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7/18 06:10



[今天歷史-3월25일] 76년 文匯報 사건... 4인방의 刻舟求劍

1965년 11월10일 4인방의 야오원위안은 그들이 주자파로 규정한 세력을 겨냥한 불화살을 날렸다.

불화살은 거센 역풍에 흔적 없이 꺼질 위기를 맞기도 하였으나 결국 반년 뒤인 다음해인 1966년 5월 '초원을 불태우는' 문화대혁명의 불길을 지피는데 성공햇다.

문혁 세력은 다양했고 내부 투쟁도 가열하여 각 세력 간 부침이 심했으나 4인방은 10년 동안 줄곧 건재했다.

1976년 3월25일 이들 4인방은 또 다시 '주자파 타도'의 불화살을 쏘았다. 불과 열흘이 못되어 새로운 불길이 타오를 기세였다.

그러나 6개월 열흘 뒤 4인방은 '되돌이킬수 없는' 패배를 당했다.

1976년 10월6일 베이징 정변으로 체포된 이들은 재판 뒤 연금 중 자살, 옥중 병사와 망각 속의 사망 등으로 역사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4인방의 정치적 유산은 깡끄리 청소됐고 잊혀졌으며 오명만이 남았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들은 상황이 시시각각 바뀌어감에도 불구하고 10년 전의 선동과 선전 방식을 그대로 되풀이 하다 간단하게 지워졌다.

마오쩌둥이 사라진 가운데 '그들만의 독선적' 마오노선을 '독단적으로' 끌고 가려한 착각과 무모함의 결과다.

탈권 이후 끈임없이 추구해온 뺄셈의 정치로 인해 자신들이 소수파가 되었다는 인식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축소 지향'을 넘어 '축소 극대화'로 맹진했다. 마오마저 '문혁 우파'로 만들 지경이었다. .

결국 내연하던 불만은 마오의 사망을 계기로 문혁 세력 다수 마저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호랑이가 사라진 뒤 호랑이 등위에서 호가호위하던 그들은 각각 단 한 사람도 감당 못할 약골이거나 비대한 또는 늙어빠진 3명의 남자와 한 명의 나이든 여자에 불과함을 확인해야 했다.

1976 3월 4인방은 그들이 탄 배가 10년 동안 강물을 따라 흘러왔음을 잊고 10년 전에 뱃전에 표기해둔 표식에 따라 '칼'을 찾겠다며 물 속에 뛰어들어간 꼴이었다. <스위프트-버크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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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3월25일 = 4인방에 대한 민심의 이반을 불러일으킨 이른바 '문회보(文匯報)사건'이 터졌다.

문화대혁명은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논한다'는 제목의 야오원위안(姚文元)의 글이 상하이(上海) 문회보에 게재되면서 발단이 되었는데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4인방의 몰락 단초 역시 문회보가 제공한 것이다.

4인방은 이해 1월에 사망한 저우언라이(周恩來)와 그의 노선 계승자인 덩샤오핑(鄧小平)을 공격하기 위해 10년 전의 수법을 다시 채용했으나 이번에는 호응이 아니라 부메랑이 되었다.

'문회보로 흥한 자 문회보로 망했다'라는 말이 나옴직한 사태 전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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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문회보는 1976년 3월 25일자에‘주자파(走資派)는 여전히 달리고 있다. 우리는 그들과 투쟁하여야한다’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이 글은 “당내 주자파들이 타도된 지금에도 회개하지 않는 일부 주자파들이 권력의 전면에 오르려 하고 있다”라는 주장을 하였다.

이에 앞서 문회보는 3월5일 마오쩌둥(毛澤東)의 레이펑(雷鋒)학습 촉구 13주년을 기념하는 글에서 마오가 인용한 저우언라이의 레이펑에 대한 문구를 삭제하였다.

따라서 3월25일 문회보의 글은 이해 1월에 사망한 저우언라이의 격하와 덩샤오핑에 대한 공격을 의미했다.

