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4/27 06:20



[今天歷史-3월22일]린뱌오 毛 암살 계획...장군과 이발사

서양 우화 이야기다. '세빌리야의 이발사'와 '피가로의 결혼' 모태 이야기라고도 들은적이 있는 것 같은데 정확하지는 않다.

성격이 괄괄하고 급하기로 악명 높은 한 장군이 이발소에 들어서 "만일 면도 하다가 조그마한 상처라도 나면 그 이발사의 목을 베겠다"고 말했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느냐고 생각했겠지만 워낙 장군 성격을 잘 아는지라 어느 누구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이때 한 이발사가 나섰다. 그 이발사는 모두가 숨 죽이고 있는 가운데 이발과 면도를 무사히 마쳤다.

거울을 들여다 본 장군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잘했군. 자네 실수하면 목을 베겠다고 말했는데도 하나도 떨지 않고 이처럼 잘 할 수 있었나. 아주 맘에 드는군"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이발사가 "떨긴 뭘요. 상처를 낸 즉시 목의 동맥을 끊어 버릴 생각이었죠"라고 대답했다.

다음부터 장군은 어떤 이발사 앞에서도 '순한 양'이 되었다고 한다.

1971년 마오쩌둥은 '장군'이었고 린뱌오는 '이발사'였다. '장군'은 소련과 미국 사이에서 코페르니쿠스적 변화의 전략적 스윙을 모색하고 있었다.

'천동설의 이발사'는 '장군'이 '지동설'을 받아들이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적의를 느꼈다.

문화대혁명을 통해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 당권파로부터 권력을탈취하는데 성공한 마오쩌둥은 이제 '날랜 개(走狗)'의 용도가 끝났다고 판단, '가마 솥'의 물을 덥히고 있는 중 이었다.

자신을 의심하는 손님을 초대하려면 '무서운 개'는 치워 두어야 마땅했다.

'장군'은 이발이 끝날 때까지 조그만 상처가 날 것으로 기대했고 혹 없더라도 '주름'을 '면도에 벤 상처'라고 몰아부치면 될 일이었다.

장군은 그러나 세 가지 점에서 치명적 잘못을 범했다.

사람의 한길 속은 모른다는 사실을 간과했고 '이발사'가 자신의 경동맥 살깥 위에 아주 잘 드는 시퍼런 면도칼을 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수염을 깨끗이 미는데 필수적인 이 칼은 경동맥을 순식간에 끊는데도 아주 손쉬운 도구가 될 수 있다.

세 번째의 실수는 개에게도 주인을 무는 경우가 있듯이 사람도 죽음에 몰리다 보면 개가 된다는 사실을 간과한 점이다.

마오는 린뱌오의 쿠데타 음모를 알고나서 아마도 자신이 자객 형가에게 가까이 접근하도록 허용한 진시황의 실수를 범했다는 사실을 절감했을 것이다.

형가의 실수로 진시황이 목숨을 구했듯이 마오쩌둥도 천행으로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장군'은 '이발사'를 주의해야 한다. 자신의 면도를 위해 시퍼런 칼을 경동맥 피부까지 댈 수 있도록 허가받은 이들은 모두 어느 순간 '살인자'가 될 수도 있다.

'장군과 이발사' 이야기는 갑의 겸손과 을의 방어무기 등을 일깨운 해피엔딩 스토리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는 우화 프레임의 상황이 참혹한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서양에서는 카이사르와 부르터스, 중국에서는 삼국연의 속 위연과 마대,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나가와 아케치 미스히데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박정희와 김재규가 있다.

'장군과 이발사' 프레임의 현실 상황은 곳곳에서 아직 결말이 끝나지 않은 가운데 현재 진행형이다.<스위프트-버크왈드> 은

물의 날, 賀龍

1971년 3월22일 린뱌오(林彪)와 예췬(葉群) 부부의 지시에 따라 상하이(上海)에서 린뱌오의 아들 린리궈(林立果)와 저우위치(周宇馳) 등이 마오쩌둥(毛澤東) 암살을 목표로 한 쿠데타 계획을 작성하였다.

