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2/18 16:04



[今天歷史-2월13일]김정남 암살...카인 혈통 선전 대박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 조선노동당 위원장 겸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 동복 3남매를 두고 북한에서는 '백두 혈통'으로 부른다.

이는 북한 김일성 왕조의 시조 김일성이 항일 빨치산 운동을 백두산에서 벌였다는 '신화'에서 비롯했다.

단지 김일성의 피를 이어받았다해서 '백두 혈통'이 아니다. 김일성, 김정일 그리고 김정일로 이어져온 '왕'의 동복 형제 자매만이 여기에 해당된다.

김일성의 자손이면서도 여기에 해당하지 않은 이들은 김정일에 의해 '곁가지'로 분류됐다.

하지만 소나기의 작가 황순원의 표현을 빌리자면 '최고 존엄' 김정은과 그의 동복형 김정철 그리고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에 김정은 특사 자격으로 남에 내려와 선전 대박을 터뜨린 여동생 김여정 당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 등이 3남매는 '카인 혈통'이다.
그것은 '왕' 김정은 때문이다.

김정은은 2011년 12월 17일 부친 김정일의 급사로 김정일을 승계하여 집권한 뒤 할아버지 김일성과 아버지 김정일과 달리 자신의가장 가까운 혈족도 정치적 이유로 잔혹하게 처형하거나 암살 방식으로 죽이도록 했다.

김정은은 2013년 12월12일 고모부 장성택 당행정부장을 기관포 사격 방식으로 처형했다.

그리고 2017년 2월13일에는 마카오를 주거지로 하여 망명 생활을 하던 이복형 김정남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암살했다.

우리나라 국정원은 북한은 김정남 살해와 관련, '언제라도 실행 할수 있는 명령'을 내려 놓은 상태였다고 파악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출신 인사, 소련파, 연안파, 갑산파 등 과거의 동료를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김정일 역시 숙청을 통해 많은 수의 정적을 제거했으나 가까운 친인척에 대해서는 목숨을 뺏지는 않았다.

김일성은 아들 김정일과 친동생 김영주 간에 권력 투쟁에서 최종적으로 김정일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러나 김영주를 지방에 유배 보냈지만 죽이지는 않았다.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 받은뒤에도 역시 삼촌 김영주를 더 이상 손대지 않았다.

김일성과 생긴 것과 풍채가 똑 닮아 김정일로 하여금 외모 콤플렉스를 부지불식간 가지게 했을 법한 이복 아우 김평일은 단지 외국 대사로 계속 돌려 북한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을 뿐이다.

그러나 김정은은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나름 지켜온 선를 넘어선 것이다.

장성택은 피가 석이지 않았지만 김정남은 어머니만 다를 뿐 아버지는 김정일이며 손위형으로 김정일의 장남으로 김일성의 장손이다.

김정남 암살 뒤 그의 아들 김한솔이 모친 여동생과 함께 외국으로 망명한 것은 아버지의 피살 뒤 다음 타킷은 바로 자신과 자신 가족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정남은 자신이 더는 김정은에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 무방비 상태로 외국을 넘나들었으나 김정은에게 김정남의 '장손 아우라'는 심각한 위협이었다.

'장손 아우라'가 사라진 뒤에 '증손 아우라'가 커나가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은 분명하다.

세조는 조카 단종을 죽였고 왕위에까지 오르지는 못했으나 왕의 조카 뻘 되는 왕자들은 수 없이 억울하게 역모죄에 얽혀 죽어야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가 혈통에서는 카인의 전통이 부단하게 반복된다.

조선조 에서 태종은 왕이 되기 위해 이복 아우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태종의 손자 세조는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바로 한살 아래 친동생 안평대군을 죽였고 왕위에 오른 뒤에는 역시 친동생 금성대군과 이복 동생들 여럿의 생명을 앗았다.

광해군도 왕위에 오르자 세자 시절 반대파들로부터 죽음의 공포를 함께 느꼈을 동복형 임해군을 사사하였다.

