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4/27 06:20



[今天歷史-3월26일] 안중근 순국... 당시 만주에 중국은 없었다

31세의 대한제국 열혈 애국청년 안중근이 교수형으로 불꽃 같은 길지 않은 삶을 마감했다.

때는 1910년 3월 26일. 장소는 중국 청나라 땅 뤼순의 감옥.

대한제국 국민 안중근의 죽음을 두고 우리는 순국이라고 부른다. 일본은 처형이라고 말한다.

안중근의 죽음은 일본 전 총리 이토 히로부미를 1909년 10 26일 역시 중국 청나라 땅 하얼빈 역두에서 사살했기 때문이다.

하얼빈의 치안과 사법을 장악하고 있던 러시아는 일본 당국에 안중근의 신병을 인도했다.

안중근의 신병은 일본이 치안과 사법을 장악하던 뤼순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재판이 일사천리식으로 진행됐다.

안중근의 저격에도 체포에도 그리고 그의 신병인도에 있어서 청나라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청나라 땅을 벗어나지 않은 뤼순에서 일본에 의해 재판이 진행됐고 목숨을 빼앗는 사형 절차가 이루어지는 데서도 청나라는 수수방관해야 했다.

당시 이 과정에서 청나라는 없었다. 중국은 없었다.

이토가 죽자 대한제국의 수도 한양의 장충단에서는 수 많은 대한제국 고관 대작과 신민들, 다른 말로 하면 '인면수심의 개돼지'들이 구름 같이 모여 나라의 원수'를 추모했다고 한다.

'개 돼지들의 추모 행사' 1년이 채 못가 대한제국은 망했다. '대한의 살신성인 의사' 안중근 순국 5 개월 뒤였다. 한 알의 밀알이 죽어 막 썪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중국 청나라도 안중근 순국 1년 뒤에 혁명이 일어났고 그 한 해뒤인 1912년 2월 멸망했다.

중국은 공화국으로 바뀌었으나 만주의 주권을 완전 회복하기까지는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패망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盲瞰圖子>

이리듐 계획 위성 발사, '다자이 신화' 천융구이 사망, '생활의 발견' 작가 린유탕 사망, 천안함 폭침 사건, 와호장룡, 장징궈 전기 쓴 재미화교 작가 암살 관련자 대만서 기소

1998년 3월26일 오전 1시1분 중국 타이위안(太原) 위성발사 중심에서 미국 모토롤라사의 이리듐 프로젝트 인공위성 2기가 중국이 자체적으로 연구, 제작한 ‘창청(長城 :장성)2호 - C 로켓에 실려 발사되어 예정된 궤도에 진입하였다.

이리듐 계획이란 모터롤라사가 한국 SK 텔레콤, 일본 DDI 등 세계 20여개 회사와 함께 컨소시엄을 만들어 지상 780km 상공에 인공위성 66개를 쏘아 올려, 121개국에서 하나의 번호와 단말기로 통화가 가능하도록 하기 위한 저궤도 위성 이동통신 계획이다.

원래는 77개의 위성을 쏘아 올리려 계획한 데서, 원자번호 77인 이리듐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인공 위성 66 개를 쏘아 올리게 됐지만 이름은 그대로 사용하였다.

한국에서는 이 계획에 따라 1998년 11월1일에 상용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저궤도 위성 이동통신이란 여러 개의 통신위성을 저궤도에 쏘아 올려, 휴대용 단말기로 전화와 각종 데이터를 주고받는 첨단 통신 수단이다.

휴대용 단말기와 위성이 직접 연결되므로, 세계 어느 곳에 있는 상대방과도 통신망이 없이 전화 통화와 데이터 교환이 가능하다.

이전 국제통신은 인마르샛(INMARSAT : 국제해사위성기구)이나 인텔샛(INTELSAT : 국제전기통신위성기구)과 같은 정지궤도 위성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정지궤도 위성은 새로운 위성체 개발에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고, 지구와 떨어진 거리가 멀어 통신 품질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92년 세계무선통신 주관청 회의(WARC-92)는 비정지궤도 위성 이동통신 계획을 위한 주파수를 할당하였고, 저궤도위성 이동통신이 계획되었다.

저궤도위성 이동통신 계획에서 대표적인 것이 이리듐 계획이다. 이외에 저궤도위성 이동통신 계획으로는 인마르샛의 프로젝트 21, 로럴-퀄컴사(社)의 글로벌스타, 마이크로소프트사(社)의 텔레데식 등이 있다.

이리듐 위성 통신은 사용 비용이 고가인데다 이 통신만을 통해 사용할 기회가 많지 않아 가입자 수가 크게 늘지 않았다.

모토롤라 사세가 망할 정도까지 위축된 것도 이리듐 계획 때문이라고 지적되고 있다.

지구상 어느 곳에서든지 통신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인해 미국 국방부 계약을 따냄으로서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SK도 1999년 국내 상용화 서비스를 중단했고 2015년에 다른 회사가 국내에서 상용 서비스를 재개했다.

이날 위성 발사는 창청 계열의 로켓 발사로는 50번째였으며 중국의 창청공업총공사가 이리듐 계획에 참여하여 두 번째로 수행한 인공위성 발사였다.

발사에 사용된 창청 로켓은 개량형으로 길이 40m, 직경 3.3m , 운행 부분 중량 213톤이었다. 로켓은 최초의 정지궤도에서 최종적인 운행궤도를 진입할 때 2개의 인공위성을 분리하는 분배기를 갖추고 있다.

