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10/21 08:42



[今天歷史-3월28일] 국부군, 중국 대륙서 완전 철수

...1939 유럽, 1950 아시아

1950년 3월28일 중국 대륙에 있던 마지막 국부군이 철수했다. 4년간 국공내전이 공산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개전 초 중국 대륙의 집권당은 국민당이었고 정통 정부는 중화민국이었으니 이는 반란의 성공이다.

그 꼭 11년 전인 1939년 3월28일 스페인 프랑코 장군이 지휘하는 파시스트군이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 입성, 3년간 내전을 승리로 끝마쳤다.

선거를 통해 수립된 합법적 좌파 인민전선 정부에 대한 아프리카식민지 주둔군 사령관 프랑코 장군 군대의 봉기이니 명백한 반란이었다. 역시 반란군이 승리했다.

인민전선 정부는 소련이 지원했고 프랑코 군대는 게르니카 폭격에서 보듯 나치 독일군이 직접 개입하는 등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스페인에서 벌어진 나치 독일과 붉은 소련 간 대리전에서 나치가 승리했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에서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공산군을 지원한 나라는 소련이었고 국민정부를 지원한 나라는 미국과 영국 등 자본주의 국가이었다.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승리였고 반 공산 자유주의 국가 지도국 미국의 패배였다.

스페인내전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어정쩡했다. 나치 독일이 반공산주주 '방파제'이자 '비수'가 되기를 내심 희망했다. 그것은 착각이었다.

1939년 8월 독소 블가침조약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어리둥절한 가운데 2차 대전이 시작했고 1941년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소련 역시 뒤통수를 맞았다.

국공 내전에서도 착각은 있었다. 미국은 마오쩌둥의 공산중국을 토지개혁 세력으로 '단순 순진하게' 기대했다. '영원한 국익만이 있을뿐'이라는 노회한 영국은 소련을 견제할 가능성을 긴 안목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너무 빨랐다.

세계 패권을 인수 인계한 미국과 영국은 위기에 직면한 장제스의 중국에서 파시즘적 요소와 고질적인 부패를 보면서 머리를 젓기 시작했고 그들을 포기하는데 전광석화 같이 빠르게 행동했다.

프랑코의 마드리드 입성 반년 뒤 2차 대전이 벌어졌다. 전쟁은 파시스트 대 반파시스트 연합으로 정리되는 과정을 거쳐 반파시스트 연합인 미국과 영국 프랑스 그리고 소련의 승리로 끝났다.

국부군이 중국 대륙을 완전히 상실한지 3개월 뒤 한반도에서 동서열전이 벌어졌다.

공산중국 견제와 부동항 해상 출구 획득을 통한 태평양 진출 도약대 확보라는 복잡한 계산의 스탈린 소련이 부추겼고 해양 세력의 역살라미 전술에 의한 '순망치망(脣亡齒亡)'을 극도로 우려한 마오쩌둥의 공산중국이 지역적 글로벌 전으로 확대시켰다.

양측은 과장한 선전과 인색한 평가와는 별도로 미국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교두보를 한반도에서 구축하는 절반의 승리를 거두었다.

중국은 한반도에 해양 세력의 완충 지대를 확보하는 역시 절반의 성공을 했다.

소련은 미국과 공산중국, 그러나 민족주의적인 중국이 손잡는 최악의 악몽 시나리오를 깊은 겨울잠에 빠지게 하는 대단히 저비용 고효율의 세계 패권 전략을 실현시킨 아주 값진 승리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물론 완전한 승리가 아니었다. 시한부 승리였다.

2018년 유라시아 대륙에서 '고래'들의 계산은 전쟁으로 파탄이 난 1939년과 1950년을 연상하게 하는 위험한 게임 분위기다.

'악마'가 도사리는 디테일은 복잡하지만 큰 그림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미국이 러시아에게 던진 패는 '시리아 해상 출구 줄께 북한 핵 달라'다.

미국이 중국에 던진 패는 'One China now, but tomorrow?'이다.

'시황제'는 '짜르'에개 특사를 보냈고 북한의 '최고 존엄'이 가게무샤가 아닌지 판단하기 위한듯 부부 동반으로 또 '백두 혈통 김씨 왕조'의 최고실세 모두를 베이징에 호출했다.

