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2/21 14:37



[今天歷史-2월14일]중소우호조약..아주 대단히 비싼 점심

마오쩌둥과 공산중국으로서는 1950년 2월의 중소 우호동맹 상호원조조약은 결코 '공짜 점심'이 아니었다. 후에 지불하게 되는 인적, 물적 그리고 심리적 비용이 천문학적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트위터 화법을 빌리면 '아주 아주, 대단히 대단히 비싼 점심'이라고 표현할 만하다.

현재 지린성, 랴오닝성 그리고 헤이룽장성 등은 허베이성이나 광둥성처럼 중국 영토이다. 하지만 동북 3성으로 통칭되는 '과거 만주' 지역은 1950년 당시만 해도 위상이 불안정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중국 대륙을 중국으로 통칭하기보다는 '지나(支那)', 만주(滿洲)', '몽고(蒙古)' 등으로 나누어 불렀다.

'지나'는 '차이나(China)'의 음사로 중국을 첫 통일한 진나라의 진시황이 건설한 만리장성 이내와 그 바깥 지역을 각각 별개의 역사, 문화 공동체로 규정한 것이다.

이는 중원을 중심으로 하여 그 외곽 지역을 느슨한 역사 공동체로 인식한 중국의 천하관에 대한 도전이자 위협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는 1932년~ 1945년까지 만주국이라는 괴뢰국가를 만들어 자신들의 중국 대륙과 그 주변 지역에 대한 역사와 미래의 바람 컨셉을 밀어붙여 기정사실로 공고화하려 했다.

소련은 일본 제국주의 패망 뒤 만주 지역에 대한 제정 러시아가 청나라 때부터 차근차근 구축해온 재국주의적 이권을 회복하여 유지하려 했다.

미국도 청말~국민정부 기간에 문호개방 정책을 추진하며 나름
만주에 대한 이권을 확보했다. 미국은 이 때문에 소련이 만주에 대한 이해 관계를 독점하는데 불만을 품고 있었다.

마오쩌둥이 중국 대륙을 석권한 뒤 소련을 찾았을 떼 그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 정도가 아니라 ' 문안(門內) 박대'의 존재였다.

스탈린은 국공내전 때 막대한 무기와 물적 지원을 했으니 소련은 만주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군림'할 권리가 있으며 따라서 거래는 끝난 셈이라는 태도였다.

1950년 1월 미국이 중국의 1949년 체제를 인정한 기초 아래 만주를 의식하며 마오의 중국을 유고화 하려는 '애치슨 라인'이 발표되자 스탈린의 자세는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하듯 확 바뀌었고 그 결과는 소련의 대폭 양보와 마오의 기대하지 못할 정도의 소득으로 요약되는 중소 우호동맹 상호원조 조약이었다.

스탈린은 소련의 자세에 안심한 마오가 소련 일변도 정책을 펴게 만드는 동시에 김일성에게 남침을 허용하는 이중 플레이를 통해 중국이 미국과 맞붙을 수밖에 없는 외통수 길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스탈린은 1953년 죽을 때까지 미국과 중국이 임명과 물자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에서 벗어날 수 없게 유도했다.

미국과 중국 간 갈등의 골은 깊어질대로 깊어졌다. 스탈린이 죽은 뒤에도 스탈린 효과는 지속됐다. 마오의 중국은 국제 무대에서 고립될 수 밖에 없었다.'죽은 스탈린이 산 마오를 가둔 격'이었다.

마오로서는 '아주 아주 비싼 점심'이란 표현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주 아주, 대단히 대단히 비싼'이란 수식 표현 정도가 되어야 걸맞다. <스위프트-버크왈드>ㄲ

중공군 북한서 철군, 蘇 20차 당대회, 안중근 의사에 사형 선고

1950년 2월14일 ‘중소 우호동맹 상호원조조약’이 모스크바에서 체결되었다.

1949년 10월1일 베이징(北京)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마오쩌둥(毛澤東)은 같은 해 12월 소련과 새로운 조약 체결을 위해 소련을 방문했다.