문화대혁명을 군사적으로 지원한 공을 인정받아 마오쩌둥의 후계자의 위치에 오른 린뱌오는 바로 그때부터 마오의 견제를 받았고 미국과 화해 시도 등 중요 정책 결정 과정에서 소외되자 위기의식을 갖고 급기야 쿠데타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무장폭동을 의미하는‘무장기의(武裝起義)’의 '무기의(武起義 : 우치이)'와 발음이 같은‘571’을 작전명으로 삼아 이 작전계획을 '571 공정기요(工程紀要)'라고 명명했다.

쿠데타 계획은 군사천재인 린뱌오의 전술개념이 농축되어 있다. 이 계획은 군사적인 선제공격으로 상대를 제압하여야 한다며 준비가 되어 있건 되어 있지 않건 간에 ‘가마솥을 깨트리고 배를 침몰시켜야 한다(破釜沈船)’는 점을 강조했다.

계획은 고위 정치집회를 공격하여 일망타진하거나 폭파, 차량사고, 암살, 납치, 도시유격전 등의 방식을 통해 마오쩌둥을 암살하고 군사정변을 일으켜 전국 정권을 수립하거나 혹은 할거 상황을 만들어 궁극적으로 린뱌오의 천하를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린뱌오의 건곤일척 작전계획은 실행되기 전 누설되는 바람에 결국 실패했다. 밀고자는 다름 아닌 린뱌오의 딸 린리헝(林立衡)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린리헝을 제외한 린뱌오 일가족은 이해 9월 국외 탈출을 시도하다 탑승기가 몽골 상공에서 의문의 추락을 하는 바람에 모두 사망했다.

[今天歷史-9월12일] 당주석제 폐지, 林彪사망, 랴오선 전투

2006년 문혁 발동 40주년을 맞아 당시 59세에 이른 린리헝은 베이징 고급호텔의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있는 근황이 소개되었다.

린리헝은 린뱌오 탈출사건 이후 2년간 격리 조사를 받았으나 덩샤오핑(鄧小平)이 복귀한 뒤에야 사회생활을 재개할 수 있었다.

린리헝은‘대의멸친(大義滅親: 대의를 위해 가족간 정도 끊음)’했다는 평가를 받고 공산당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1966년 문화혁명 발동 당시 19세로 홍위병 활동에 적극적이던 린리헝은 결정적 순간‘린뱌오의 딸’이 아닌‘문혁의 딸’을 선택한 것이다.

마오의 인간 개조 노력은 결국 실패했지만 자신의 목숨을 구하 데는 성공한 것이다.

린리헝이 사장으로 있었던 호텔은 베이징 싱푸(幸福)거리에 있는 황허(黃鶴)호텔이다.

린뱌오는 마오의 토사구팽 칼끝이 후계자 전임인 류사오치와 류등 실권파를 쓰러뜨리는 주역 문혁 청년 3걸을 거쳐 자신을 겨냥하는 사실을 재빠르게 판단하고 주인이 방심하는 틈을 타 주인의 목을 물어 뜯으려 하였으나 결국 삶아 죽이는 꼴을 당한 셈이다.

마오는 한 고조가 항우를 쓰러뜨리는데 1등공신인 한신을 부인 여후에 의해 차도살인한 것처럼 자신의 부인 장칭 등이 포함된 4인방에 의해 린표의 제거를 기다리는 여유를 부리다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기습을 받을 뻔 했던 것이다.

그는 린뱌오 사망 5년 뒤에 죽는데 천운이 작용하여 용케 피한 린뱌오의 쿠데타 기도에 충격 받은 것도 그의 죽음을 앞당기는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오는 린뱌오의 쿠데타 계획을 보고 받고 괄목상대와 함께 등골이 오싹했을 것이다.