본격적으로 고래들의 게임이 벌어지기 시작됐다. <盲瞰圖子>

黃遵憲, 원나라 쿠빌라이 '중도'로 불리던 현 베이징을 '대도'로 명명, 중국 국무원 티베트 판첸 라마에 달라이 라마 직무 대행명령, 2001년 제5차 ㅇ 인구 센서스 발표, 스페인 프랑코 장군 마드리드 입성

1950년 3월28일 중국 대륙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국부군 병력이 시캉(西康)성-현재 쓰촨(四川)성 서부와 시짱(西藏)자치구(티베트) 동부를 관할했다-시창(西昌)에서 철수함으로써 대륙에서 중화민국의 국기인 청천백일기가 모두 자취를 감추고 대륙 전체가 공산군에 완전 장악되었다.

장제스(蔣介石) 국민정부군의 압도적 우세 속에 시작된 국공내전이 시작된지 4년 만에 공산군이 완승한 것이다.

중국공산당이 대륙에서 국민당의 국부군을 완전히 몰아낸 이 상징적 사건은 스탈린과 김일성을 자극, 이해 6월 남한 침공으로 이어졌다.

김일성은 중국의 적화에 고무되고 그 기세에 힘입어 한반도의 무력적화 통일을 이루려는 생각이었다.

스탈린은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마오쩌둥의 중국이 날로 소련의 이익을 거스르려 할 것이라고 판단, 한반도에 친소 통일국가를 수립하여 중국의 ' 뒤통수를 겨냥하는 망치' 로 만들려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김일성과 스탈린의 예상과는 달리 미국이 전쟁발발과 함께 적극 군사 개입했다.

국공내전에서 국민정부에 막대한 군사원조를 하면서도 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았고 내전 말기에는 국민정부 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미국은 한국전에는 발발 때부터 적극적으로 군사 개입했다.

결국 스탈린과 김일성의 동상이몽은 실현될 수 없었다.

스탈린은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가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한반도에서의 군사 개입 골든 타임을 놓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이는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뮌헨협정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병탄을 수수방관했던 영국의 태도에 고무되어 폴란드의 단치히 회랑을 접수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치명적 오산이었다.

김일성은 중소 간 갈등 구조와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 사이 대립이라는 거시적 차원의 국제 역학관계를 파악하지 못했다.

국공내전이 실상과는 별개로 토지개혁과 반토지개혁 세력 간 내전의 프레임을 유지했던 것과는 달리 한국전은 대한민국 정부의 토지개혁 실시와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에 의해 개전 초부터 냉전프레임을 가릴 수 없었고 도리어 이를 분명히 하였다.

다음은 2차 국공내전의 주요 일지다.

<중국 2차 국공내전 일지>

1946년 7월 = 국부군과 공산군 간 충돌이 본격화함.
1946년 11월9일 = 저우언라이 등 중공 대표단 난징서 연안으로 철수 2차 국공합작 공식적 와해. 이후 국공내전 본격적으로 전개.

1947년 3월13일 = 국부군 옌안 공격 개시로 연안 공방전 시작. 옌안 공방전에서 국부군은 옌안을 한때 점령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공산군의 작전상 후퇴로 전열을 정비한 공산군에 의해 각개격파됐다. 이후 공산군은 수세에서 반격을 본격화하였다.

1948년 9월12일 = 랴오선 전투(遼瀋 戰役) 개시

1948년 11월2일 = 선양 공산군에 함락됨으로써 랴오선 전투 종료
1948년 11월6일 = 화이하이 전투(淮海戰役) 개시

1948년 12월5일 = 핑진 전투(平津戰役) 개시

1949년 1월10일 = 화이하이 전투 공산군 승리로 종료

1949년 1월31일 = 베이핑 수비 국부군 항복으로 핑진전투 종


1945년 2월25일 = 국민정부 최대 함정 충칭호 공산군에 투항

1949년 4월 21 = 양쯔강 도하 전투(渡河戰役).

1949년 12월27일 = 국부군 대륙 내 최후 주요군 공산군에 섬멸. 이로써 대륙 내 국부군이 소멸됐다.

1950년 3월28일 = 중국 대륙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국부군 병력이 시캉(西康)성-현재 쓰촨(四川)성 서부와 시짱(西藏)자치구(티베트) 동부를 관할했다-시창(西昌)에서 철수.

1955년 1 20일 = 대만이 장악하던 저장(浙江)성 연안 이장산다오(一江山島)가 중국 육해공군의 합동 공격으로 함락됨. 이 섬을 지키던 대만 군병 720명이 전사하였다.

1959년 = 중국 국무원이 시짱(티베트)군구에 티베트의 반공봉기를 진압하도록 명령하고 판첸 라마로 하여금 달라이 라마의 직무를 대행하게 하였다.