중국과 소련 간에는 일본이 항복선언을 하기 하루 전인 1945년 8월 14일 체결한 ‘중소우호동맹조약’이 있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1949년 말 대만섬으로 패퇴한 국민정부가 체결한 것이었다.

‘1945년 중소우호동맹조약’도 모스크바에서 체결됐다. 그것은 얄타 협정에 따라 중·소 양국이 대일(對日)전쟁에 승리할 때까지 상호원조, 단독 불휴전 및 불강화(不講和)를 약속하고 일본의 재침략 방지에 대한 보장 등을 다짐한 조약이었다.

조약은 중국과 소련 간 우호관계를 토대로 맺은 것이 아니라 미국 루스벨트, 영국 처칠 그리고 소련 스탈린이 얄타회담(1945. 2.4~1945. 2.11)에서 합의된 소련의 대일전(對日戰) 참가와 그 조건에 대해 중국의 승인을 얻기 위하여 미국의 중재 아래 일본의 항복 전날에 정식조약으로 성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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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비정상적 배경 하에서 체결한 조약을 통해 소련은 중국의 동북(東北)지방, 즉 만주가 반소(反蘇) 기지화하는 것을 제약하는 일정한 법적 보장을 받았다.

이 같은 법적 보장은 마오의 눈으로 볼 때는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유산을 소련이 승계한 것이기 때문에 대륙을 장악한 뒤 최우선 과제로 소련과의 새로운 조약 체결을 서둘렀던 것이다.

마오가 12월 모스크바에 도착했으나 소련이 차일피일 미루는 바람에 협상은 해를 바꾼 1950년 1월20일 시작됐다.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중국에서 날아 와 협상에 참여했다. 중국 공산당 기록에는 마오쩌둥이 1949년 말과 1950년 초에 소련을 방문했다고 밝히고 있어 소련이 회담에 응하지 않자 그는 일단 중국으로 되돌아 갔다가 다시 소련에 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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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에 온 마오를 노골적으로 홀대하던 소련이 뒤늦게 1950년 1월20일부터 회담 논의를 시작한 것은 그보다 8일 전인 1950년 1월12일 미국의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미국신문기자협회에서 행한‘아시아에서 위기’라는 연설에서 이른바‘애치슨 라인’을 언급한 것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애치슨은 태평양에서 미국의 방위선을 알류샨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정한다고 하였다.

즉 방위선 밖에 있는 한국과 대만 등의 안보와 관련된 군사적 공격에 대해 보장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애치슨은 이 발언으로 6개월 뒤 일어난 한국전쟁을 유발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겨냥한 목표는 다른 데 있었다. 그 것은 ‘마오의 농민정권’을 유고화하자는 것이었다.

‘애치슨 라인’이 미국의 대아시아 군사전략이었던‘도서방위선(島嶼防衛線) 전략’을 재확인하면서도 섬인 대만을 방위선 밖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도는 누가 보아도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었다.

1949년 8월 5일 중국백서(白鼠)'를 통해 국민정부의 국공내전 패배가 국민당과 국부군의 부패와 무능 때문이라고 규정한 미국 민주당의 트루먼 행정부는 '애치슨 라인' 선포로 대만으로 쫓겨난 국민정부를 더는 지원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는 중국 대륙의 새주인을 인정하고 악수를 먼저 공개적으로 내미는 것이었다.

이보다 일주일 앞선 1950년 1월5일 영국은 서방국 최초로 공산 중국을 승인했다. 홍콩 식민지를 유지하는데 1차적 목적이 있었으나 세계 전략적으로 미국의 힘을 유럽으로 집중시키자는 꾐수였다. 미국은 이를 덥석 받은 것이다.

이런 국제정세 하에서 체결되었기에 마오쩌둥을 카운터파트로 한 중소 상호원조 조약은 소련의 양보가 두드러진다.

조약은 전문(前文)과 6개조의 본조약 및 2개의 부속협정·교환각서로 이루어져 있는데 소련은 중국에서 특권을 포기하는데 동의하고 부속협정에서 1952년 이전까지 창춘(長春) 철도의 일체 권리와 재산을 무상으로 중국에 넘겨주기로 약속했다.

