㆍ유고슬라비아의 처리 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2.‘소련의 대일(對日) 참전에 관한 합의’에서는 소련은 몽골인민공화국의 현상 유지, 남사할린의 반환, 다롄(大連)항의 국제화와 소련에 의한 우선 이용, 뤄순(旅順) 군항(軍港)의 조차(租借), 남만주 철도의 중소 공동경영, 만주에서 중국의 주권 유지, 사할린(樺太), 치시마 열도(千島列島)의 할양 등을 대가로 독일 항복 후 2~3개월 이내에 대일 참전할 것, 중국 국민정부와 우호 동맹조약을 체결할 것 등이 약속되었다.

이밖에 미국과 소련 간에 한반도 군사 분할에 대한 밀약이 있었다. 일본 항복 후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해 한반도를 미군과 소련군이 분할 점령하기로 한 것이다.

이후 양군의 경계선으로 38선이 설정됐으며 이는 2차대전 종전 뒤 일제로부터 해방된 한국의 남북 분단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

조선 국왕 고종이 왕세자( 훗날 순종)와 함께 비밀리에 경복궁을 떠나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1896). 이를 '아관 파천' 이라고 부른다.

일국의 군주가 다른 나라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신변의 안전을 보호받으려는 이러한 초유의 사태는 청일전쟁(1894 ~ 1895) 승리뒤 러시아에 접근, 일본을 견제하려는 왕비 명성황후를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일본 낭인을 동원 잔인하게 살해한 을미사변(1895년 10월)에 대한 대응 조치였다.

이로써 갑오경장을 추진 중이던 친일 김홍집 내각은 붕괴하고 이범진과 이완용의 친러 내각이 수립됐다.

1897년 궁성으로 복귀한 고종은 조선이 중국과 일본과 대등한 국가라는 점을 내외에 선포하기 위해 황제로 즉위하고 국호도 대한제국으로 바꾸었다.

이후 러일전쟁(1904 ~ 1905 때까지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균형 아래 대한제국은 독자적인 광무개혁을 실시하며 독립적 위치를 유지하려 애썼다.

2018/02/11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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