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7/21 23:31



[今天歷史-3월23일]개혁개방서 중대실책...덩샤오핑 知彼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천안문 민주화 학생 시위 시작 23일 전 덩샤오핑의 중국공산당 입장에서 상황 파악은 정확했다.

그는 우간다 정상과 대담 자리에서 개혁과 개방 과정에서 가장 큰 잘못은 교육 부문에서 있었다고 밝혔다.

덩샤오핑은 인민과 당원사이에서 간고분투의 정신이 사라졌다는 지적도 했다.

이 말은 그해 4월15일 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갑작스런 사망을 계기로 봇물 터지듯 뿜어나온 대학생들의 민주화요구와 여기에서 비롯한 공산당의 분열 등 정국 혼돈에 대한 판단의 나침반이 된 인식이자 그가 선택한 해법에 대한 예고였다.

천안문 광장에 '민주의 여신상'을 세운 학생과 이들에 '호응'하는 자오쯔양을 비롯한 당 지도부 일부와 추종 당원은 '간고분투'를 통해 수립한 공산중국의 뿌리를 흔드는 세력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인식에 바탕한 해법은 당연히 탄압과 분쇄였다. 그리고 방식은 '죽느냐 사느냐'의 궁극적 해결책이었다. 유혈 불사였다.

우간다 대통령과 면담에서 덩의 발언은 적어도 '공산 중국'을 위태로움에서 구해내는 지피(知彼)의 인식이었다.

공산 소련이 해체되어 비공산 러시아로 바뀌고 공산 동구권이 사라진 오늘의 시점에서 되돌이켜 보면 더욱 그러하다.

물론 자유와 민주주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전혀 다른 입장에 서지만 말이다. <스위프트-버크왈드>

티베트 독립 무장봉기에 중국군 라싸 군사점령, 덩샤오핑 "식량과 철 중시 관념에서 벗어나야", 대만 입법원 2.28 보상 임시 조례 제정, 리덩후이 대만 첫 직선 총통 선출, 위안스카이 홍헌 연호 폐지로 제정 포기

1989년 3월23일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 주석 덩샤오핑은 인민대회당에서 중국을 방문한 우간다 대통령과 만나 10년간 개혁 기간 중에 범한 가장 중대한 실책은 교육 방면의 발전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민생활 수준을 발전시키고 향상시키는 가운데 인민과 당원에게 간고분투(艱苦奮鬪)의 전통을 알리지 못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간고분투'란 용어는 마오쩌둥이 즐겨 애용하던 단어다.

덩샤오핑은 냉정하게 살펴볼 때 이 문제는 인플레보다도 더 심각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상이 통일되어져 있어야만이 다스리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개혁정책의 성과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피력했다.

덩샤오핑은 노선, 방침, 정책은 정확했다고 밝혔다. 다만 경험이 없어 큰 착오는 없었지만 작은 착오까지 막지는 못했다고 시인했다.

덩샤오핑은 교육부문에서 착오가 심각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바로 한달도 못간 4월15일 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죽음을 계기로 터진 천안문 민주화 시위로 분출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1979년 3월21일부터 23일까지 중공 중앙정치국이 국민경제 조정 문제에 관한 회의를 가졌다.

천윈(陳雲)은 외국자본과 외국기술을 충분하게 이용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후에 덩샤오핑과 경제 개혁과 개방의 속도와 방향을 놓고 첨예하개 대립하게 되는 천윈은 이때만 해도 덩과 일치하는 입자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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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덩샤오핑(鄧小平)은 이 회의 연설에서 특유의 화법을 구사했다.

그는 현재의 중심 임무가 조정이라고 전제한 뒤 결단이 필요하며 이리 두리번 저리 두리번 하는 것은 옳지 않다(東照顧 西照顧 不行)고 말했다.

덩샤오핑은 이어 식량과 철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과거의 관념은 끝낼 때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 국가의 공업수준은 강철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므로 강철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어야 하며 다른 기준을 갖고 경제를 운용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농업 경우에도 단지 식량만을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농업, 임업, 목축업, 그리고 양어가 모두 중시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회의는 3년 동안 국민경제를 조정하기로 결정하였다.

1959년 = 중국군 티베트 라싸를 함락, 대규모 진압작전을 실시.

1995년 = 대만 입법원 ‘2.28 사건 처리 및 보상조례’ 제정.

1996년 = 대만 첫 총통 직선에서 국민당 리덩후이(李登輝) 총통 후보와 롄잔(連戰) 부총통 후보가 54%의 득표율로 제 9대 정부총통에 당선되었다.

1916년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이해 1월 제정을 선포하면서 사용하기로 한 연호 홍헌(洪憲)을 폐지하였다. 이에 따라 1916년은 민국 5년으로 다시 환원되어 호칭하게 되었다.

거센 제정 반대 운동과 열강의 압력으로 제정을 포기한 위안스카이는 실의에 빠져 병상에 눕게되었고 결국 이해 6월6일 전국적으로 위안스카이 반대 운동이 격화화는 가운데 향년 57세로 사망했다.

2018/03/23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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