또 뤼순(旅順)에 주둔하던 소련군이 철수하고 다롄(大連)항도 반환하기로 했다. 이러한 특권이 바로 소련이 대일전 참전 대가로 미국의 적극적 지지 아래 국민정부로부터 얻어낸 것이었다.

뤼순과 다롄의 1945년 이후 시설물의 건축 비용은 중국 정부가 상환하기로 했으나 소련은 연 1%의 싼 이자로 3억 달러의 차관을 중국에 제공하기로 했다.

한편 본조약에서는 제국주의 침략을 방지하여 동북아와 세계 평화를 공고히 하는데 협력하기로 하고 경제문화 상호 협력관계를 강화하자는 내용을 담았다.

소련은 미국의‘중국 유고화’ 전략을 분쇄하기 위해 제국주의적 특권을 과감하게 포기한 것이며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조약은 마오가 장에 비해 더 민족주의적이라는 주장의 논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이후 장제스가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치외법권 등 식민주의적 특권 포기를 얻어낸 사실을 상기하면 장은 해양세력으로부터 제국주의 특권의 포기를 얻어내고 마오는 대륙세력으로부터 제국주의 특권 포기를 얻어내는 역사적 역할 분담을 하였다는 평가도 내릴 수 있다.

장과 마오는 국제정세 속에서 어부지리를 얻어냈다는점에서는 동일하다.

조약 체결 후 마오쩌둥의 티토화 전략을 주도하던 이른바 미국 국무부 내 '스틸웰 그룹‘의 발언권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스틸웰 그룹'은 2차대전 당시 중국 파견 사령관으로 중국 공산당에 호의적이라는 이유로 장제스(蔣介石)의 요청에 따라 1944년 파면당한 조셉 스틸웰 장군과 의견을 같이 하는 미국 행정부 관리들, 특히 국무부 내 관리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여전히‘마오의 티토화’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스탈린은 한반도에 친소 통일정권을 수립, 중국을 견제하자는 전략적 고려에 따라 김일성의 대남 전면적 침공 계획을 승인해 6.25가 발발하게 됐다.

6.25 발발로 미국의‘마오 티토화’전략은 완전히 폐기되었다.

마오의 중국과 소련을 갈라서게 하기 위해 '애치슨 라인'이란 승부수를 던지자 '한국전 도발'이라는 역풍을 맞은 것이다.

스탈린의 속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미국은 중국과 소련이 북한을 앞세워 남침시킨 것은 궁극적으로 한반도를 발판으로 하여 일본 열도를 노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국이 한국전 개입을 통해 불과 반년 전 선포한 '애치슨 라인'너머로 전진방어 조치를 취한 것은 이러한 상황 인식에서 비롯됐다.

대만으로 쫓겨간 장제스는 마오 버전의 중소상호원조조약이 체결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자신 버전의 중소조약을 공식 폐기하지 않았다.

장은 대륙 반공의 기회가 찾아올 때 소련이 국공내전 후반기 미국이 했던 역할, 즉 동맹국의 등을 돌리는 행동을 기대하며 이를 유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전에 공산중국이 개입, 냉전이 공고화하면서 이럴 가능성이 사라지자 장제스는 총통령으로 이의 폐기를 공식화하였다. 1953년 2월25일이다.

이와는 달리 '애치슨 노선'은 '사화산'이 되지 않고 '휴화산'으로 동면했다. 1972년 2월 말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계기로 '휴화산'은 활동을 시작했다.

1950년 4월11일 발효된 중소 우호동맹 상호원조 조약은 유효 기간을 30년으로 하였다. 체약국 중 한 나라가 조약 만료 1년 전까지 폐지를 제기하지 않으면 기한을 5년간 연장하기로 하였다.

