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7/21 23:31



[今天歷史-3월24일] 맥아더 한국전 中확대 성명

...'금수저 장군'과 '흑수저 대통령'

1951년 3월 말 한국전쟁의 전선은 발발 때의 상황인 9개월 전 1950년 6월 상황으로 되돌아 갔다.

밀리고 미는, 밀고 밀리는 상황을 각각 한차례 반복한 뒤 원위치에서 마주한 양측은 이제 앞으로 전쟁 방향을 놓고 결단을 내려야 했다.

'공'은 자유진영 코트로 넘어왔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진영의 한국전쟁 참전 유엔군 총사령관이자 참전 16개국 유엔군 주축인 미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와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 간 심각한 갈등이 노정되었다.

멕아더는 지역 차원의 전쟁에 머무른 한국전쟁이 중공군의 참전으로 글로벌 전쟁으로 전환됐다고 개념 정리하고 전쟁의 승리를위해 인천상륙작전의 글로벌 버전인 만주폭격을 주장했다.

중국 대륙과 한반도로 이어진 물적, 인적 보급로의 척추인 만주를 두 동강내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가미가제'와 '옥쇄 저항'의 중국 버전인 '인해전술'을 분쇄하려년 만주에 대한 원폭 투하도 불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워싱턴의 트루먼 대통령은 중공군 참전이 없을 것으로 오판하여 1950년 말 한반도 북반부에서 대패주를 초래한 맥아더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았다.

맥아더는 만주까지 확전하더라도 소련의 참전이 없을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트루먼은 1950년 9월 웨이크 섬에서 회담을 통해 맥아더의 정세 판단을 믿고 한만 국경선까지 북진을 허용했던 참혹한 결과를 초래한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자세였다.

트루먼은 세계전략적 차원에서 소련이 미군 전력의 상당 부분을 병력만 많은 중공군을 총알받이 미끼로 유인하여 묶어두고 서유럽으로 진공할지 모른다는 점을 몹시 걱정했다.

전략적 가치로 보면 서유럽에 비해 한참 낮은 한반도와 중국에서의 승리를 위해 순망치한의 관계인 서유럽을 위험에 빠트릴수 없다는 판단에 무게를 두었다.

맥아더와 트루먼, 두 사람은 너무나도 대조적인 인물이었다.

맥아더는 남북전쟁 참전에서부터 군 생활을 시작, 필리핀 총독을 지낸 아서 맥아더의 삼남으로 금수저 출신이다.

트루먼은 '미주리 촌놈'으로 고등학교가 최종 학력이엇다. 흑수저였다.

맥아더의 경력은 화려했다. 1차대전에 참전, 인상적 전공을 세웠고 이후 승승장구 2차 대전 전에 이미 육군 참모총장을 지냈다.

태평양 전쟁에서 지상군 최고 지휘관으로 일본군의 항복문서를 받아낸 승리 주역이었고 한국전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밀리던 전세를 단번에 반전시킨 탁월한 군사 전략가이자 담대한 장군이었다.

반면 트루먼은 억세게 운이 좋은 인물이었다.

육군소령 예편 뒤 양복점을 운영했으나 3년 만에 다 털어먹은 사업 실패자였으나 도리어 정계로 진출, 상원의원까지 오르는 입지전적 성공을 거두었다. 전화위복이다.

상원의원으로 국방위원장을 맡기는 했으나 그리 눈에 띨만한 활약이 없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시위소찬'으로 아주 적절하다고 판단, 트루먼을 부통령 후보로 선택했겠지만 이것은 그에게 초대박을 안겨주었다.

루즈벨트의 갑작스런 뇌일혈 사망으로 부통령 취임 불과 3개월 뒤에 대통령에 오른 그는 나치 독일의 항복을 받아냈고 이어 원자폭탄 투하를 통해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냈다.

그의 행운의 잭팟은 대통령 재선 성공이었다. 최종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모두 그의 폐배를 예상했으나 그는 보기 좋게 승리했다.

두 사람의 지적 능력은 탁월했다.

맥아더는 연방 육군사관학교, 별칭 웨스트포인트를 수석 졸업했다. 그의 성적은 역대 수석 졸업자들 중에서도 맨윗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능력이 뛰어났으나 다른 한편 권위적이고 오만한 처신으로 '태평양의 시저'라는 별명을 얻었다.

'갈리아 원정기'를 쓴 시저(카이사르)를 의식했음인지 맥아더의 문장은 그가 장군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수사로 유명하다.

트루먼은 고교 재학 시절 부근 공공 도서관에 소장된 책을 모두 읽었다는 과장된 말이 나올 정도로 독서광이었다.

