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10/21 08:42



시진핑 국가주석 유임...왕치산 국가부주석에

중국 제13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1차회의는 17일 시진핑(習近平‧64) 국가주석을 유임시키고 왕치산(王岐山‧69) 전 당정치국 상무위원을 국가부주석으로 선출했다.

전인대는 이날 전체회의에서 중앙위원도 아닌 평당원 왕치산을 시진핑 국가주석의 유고시 대행할 수 있는 국가부주석으로 뽑았다.

선임 표결에서는 전인대 대표 2970명 가운데 반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찬성표를 던졌다.

시 주석은 국가주석과 국가중앙 군사위 주석 투표에서 반대와 기권 없이 만장일치로 연임했다.

선임 투표 후 시 주석과 왕 부주석은 "헌법에 충성을 다하고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 건설을 위해 노력한다"고 선서했다.

또한 전체회의는 전인대 상무위원장에는 당 서열 3위인 리잔수(栗戰書) 정치국 상무위원을 만장일치로 선임했다.

왕치산은 시진핑 집권 1기 시절 부패척결을 주도하면서 저우융캉(周永康) 전 정치국 상무위원, 링지화(令計劃) 전 당중앙 통전부장 등 정적세력을 차례로 일소해 시진핑 권력기반을 다지게 한 일등공신이다.

위기관리 능력과 정책 실행력이 중국 지도자 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국가부주석은 국가주석을 보좌하는 직책으로 주석 유고 시에는 국가원수 권한을 대신해 행사한다.

왕치산은 최고 권력기관 당 정치국 상무위를 떠났지만 앞으로도 대미외교와 금융, 반부패 등 폭넓은 분야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발휘할 전망이다.

지난 11월 전인대가 국가주석과 국가부주석의 2기 10년 연임 제한을 철폐하는 헌법 개정안을 채택함으로써 시진핑-왕치산 체제는 사실상 장기집권이 가능해졌다.

산둥성 칭다오(靑島)에서 태어난 왕치산은 고위 기술간부인 아버지를 두었으며 청소년 시기를 문화대혁명 와중에서 보내고 1969년에는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에 지식청년(知靑)으로서 하방됐다.

1973년 시안(西安) 시베이(西北) 역사학부 역사학 전공에 입학해 1976년 졸업하고 산시성 박물관에 들어갔다.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역사 연구소 연구원이던 왕치산은 1978년 개혁개방 정책이 시작한 후 직접 쓴 경제 관련 논문이 중앙의 눈에 띠면서 베이징으로 상경, 당중앙 서기처 농촌정책연구실에서 경제 간부로 발을 내디뎠다.

농촌문제 전문가로 실력을 인정받은 왕치산은 은행계로 자리를 옮겼다. 중국농촌식탄투자공사 총경리를 거쳐 1989년 중국건설은행 부행장을 역임했다.

왕치산은 1993년 중국인민은행 부행장,1994년 중국건설은행 행장에 취임했고 1995년 8월에는 중국 최초 투자은행 중국국제금융공사 회장을 겸임했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가 발발하자 당시 주룽지(朱鎔基) 총리의 낙점을 받고 광둥성으로 달려가 부성장으로서 금융위기를 원만히 처리했다.

이후 2000년 국무원 경제체제 개혁연구실 주임, 2002년 11월 하이난성 당서기를 맡았다.

2003년에는 사스(중증호흡기증후군) 창궐로 혼란에 빠진 베이징의 시장 대리로서 사태를 수습했으며 2004년 2월 정식 시장에 취임해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준비를 진두 지휘했다.

2007년 10월 열린 제17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위원으로 뽑힌 왕치산은 다음해 3월 전인대에서 부총리에 임명돼 상무, 금융, 시장관리, 관광 등을 관장했다.

왕치산은 2008년 경제금융 담당 부총리에 재임하면서 리먼 브러더스 충격에 대응해 4조 위안에 달하는 대규모 재정출동을 주도, 이를 극복했으며 대미 경제협상에서도 능력을 떨쳐보였다.

덩샤오핑(鄧小平) 시대에 보수파 장로이던 야오이린(姚依林) 부총리의 사위로 시 주석과는 같은 태자당(太子黨) 출신이기도 하다.

한편 전인대는 이날 환경보호 정책을 강화하기 위한 자연자원부와 생태환경부 신설하고 중복 기능을 가진 부서를 통폐합하는 대규모 국무원 기구 개편안을 찬성 다수로 가결했다.

2018/03/17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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