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7/21 23:31



[今天歷史-3월27일] 王明...36계 줄행랑, 굴신, 침묵

손자병법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라고 하였다. '적을 알고 나를 안다는 것'이 승리의 보증서라는 것이 아니다.

강력한 독재체제 하에서 독재자의 경쟁자이거나 경쟁 가능성이 있는 인물의 운명은 풍전등화다.

또 다른 병법서는 위기를 피할 방법이 도저히 없는 경우에는 '도망쳐라'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나온 것이 '36계 줄행랑'이다.

공산주의 이론면에서 마오쩌둥을 뛰어넘는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젊고 소련의 적극적 후원 등으로 마오의 최대 도전자이던 왕밍은 결국 '도망'이란 수단을 택했다.

장정 이후 마오와 권력 투쟁을 벌였던 스펙 면에서 마오를 앞선 베이징대 출신의 장궈타오도 결국 최후 수단으로 '도망'을 택했다

공산당이 중국 대륙의 지배자가 된 뒤 2인자이자 후계자로 공식 지명되기까지 했던 린뱌오도 최후의 선택은 '36계 줄행랑'이었다.

왕밍과 장궈타오는 망명지에서 와석종신했으나 린뱌오는 도주 중에 의문사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최고 권력자의 라이벌 또는 위협자로 간주되는 인물이 '도망'외에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굴신과 침묵이다. 저우언라이는 전자를, 주더는 침묵을 택했다.

비록 사후에서이지만 그 최고 권력자을 꺽은 방식은 저우언라이의 굴신 전략이었다.

후진타오의 후계자 경쟁이 진행되고 있을 때 리커창은 능력과 지도력 면에서 시진핑은 물론 다른 여타 경쟁자를 단연 앞섰다.

그러나 리커창은 덩샤오핑이 설계한 '격대 지정'원칙 때문에 자신과 같은 파벌인 후진타오의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

시진핑이 최고 지도자에 오른 5년 뒤인 오늘 리커창은 비굴할 정도의 굴신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마지못한 굴신이라면 '방패'가 되지 못하고 창을 거꾸로 꼬나무는 격이 된다. 장기적 승리를 위해서라면 자신도 속을 정도의 굴신이어야 한다.

리커창은 제2의 저우언라이가 되고자 '참호속에서 신토불이하는 굴신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왕밍과 장궈타오는 줄행낭으로 목숨을 건졌으나 정치적 반전의 기회는 돌아오지 않았다. 위험한 상황을 면했지만 승리는 없었다. <스위프트-버크왈드>

러시아 뤼순과 다롄 조차, 대만 중국인에 대만서 무역 활동 허용

1974년 3월27일 중국공산당 최고지도자를 역임했으며 마오쩌둥(毛澤東)의 최대 정적이자 논적이었던 왕밍(王明)이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1904년생으로 향년 70세였다. 마오보다 11세 연하인 왕밍은 그와는 정반대로 마오의 오른편 쪽에서 마오와 대립각을 세웠던 덩샤오핑(鄧小平)과 동갑이다.

그는 마오가 타계하기 2년5개월13일 먼저 마르크스를 만나러 갔다.

덩샤오핑은 1997년 2월19일 세상을 떠났으니 왕밍보다 23년 더 살았으며 마오가 죽은 지 21년 더 생존했다. 이러한 사이 중국공산당의 노선은 좌에서 우로 행진했다.

왕밍은 안후이(安徽)성 다안(大安) 출신으로 본명은 천샤오위(陳紹禹)이다. 중국공산당 역대 최고지도자 중 안후이성 출신은 왕밍 외에도 창당 주역으로 초대 당수를 지낸 천두슈(陳獨秀)와 2002년~2012년 총서기를 지낸 후진타오(胡錦濤)가 있다.

왕밍은 22세 때인 1926년 공산당에 가입, 20대에 중공중앙(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정치국위원을 지냈으며 장강국(長江局) 서기를 역임했다.

그는 소련에 유학갔다 돌아온 뒤 코민테른의 지도 아래 ‘반 리리싼(李立三)노선’기치를 내걸고 당권 투쟁을 벌여 1931년 1월 6기 4중전회에서 중앙지도권을 장악했다.

당시 그처럼 소련에 유학한 젊은이들이그를 중심으로 뭉쳤는데 이들은‘28인의 볼셰비키’로 불렸다. 훗날 덩샤오핑 체제 하에서 국가주석을 지낸 양상쿤(楊尙昆)도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

이들 그룹의 리더로는 그와 함께 본명이 친방셴(秦邦憲)인 보구(博古)가 있었으나 실질적 최고지도자는 왕밍이었다.