이 글이 보도된 이후 문회보에는 지지 전문과 반박 전문이 답지 했는데 지지 전문이 400여건인데 비해 반박전문은 1,000건이 넘었다.

반박 전문 중에는 “저우 총리를 반대하면 민을 얻지 못한다”, “문회보는 도대체 누구의 신문이냐”, “문회보는 사태의 진상을 전국 인민에 밝혀라” 등이 있었다.

이들은 레이펑에 대한 저우언라이의 언급을 문회보가 삭제한데 대해 특히 분노했다.

이에 대해 장춘차오(張春橋)는 “왜 문회보만 갖고 시비냐. 그 신문을 비난하지 말라. 문회보 이후에도 (저우의 글은) 계속 삭제될 것이다”라고 말했고 왕홍원(王洪文)은 “총리의 글을 삭제한 수를 세는 것은 방귀를 뀐 횟수를 세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비아냥댔다.

3월28일 난징(南京) 대학 400여명의 학생은 저우 총리의 대형초상화와 화환을 들고 문회보의 격하 조치를 비난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중국 전국에서 처음으로 4인방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였다.

3월30일에는 난징 대학생들이 철도직원들의 방조 아래 열차 객차 안에 들어가 “흐루시초프(장춘차오를 지칭한 것임)와 같은 인물이 권력을 차지 하려하고 있다”, “문회보의 배후를 들어내자”라는 구호를 페인트로 열차 내에 적어 넣었다. 이는 반4인방 운동의 점화제 구실을 하였다.

4월5일 베이징(北京) 천안문 광장에서 저우언라이 총리를 추모하려는 학생, 일반인과 4인 방 세력간에 충돌이 벌어져 3000여명이 죽거나 부상, 처형당하는 대참극이 벌어졌다.

문회보 사건은 청명절(淸明節) 천안문 사태로 불리는 이 유혈사태의 도화선 구실을 했고 마오가 사망한 뒤인 이해 10월 베이징 정변으로 4인방이 몰락하는 단초가 되었다. 죽은 저우언라이가 산 4인방을 쫓아 버린 것이다

1949년 중국 공산정권이 수도를 베이징(北京)으로 정하였다. 1929년 7월6일 난징(南京)으로 옮겨졌던 중국의 수도가 19년8개월18일만에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 온 것이다.

이때는 국공내전이 여전히 진행 중이었으며 양쯔강을 사이로 난징을 수도로 하는 국민정부와 옛 수도를 점령한 공산 세력 간 대립이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베이징은 난징을 함락하고 공산군이 남쪽으로 전진을 계속하고 있던 이해 8월13일에 정식으로 수도로 지정됐다. 이때는 공산 세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기 1개월 18일 전이었다.

장제스(蔣介石)의 국민정부는 북벌을 통해 비록 불완전하게나마 전국 통일을 이룬 이후인 1929년 7월 6일 수도를 난징(南京)으로 옮겼다.

원(元)대 이래 통일왕조의 수도로 군림해온 베이징(北京)은 수도가 남쪽으로 이전함에 따라 이름마저 서울을 의미하는 '경(京)'자가 떼내어져 '베이핑(北平)'으로 바뀌어졌다.

수도가 되돌아옴과 함께 이름도 '경(京)'자가 들어간 베이징으로 환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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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 장쩌민(江澤民)을 중국 국가주석에 선출했다. 당 최고지도자인 총서기와 군권의 최고 직책인 중앙군사위 주석 을 겸하고 있는 장쩌민이 국가원수 직책인 국가주석에 오름으로써 장쩌민은 당정군의 최고 직책을 모두 보유하게 되었다.

1980년 화궈펑이 당 주석에서 부주석으로 강등되며 실각한 이후 당정군의 최고 직책이 분산되었으나 다시 한 사람에게 몰아준 것이다. 이러한 기조는 후진타오와 시진핑 등 후계자에게도 이어졌다.

1937년 = 장징궈(蔣經國)가 모스크바로부터 중국으로 돌아와 12년간 러시아 생활을 청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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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5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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