과도한 독서로 인해 눈이 나빠져 희망하던 사관학교에 가지 못했으나 주방위군 군사학교에 입학하여 1차 대전에도 참전했다.

육군소령으로 예편했고 주 방위군에서는 대령까지 지냈다.

상원에서 국방위원장을 맡은 경력이라든가 그가 1차 대전 중 병과가 포병이었던 점에 비추어 보면 그의 '히어로'는 나폴레옹이었던 듯 싶다.

지지하는 당도 다르고 이력도 대조적인 '금수저'와 '흑수저'는 1951년 3월까지는 오월동주 했다. 맥아더가 1880년생이고 트루먼이 네 살 아래다. 하지만 그 불안한 공존은 마침내 파탄이 난다.

'나의 뒤에는 아무도 없다'라는 최종 결정권자는 대통령 나 자신이라는 신념과 결단의 지도자 트루먼은 맥아더의 군 라이벌 조지 마셜의 지지 아래 '정치적 주사위'를 던진 '태평양의 시저'를 해임했다.

'공'은 다시 코트 넘어 공산진영으로 넘어갔다.

스탈린은 상대방을 쓰러뜨릴 생각이 없는 미국과 쓰러뜨릴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중국이 잽 펀치를 교환하는 랠리를 벌리는 시점인 1951년 6월 휴전을 제안했다.

스탈린은 게임을 연장에 재연장으로 끌고 가도록 유도하며 미국과 중국의 틈을 벌릴대로 벌렸고 그 불필요한 전투는 스탈린의 죽음으로 마감되었다. 소련에게 최대 실리를 안기면서 말이다. <스위프트-버크왈드>

라싸 2차봉기, 중국 주5일제시행, 임칙서 아편 몰수 소각

1951년 3월24일 미국 맥아더 원수는 한국전쟁을 중국까지 확대하는 주장을 담은 성명을 발표했다.

1950년 10월19일 중국군의 한국전 개입으로 후퇴를 거듭한 끝에 1951년 1월4일 서울을 공산군에게 내주었던 유엔군은 1월25일부터 반격을 개시, 2월10일 인천과 김포를 탈환하였고 맥아더가 확전 주장 성명을 발표한 3월24일에는 다시 38선을 돌파하였다(우리 국군은 동해안 지역에서 다음날인 25일 38선을 돌파함).

맥아더는 중국군의 개입으로 시작된‘새로운 전쟁’의 완전한 승리를 위하여 만주폭격이 필요하다고 주장, 워싱턴의 트루먼 행정부와 대립하였다.

맥아더와 트루먼 행정부 간 대립은 트루먼 대통령이 1951년 4월 11일 맥아더를 유엔군 총사령관 직에서 해임함으로써 끝이 났다. 맥아더가 확전 주장 성명을 발표한 지 18일만에 일이었다.

[今天歷史-4월11일]上海 임시정부, 애치슨-맥아더 해임, 沈太福

"북한 침범 美분쇄 中안전 보위" 중국 한국전참전 正義의 전쟁 규정 2005/10/24 18:38

첸치천의 추억...중국의 한국전 개입 관련 발언 등 2004/10/19 12:16

[書中一滴] 한국전쟁 전야의 중국 중앙위 전체회의 2004/02/04 18:37

[書中一滴] 한반도 중국외교의 함정 2005/10/19 15:04

1959년 = 티베트 라싸에서 1만여명의 승려들이 참가한 반중폭동이 재연되어 라싸를 점령한 인민해방군과 티베트인들 간에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티베트인의 마지막 무장저항은 중국군에 의해 간단히 제압됐고 달라이 라마는 1만여 추종자를 이끌고 인도로 망명했다.

달라이 라마의 망명 생활은 2018년 현재 50년째를 맞고 있다. 망명 당시 24세였던 달라이 라마는 올해 82세이다.

[今天歷史-3월10일] 鄧小平 재복권, 장제스‘중국의 운명’티베트 1959년 무장 봉기1995년 = 중국 리펑(李鵬) 총리 주5일제 서명, 시행에 들어감.

1839년 = 청나라 임칙서(林則徐)가 외국상인들로부터 2만2830 상자의 아편을 압수, 전부 소각 처분했다. 이로 인해 청나라와 영국 사이에 아편전쟁(1840~1842)이 발발했다.

아편전쟁은 이후 무수히 벌어진 '더러운 전쟁'의 원조격으로 그 어떠한 '더러운 젅쟁' 도 이 오명의 적확성에서 아편전쟁을 넘어서지 못했다.

2018/03/24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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