1905년 =‘조선책략’의 저자이며 원자바오(溫家寶)전 총리가 총리 재직 시절 자주 시를 인용했던 청말의 정치가 황준헌(黃遵憲, 사진)이 타계하였다. 1848년생으로 향년 57세였다.

그가 타계할 당시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세를 잡아가던 때로 그가 조선책략을 통해 밝힌 새로운 동북아 질서 구상이 완전히 폐기되기 직전이었다.

광둥(廣東) 가저우(嘉州 : 현 메이)현 출신이며 자는 공도(公度)이다. 덕종(德宗) 광서제(光緖帝) 때 과거에 합격하였다.

주일대사관 참찬(參贊 : 참사관), 샌프란시스코 총영사. 주영대사관 참찬과 주싱가포르 총영사 등을 역임했다. 주일대사관 참찬으로 있을 때 김홍집(金弘集)에게 개국 이후 조선의 외교 정책 방향을 조언한‘사의 조선책략(私擬 朝鮮策略)’을 작성하여 주었다.

[북핵위기] 신조선책략(新朝鮮策略)

황준헌은 일본 명치유신의 역사와 영국의 정치제도를 깊이 연구, 서방을 배우고 또 서방에 중국문명을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교관으로서 그는 화교의 권익보호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1894년 귀국한 뒤 강학회(强學會)에 참가하였으며 자비로 시무보(始務報) 등을 창간하였으며 호남순무(湖南巡撫) 진보잠(陳寶箴)을 도와 새로운 개혁정치를 펴다 탄핵당하였다.

황준헌은 일본의 정치, 역사, 인문, 지리 등을 체계적으로 소개한 ‘일본국지(日本國志)’를 저술하기도 했다.

황준헌은 시인으로도 유명한데 그의 작품은 근대 중국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어 그의 작품을 두고‘시사(詩史)’라고 하기도 한다.

원자바오는 중요 연설, 혹은 담화에서 황준헌의 시를 자주 인용하곤 하였다.

2001년 = 제5차 전국 인구센서스 결과 공포.

국무원 인구센서스 영도소조 부조장 주즈신이 밝힌 바에 따르면

중국 총인구 12억9533만 명

중국 대륙의 31개 성, 시, 자치구(푸젠성의 진먼 마쭈 제외) = 12억6583만명;

홍콩 특별행정구 = 678만명(2000년 6월30일 현재)

마카오 특별행정구 = 44만명(2000년 9월30일 현재) ;

대만(진먼, 마쭈 포함) =2228만 명(2000년 12월 현재).

지난 10년 4개월 동안 중국 대륙에서 1억3215만 증가(11% 증가)

연평균 증가율 1.07%로 매년 1,279만명 씩 증가하고 있다.

2014년 말 중국 인구는 전년 대비 710만명 늘어난 13억6782만명에 달한 것으로 집계됐다.

유엔은 2015년 9월11일 발표한 자료에서 중국 인구를 13억8000만명으로 집계했다.

1272년= 원 세조 쿠빌라이가 수도의 이름을 중도(中都)에서 대도(大都)로 고침.

대도는 바로 현재 베이징(北京)을 말한다. 쿠빌라이는 중서성을 대도에 두어 대도를 원 치하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삼았다.

<세계사 속의 오늘>

프란치스코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파시스트 반란군이 수도 마드리드 입성, 좌파 인민정권을 붕괴시킴으로써 3년간에 걸친 스페인 내전이 종식됐다(1939). 하지만 유럽에 평화가 도래한 것도 잠시였다.

스페인 내전 당시 각각 파시스트 진영과 좌파 정권을 군사적으로 지원했던 나치 독일과 소련은 프랑코 장군의 마드리드 입성 5 개월 뒤인 이해 8 23일 독소불가침 조약을 맺어 세계를 놀라게 했고 이는 9월에 2차대전 발발로 이어졌다.

물과 기름 관계인 나치즘과 볼세비즘 간 이 조약 체결을 두고 당시 언론들은‘미녀와 야수의 결혼’, ‘천사와 악마의 결혼’에 비유했다.

이 결혼은 폴란드 분할이라는 기형아를 탄생시키고 바로 다음해인 1940년 프랑스를 패망시켰으나 도버해협에 가로막힌 나치 독일이 1941년 6월22일 소련을 기습 침공함으로써 불과 2년도 못 가서 파탄을 맞았다.

2018/03/28 14:12


경제| IT | 사회 | 정치 | 양안 | 문화 | 대만 | 홍콩 | 한중Biz | 한반도 | 인물동정

 
Copyright 2000 ChinaWatch.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