조약 만료 1년 8일 전인 1979년 4월3일 개최된 중국 5기 전인대 상무위원회 7차회의는 "국제정세의 중대한 변화에 따라 이 조약을 만기 이후 연장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고 조약 폐기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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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2월 14일 = 중국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대표단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했다.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중국과 북한은 모든 외국 군대의 철군을 제안했으나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1958년 2월5일 북한은 또다시 남북한으로부터 외국군대의 전면 철군을 요구했으며 중국은 북한의 주장에 동의하는 형식을 빌려 북한과 철군협상에 들어갈 것임을 밝혔다.

저우언라이의 북한 방문은 이 협상을 위한 것이었다. 중국은 1958년 이전에 이미 3차에 걸쳐 한반도에서 외국 군대가 전면 철군할 것을 제의한 바 있다.

저우언라이 북한 도착 6일 뒤인 20일 북한 주둔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부는 이해 말 이전 북한에 주둔한 중국군을 모두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중국군 철수는 이해 3월15일 시작, 이해 10월 26일에 완료했다.


[今天歷史-10월 26일] 朴正熙암살과 한국 핵 개발 중단, 중국군 북한철수, 李四光


1956년= 소련 공산당 20차 전당대회가 모스크바에서 개막되었다. 당 대회 마지막 날인 2월25일 당시 소련공산당 제1서기였던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비밀특별보고 회의에서‘개인숭배 및 그 결과’라는 제목의 스탈린 비판 연설을 했다.

이 보고에서 흐루시초프는 3년 전인 1953년 3월 사망한 스탈린은 1930년대의 대숙청으로 많은 무고한 사람이 희생시켰고, 자기에 대한 개인숭배를 조장했으며 대독일전 서전(緖戰)에서 소련에 큰 손해를 입게 했다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비밀보고를 수개월 뒤 미국 국무부가 공표함으로써 큰 파문을 일으켰다.

▶ 중국은‘중소 이념분쟁'의 상대방인 흐루시초프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다. 캐리커처는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역사상의 오늘(歷史上的今天)’에 실린 것이다.

폴란드·헝가리 등 동유럽에서는 반소폭동의 계기가 되었고 중국에서는 스탈린을 옹호하는 소리가 높아져 중소 이념분쟁으로 발전했다.

북한에선 김일성이 중소대립 구도를 이용, 독자 노선을 추구하고 권력을 강화하는 전기를 제공해 주었다. 이는 1973년 이후 ‘주체사상’으로 이론화하였다.

소련에서도 V.M.몰로토프·G.M.말렌코프 등이 1957년 6월 흐루시초프를 추방하려다 반당그룹으로 몰려 자신들이 도리어 축출됐다.

1961년 10월 제22차 당대회에서는 스탈린의 유해를 레닌묘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하였으나 1964년 10월 흐루시초프가 실각한 뒤 스탈린 비판이 잠잠해졌고, 1986년 2∼3월 제27차 당대회에서도 흐루시초프 비판과 함께(스탈린의) 이름을 거론치 않은 비판으로 정리됐다.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은 공산주의의 문제점에 대해 생각할 기회와 동서 양진영이 냉전에서 평화공존을 추구하게 하였다.

또 각국 공산주의자의 자주적 사고와 행동을 촉진시켰다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

중국 뤼순의 일본 재판소에서 안중근 의사에 대해 사형 선고를 내렸다(1910).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26일 중국 하얼빈에서 러시아 재무 장관과 만나기 위해 그곳을 방문한 전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사살했다.

안 의사는 재판정에서 이토는 대한제국의 주권을 침탈했을 뿐만 아니라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기 때문에 대한제국 의병 장군으로서 그를 처단했다고 의거 동기를 밝혔다.

안 의사는 사형 선고가 있은 이해 3월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안 의사가 거사한 하얼빈은 러시아가 관할하던 지역이었고 재판받고 순국한 뤼순은 일본의 관할 지역이었다. 당시 중국이 반식민 상태였음을 보여준다.

안의사는 1879년생으로 순국 당시 나이는 31세였다. 동향(황해도)의 김구 선생보다 3세 연하였고 역시 동향인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4살 아래였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바로 그해 8월 말 대한제국은 일본에 강제 병탄됐다.

2018/02/14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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