고종도 왕위에 등극한 뒤 서장자인 이복형을 역모죄로 몰아 약사발을 마시게 했다.

김여정의 화려한 '선전 선동 2박3일'을 마치고 평양으로 귀환한 이틀 뒤는 김정남 암살 1주년이 되는 날이다.

김정일이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을 통해 북한에 참패를 안긴 1차 연평해전 1주년을 묻어버린 것처럼 김여정은 김정남 암살을 묻어버렸다.

이쯤되면 '벡두 혈통 남매의 선전전 대박 승리 대물림'이라는 표현이 나올만 하다.

그러나 고금동서의 왕조사를 살펴보면 친남매간에도 어느 순간 죽고 죽이는 사이로 돌변한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사도세자의 뒤주 속 비참한 죽음 배후 주역들 중 한 사람은 사도세자의 친여동생 화완옹주가 있다.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말년에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친남동생은 이집트 왕좌를 놓고 죽느냐 사느냐의 권력투쟁을 벌였다.

카이사르에 접근하는데 성공한 클레오파트라가 남동생을 죽이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로마제국 초기 황제 자리를 이어받았던 카이사르 혈통의 카리귤라는 근친상간 관계인 친여동생이 임신하자 태아를 꺼내겠다는 광기를 부려 배를 갈라 죽였다.

카이사르 혈통의 마지막 황제 네로는 의붓 아버지와 의붓형이 어머니 아그리피나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뒤 네로는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죽였다. 반역 적폐의 청산이자 배은망덕이며 패악의 삼중주였다. 네로를 끝으로 로마 황제의 카이사르 혈통는 단절했다.

'백두 혈통'은 '카인 혈통'으로 악성 진화하고 있다.

이복형제를 죽이는 선은 이미 넘었다. '백두 남매'는 공존공영하는 윈윈게임을 지속할지 아니면 고금동서의 역사가 자주 알려주었듯이 권력을 놓고서는 형제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다는 궁국의 나락으로 내려갈지 아무도 모른다. <盲瞰圖子>

中華民國 성립, 청일전쟁 강화 교섭

1912년 2월13일 손문(孫文 : 쑨원)이 중화민국 임시정부 참의원에서 임시 대총통직을 사임하고 원세개(袁世凱 :위안스카이)를 후임으로 추천했다.

1911년 10월10일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나자 손문이 이끌던 혁명세력은 1912년 1월1일 난징(南京)에 임시정부를 수립한 뒤 손문을 임시 대총통에 추대하여 중화민국을 성립시켰다.

한편 청조는 북양군벌의 지도자 원세개를 기용하여 혁명군의 토벌을 명하여 남북의 군사적 대결구도가 형성되었다. 손문은 열강세력의 간섭과 혁명파 내부의 분열 등으로 인해 혁명의 철저화가 곤란한 상황이었다.

혁명 세력은 청조 타도라는 목표에는 일치하였으나 중국의 미래 정치형태를 놓고 손문의 삼민주의와 5권분립에 의한 대통령 중심제와 유사한 총통제 하의 공화정 외에 입헌파, 연성자치파(聯省自治派), 평화회의파(和平會議派) 및 상인정부파(商人政府派) 주장 등이 백가쟁명하는 양상이었다.

심지어 손문이 이끌던 중국동맹회 내부에서도 숭자오런(宋敎仁)은 국무총리에 실권을 부여하는 일본식의 내각책임제를 지향하는 입장으로 노선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원세개 입장에서도 모든 성이 독립을 선언하는 혁명적 상황을 거스를 수 없는 처지였다.

상대방을 완전히 제압할 수 없다고 인식한 양측은 타협책으로 선통제(宣統帝) 퇴위와 함께 공화정을 수립하는 대신 대총통의 지위는 원세개가 차지하기로 한 것이며 손문의 사임과 원세개 추천은 이러한 합의에 따른 것이다.

손문과 원세개의 타협에 따라 만주족의 청조는 멸망하고 한족이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중화민국이 성립되게 되었다.