왕밍은 리리싼의 허수아비였던 샹중파(向忠發) 총서기가 국민당에 체포되어 처형된 뒤인 1931년 6월 총서기에 올라 명실상부한 중국공산당의 최고 지도자가 됐다.

하지만 3개월 뒤인 이해 9월 코민테른 중국대표에 임명되어 모스크바로 떠났고 총서기직은 보구에 인계됐다.

왕밍과 보구는 마오의 농촌 중시전략과 게릴라 전술을 배격하였으며 이는 1934년 10월 홍군이 근거지로 수립하였던 장시(江西)소비에트를 버리고 장정(長征) 길에 오르는 결과를 빚었다.

1935년 1월 쭌이(遵義)회의에서 마오는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고 보구의 총서기직도 장원톈(張聞天)에게 넘어갔으나 왕밍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이를 방증하는 사례로 1937년 9월 왕밍이 모스크바에서 전용기 편으로 옌안(延安)을 찾았을 때 마오쩌둥이 환영식에서 한 말을 들 수 있다. 마오는 “우리 당의 영수 왕밍 동지가 하늘에서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참으로 기쁘다(歡迎我們黨的領袖王明同志從天上回來, 眞是喜從天降)”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마오는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고는 있었지만 당권은 아직 수중에 넣지 못하고 있었다. 형식적으로나마 당수직은 장원톈이 보유하고 있었다.

1938년 10월 6기 6중전회에서 총서기제가 폐지되고 7인 서기제라는 집단지도체제가 채택되었는데 이는 마오의 당권장악을 위한 중간 수순이었다.

왕밍은 항일전쟁 과정에서 통일전선에 관한 수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의 뛰어난 이론적 재능에 질투를 느낀 마오는 그를 노골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했다.

1938년 총서기제를 폐지하고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한 6기6중전회에서 마오는 왕밍의 통일전선 주장에 대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1942년부터 3년동안 지속된 정풍운동 과정에서 국민당과의 전략적 합작을 강조한 왕밍의 통일전선 주장은 국공 합작을 전술개념으로 전략 개념의 아래에 배치한 마오로부터‘신투항주의’와‘교조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마오는 이론적으로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었고 소련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숙청할 수도 없었다.

이런 와중에 독약을 이용, 살해하려고 하였으며 그가 모스크바로 망명한 뒤에도 한 차례 더 독살하려 하였다는 주장까지 나왔다.(장룽 존 핼리데이, 『마오-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까치(2006))

1945년 7대에서 왕밍은 중앙위원에 선출되었으나 그 서열은 맨 뒤에서 두 번째였다. 당수 격인 총서기를 지낸 인물에 대한 일대 모욕이 아닐 수 없었다.

왕밍이 코민테른 중국 수석 대표로 소련에 파견되었을 때 그의 '아바타'였던 보구가 1946년4월 8일 비행기 사고로 사망함으로써 '28인 볼세비키' 그룹은 더 이상 재기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한직을 전전했고 1956년 9월 8대에서는 97명의 중앙위원 중 서열 맨 말석을 차지했다.

왕밍은 그해 신병 치료를 이유로 모스크바로 떠났고 이후 귀국하지 않고 소련에 계속 머물다 사망했다.

왕밍은 마오에게 정치적으로 패배했지만 두 사람 간 이 투쟁은 계속됐다. 1966년 문화대혁명 당시‘왕밍 철학’은 홍위병의 주요 공격 목표의 하나였다.

왕밍은 1969년 캐나다 공산당 기관지에‘마오의 문화대혁명은 반혁명정변’이라는 장문의 논문을 기고하기도 했다. 그는 중국공산당이 자랑해 마지않는 장정(長征)도 참담한 희생을 불러일으킨 잘못된 전략적 선택으로 규정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왕밍의 생애는 망명지에서 생을 마친 러시아의 트로츠키를 연상시킨다

[外信Essais] 구(舊) 트로츠키와 신(新)트로츠키 2010/10/16 15:46.

또한 '짧은 영광, 긴 망각'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러시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 수반을 지낸 케렌스키(1881~1970)와도 닮았다.

케렌스키는 10월 혁명 다음 해인 1918년 프랑스로 망명했고 1940년에는 다시 미국으로 망명지를 옮겼다. 러시아 혁명 관련 회상록 저술과 자료 편찬으로 여생을 보냈다.

1898년 = 러시아가 중국 뤼순(旅順)과 다롄(大連)항을 조차했다. 중국 입장에서는 '북로남왜'의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이제이'와 '근교원공'전약의 구현이다.

1995년 = 대만 행정원 대륙위원회는 중국인이 대만에 와 무역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킴. 법안의 명칭은 ‘大陸地區人民來台從事經貿相關活動許可辦法)’였다.

2018/03/27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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