2001년 대만 출신인 리안(李安)감독의 와호장룡(臥虎藏龍)이 아카데미상 4개 부문을 수상, 중국 영화 최초의 기록을 세웠다.

리안 감독은 이로부터 5년 뒤인 2006년 3월5일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아카데미상(오스카상) 감독상을 수상했다. 동양인으로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기는 리안이 처음이다.

리안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오스카 감독상 2006/03/06 18:02

1986년=‘농업은 다자이(大寨)에서 배우라’는 문화대혁명 당시 슬로건의 주인공인 천융구이(陳永貴)가 베이징(北京)에서 사망했다. 1914년생으로 향년 72세였다.

산시(山西)성 시양(昔陽) 출신인 그는 1948년 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공산정권 수립을 전후하여 다자이의 생산위원, 당지부 서기,농업사(農業社)의 주임을 역임하였다.

1961년에 시양현 현 당위원회 후보위원이던 그는 문화대혁명 발발 다음해인 1967년에 시양현 서기 겸 산시성 혁명위원회 부주임이 되었다.

이후 산시성 서기, 진중지위(晋中地委)서기를 거쳐 1975년부터 1980년까지 국무원 부총리를 역임했다.

앞서 1973년 10대에서 정치국위원이 되었으며 4인방이 축출되고 화궈펑(華國鋒)이 권력을 장악한 가운데 치러진 1977년 11대에서도 연임되었다.

일개 농부에 불과한 그는 이처럼 비약적인 출세를 한 것은 마오가 추진한 농촌 인민공사의 모범사례로 다자이를 선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다자이의 신화의 지속을 위해 장칭(江靑) 등 4인방 세력은 엄청난 지원을 다자이에 쏟아 부었다.

4인방은 본 건물 건축(농촌의 생산력확대)보다 대외 선전용 모델 하우스 건설에 정력을 쏟았던 것이다. 따라서 천융구이는 문화대혁명의 공허성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는 덩샤오핑(鄧小平)이 집권한 뒤인 1980년 9월 전인대에서 부총리 직에서 물러났으며 1983년 베이징 둥차오(東郊) 농장의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이 『새로운 황제들』(해리슨 E. 솔즈베리 더, 박월라, 박병덕 옮김, 다섯수레, 서울. 1993)의 29장 <위로는 하늘, 아래로는 땅>(377~389쪽>에 소개되어 있다.

솔즈베리는 천융구이가 1987년 사망하여 다자이에 묻혔다고 기록했으나 인민일보는 그의 사망 연도를 1986년으로 밝히고 있다.

1976년= ‘생활의 발견’이라는 수필집으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린위탕(林語堂)이 사망했다. 1895년 10월10일생으로 향년 81세였다.

푸젠(福建)성 룽시(龍溪)현의 목사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1916년상하이(上海) 성요한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19년 미국 하바드 대학에 유학했다.

다시 독일로 건너가 예나대학,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1923년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 베이징(北京) 대학, 베이징 여자사범대학, 샤먼(廈門) 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그는 어사파(語絲派) 급진적 논객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1930년대‘논어(論語)’와 그 밖에 소품문잡지(小品文雜誌)‘를 계속적으로 펴내면서 유머(humour :해학)의 제창과 중간파의 활로를 찾고자 했다.

1936년 8월 미국 뉴욕으로 건너간 그는 방대한 영문 소설과 수필 등을 써내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전개하여 당시 서방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중국 작가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동란과 항일전쟁을 견디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중국 인민의 모습을 그렸으며 다른 한편으로 중국 문명의 생활적 특질 등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1954년 싱가포르 난양(南洋)대학의 총장을 역임하였으며 1966년부터 대만에서 거주하였다.

1967년 홍콩대학의 연구교수에 임명되어 사전편찬 작업에 참여 하였다.

저서에 중문(中文)으로는 ‘전불집(剪拂集, 1924)’이 있고 영문으로는 ‘베이징 호일(北京好日 : Moment in Peking, 1937)’, ‘생활의 발견(1940)’, ‘폭풍우 속의 나뭇잎’ 등이 있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었을 당시 국제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중국인 문필가로는 린유탕과 함께‘낙타상자’의 라오서(老舍)가 있었다.

대만을 택한 린유탕은 와석종신(臥席終身)한 반면 공산중국에 남은 라오서는 문화대혁명 와중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今天歷史-2월3일]낙타상자 작가 라오서(老舍) 탄생

1985년= 대만 당국은 장징궈(蔣經國) 전기 등을 통해 대만 정계의 흑막을 파헤친 글을 발표해온 미국 거주 작가 류이량(劉宜良 : 필명 江南)을 암살한 사건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관련자들을 기소하였다.

류이량의‘장징궈전'은 ‘장씨일가(蔣氏一家)’라는 제목으로 한국에도 번역 소개되었다(1987, 銀行界).

[今天歷史-10월15일] 江南 암살, 우파분자 분류기준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

안중근 의사가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1910). 1879년생으로 향년 31세였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러시아 재무장관과 만나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 조선 침략의 원흉인 전 조선 총독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하얼빈은 러시아 관할 구역이었으나 일본 압력으로 안 의사가 일본 관할구역인 뤼순으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재판을 받고 순국하기에 이른 것이다.

안 의사는 이승만 대통령보다 4세 연하였고 김구 선생보다는 3세 아래였다. 같은 해에 태어난 다른 나라의 역사적 인물은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이다.

한국 군함 천안함이 우리 해역에서 북한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 이로 인해 우리 해군 승조원 46명이 전사했다(2010).

2018/03/26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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