1895년=청나라 정부는 이홍장(李鴻章)을‘수석 전권대신(頭等全權大臣)’에 임명, 청일전쟁 강화 협상을 벌이도록 했다.

청일전쟁(중국은 이를 '甲午戰爭'으로 부른다) 발발 후 청나라 군대는 평양, 황해, 뤼순(旅順), 동북(東北) 지역의 전투에서 연전연패 하였으며 이홍장 임명 하루 앞선 2월12일에는 웨이하이(威海)의 북양해군이 항복했다.

더는 버틸 수 없게 된 청나라 정부는 화친을 줄곧 주장해온 이홍장에 강화협상의 전권을 부여한 것이다.

이홍장은 자신의 아들 이경방(李經方)과 미국인 고문 포츠담 등 100여 명의 수행원과 함께 일본을 방문, 3월20일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외상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와 협상을 시작했다. 30일 정전협정을 체결하였으며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였다,

청나라 측은 휴전조약을 우선 체결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일본 측이 응하지 않고 강화조건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협상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이홍장이 숙소 근처에서 저격되어 부상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 측은 구미열강의 비난이 두려워 이홍장의 요구대로 휴전조약을 먼저 체결하고 잇달아 11개조로 된 청일강화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그 내용은, 청나라는

① 조선이 독립국임을 승인하고
② 랴오둥(遼東)반도,·펑후(澎湖)열도와 대만을 할양하며
③ 2억 냥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④ 청나라 내의 쑤저우(蘇州),항저우(杭州), 충칭(重慶), 사스(沙市)를 개시(開市)하며, 개시,개항지에서 일본인의 상공업활동을 승인하고
⑤ 청일 통상항해조약을 새로이 구미열강과 같은 조건으로 맺고, 일본의 치외법권, 편무적 협정관세율을 승인한다는 것이었다.

조인 직후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이른바 3국간섭이 시작되자, 일본은 랴오둥 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였다. 강화조약의 비준서교환은 청나라 측의 연기 요청을 거부하고 5월8일 이루어졌다.

이 조약은 한반도 장악을 위한 주변 열강의 경쟁에서 중국이 탈락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나라 역사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 형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북한 당국의 지시를 받은 베트남 여성과 인도네시아 여성에 의해 독극물로 암살됐다(2017년).

이들 2명의 여성 실행요원은 액체 독극물 VX를 김정남 안면에 문질렀고 김정남은 공항 의무실로 옮겨졌으나 곧바로 숨졌다.

김정남은 김정은과의 후계 경쟁에서 밀려난 뒤 북한에서 출국, 중국의 보호 아래 가족과 함께 마카오에 거주하면서 말레이시아 등 외국을 넘나들며 생활했다.

말레이시아 수사 당국은 김정남 암살에 북한 당국의 관여가 있었다고 발표했으며 우리 국정원은 북한이 김정남 암살에 대해 '언제라도 실행할 수 있는 명령(standing order)'를 내린 상태였다고 밝혔다.

말레이시아와 북한은 김정남 암살 사건으로 긴장 관계가 빚어졌다. 그러나 결국 말레이시아 정부는 자국민 보호 원칙에 따라 암살 관여 혐의를 받는 주말레이시아 북한 대사관원과 고려항공 직원 등 2명을 북한 주재 말레이시아 대사관 외교관 및 가족 등 9명과 맞교환 하였다. 아울러 김정남의 시신도 같은 해 3월30일 북한에 인도했다.

말레이시아는 평양 말레이시아 대사관을 폐쇄하고 베이징에서 북한 관련 외교 업무를 수행하도록 조치했다.

이로써 김정남 암살의 전모는 암살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에 넘겨진 두 여성 실행범의 바로 윗선에서 끊어져 미궁에 빠지게 되었다.

한편 김정남의 장남 김한솔 등 김정남 가족은 서방국과 반북한 단체의 도움으로 마카오에서 빠져나와 서방 모처로 안전하게 피신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8/02/13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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