그동안 치열한 수다한 파워게임에서 자신의 승리를 최종적으로 결정지은 회심의 수가 카운트다운이 진행 중이던 '571 공정'에 고루고루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선수 빼앗기', 좌고우면하지 않는 '참수 작전', 상대의 '외곽 때리기'에 '중앙 돌파'로 응수 등.

당시 마오는 린뱌오라는 '대마'를 잡기 위해 호위무사 4인방을 내세워 외곽에서 전투에 몰입하도록 유도했다.

그는 최후의 수를 궁리하며 린뱌오가 기진맥진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린뱌오는 외곽에서 손을 빼 중앙돌파 작전을 전개했다. 국면 전환의 선수 빼앗기다.

그리고 린뱌오의 작전 개념은 '참수'였다. 마오로서는 5년 전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말로 류사오치라는 과녁을 정조준하면서 혼돈스런 판세를 일거에 뒤집었다.

마오는 5년 뒤 자신이 '류사오치'이고 린뱌오가 '마오'라는 린뱌오의 판세 구상을 읽었을 것이다.

사마중달이 제갈공명을 물리칠 수 있엇던 것은 전략 상으로 우월해서가 아니라 하늘의 뜻 때문이었다.

워털루 회전에서 나폴레옹의 패배도 전략상 실패가 아니라 천운이 웰링턴에게 기울어져서였다.

마오도 천운이 작용했다는 점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 게임의 '아르마다' 를 자부한 마오의 충격은 그의 수명을 단축할 정도로 심대했다.

린뱌오식 건곤일척은 41년 뒤인 2012년 정치적으로 벼랑 끝에 몰린 보시라이에 의해 재연될 조짐을 보였으나 중앙 권력에 사전 차단되었다.

토사구팽과 건곤일척의 배반 승부수라는 양상의 최고 권력투쟁 패턴은 '윤회'한다. 서해 서편쪽에서도 동편쪽에서도.

1993년 = 제47차 유엔총회에서 193호 결의에 의해‘물의 날’이 제정되었다.

중국은 이후 매년 '물의 날'을 의미있게 기념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이‘물의 빈국(貧國)’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중국 수자원 총량은 2조8000억 입방미터로 세계 제6위이지만 일인당 점유량은 세계 88위에 불과하다.

중국 수자원 보고는 티베트다. 중국이 티베트의 독립은 말할 것도 없고 자치 마저 허용할 수 없는 사실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는 자원 보고로 티베트와 같은 이유에서 분리를 도저히 허용할 수 없다.

1896년 3월 22일 중국 10대 원수 중 한 명인 허룽(賀龍)이 태어났다.

마오쩌둥(毛澤東)과 같은 후난(湖南)성 출신-쌍즈현(桑植縣)-인 허룽은 반청 민간 비밀결사 조직인 가로회(哥老會)회원이었으며 손문(孫文 : 쑨원)이 지도하는 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에 가입하였다.

허룽은 1927년 북벌군에 참여하여 많은 군공을 세운‘북벌 명장(北伐名將)’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북벌 과정 중에 승진을 거듭하여 국민혁명군 제20군 군장(軍長)이 되었다.

1927년 4월 12일 장제스(蔣介石)의 상하이(上海) 반공 쿠데타로 1차 국공합작이 와해되자 허룽은 자신이 지휘하는 국민혁명군 20군을 이끌고 이해 8월1일 난창(南昌)폭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공산당 장시(江西) 소비에트에 대한 국민당군의 5차례에 걸친 포위공격과 장정 과정에서 홍군의 주요 지휘관이 되었으며 2차 내전 종전 후 국공내전 말기 인민해방군 개편에서 제1야전사사령원이 되었다.

공산정권 수립 이후 1954년 부총리, 1955년 10대 원수, 1959∼65년 국방위원회 부주석을 지냈다. 1965년 체육위원회 부주임이 되었으나 문화대혁명 중인 이듬해 비판을 받고 1967년 실각되었다.

1969년 베이징(北京)에서 옥사하였으나 문화대혁명 기간 중인 1974년 명예가 회복되었다.

2018/03/22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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