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4/23 06:21



[今天歷史-3월29일]中 한국전 휴전 거부...소통 속도 차

2018년 3월28일(한국시간 29일 새벽)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으로부터 지난 25일부터 27일까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방중과 북중 정상회담에 관해 메시지를 전달받았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이 자신과 만남을 고대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시 주석이 전한 사실을 밝히면서 북핵 문제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북미 정상회담에 대해 낙관했다.

트럼프가 "어제 밤" 시진핑의 메시지를 전달받았다고 밝힌 점으로 볼 때 시진핑은 김정은을 배웅한 뒤 얼마 안 지나서 트럼프에게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짐작된다.

67년 전 한국전쟁 당시 미국과 중국은 휴전회담 제의와 거부를 격식을 차린 그리고 인터벌이 긴 외교 문서교환 방식으로 보내고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의사 전달 방식은 상대방의 의중을 판단하는데 혼선을 가져올 가능성이 짙다.

미국과 중국은 각각 만주 폭격을 주장한 맥아더를 해임하고 더 이상 남진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막대한 인적 손실의 희생을 치룬 뒤 소련의 중재로 휴전회담에 들어갔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은 긴밀한 소통 통로 부재로 인해 소련에 세계전략적 어부지리를 키우는 지리한 소모전의 늪에 2년 이상 빠져 있어야 했다

오늘날 미국과 중국 최고 지도자 간 소통 방식은 광속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각자의 이익을 헤아린 판단이 문제일뿐 소통 방식에 따른 오해와 혼선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김정은의 북한은 중국에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도움을 요청하는데 있어 신뢰 부재로 직접 권력 헤드쿼터가 통째로 이동하여 중국 지도부와 얼굴을 마주해야 했고 이동 방식도 경호 문제 등이 겹쳐 열차 이용이라는 19세기적 방식을 채택했다.

광속의 소통 수단도 항공편도 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김정은이 평양으로 돌아와 북중 정상회담을 자신의 버전으로 알리기 훨씬 전에 미국과 중국은 광속의 소통을 한 것으로 보인다.

67년 전 미국과 중국은 소통상 똑같은 처지여서 장님 문고리 더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지금은 극히 비대칭적이다

적어도 외교소통 방식으로 국한하면 미국과 중국이 '스타워즈' 소통이라면 북한은 '워털루 회전' 소통이다. <스위프트-버크왈드>

莫 崇洋媚外, 미군 베트남 철군 완료, 국민당 항일 건국 강령 제정, 왕징웨이 친일 괴뢰정권 수립

1951년 3월29일 = 중국, 미국의 한국전 휴전회담 제의 거부. 1950년 10월 예상치 못한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음해인 1951년 1월4일 다시 수도 서울을 내주어야 했던 유엔군은 1월 말부터 반격을 개시, 서울을 재탈환하고 3월 말에는 중공군을 38선 이북으로 일단 밀어부쳤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은 38선 이북으로 전진할 것이냐의 문제에 직면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전쟁 발발 이전과 같이 38선을 경계로 하여 전쟁을 끝내고 싶어했다.

38선으로 유엔군이 접근하던 3월 초순부터 휴전 제안 애드벌룬이 미국 측에서 피어올랐다.

3월12일 미국 8군 사령관 릿지웨이 장군은 38선 이북으로 적을 쫓아낸 뒤 휴전한다면 대승리라고 말했으며 국무부도 정전문제를 거론하였다.

그러나 맥아더는 3월24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한국전은 '새로운 전쟁'으로 변했다며 전쟁의 완전한 승리를 위해 만주폭격론을 주장하고 트루먼 행정부 내 정전 분위기에 쐐기를 박으려 하였다.

맥아더가 확전 성명을 발표한 날은 미군이 38선을 다시 돌파한 날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미국의 휴전 제의를 거부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응수해야 할 트루먼 행정부는 미국 내부 더 나아가 미군 내부의 서로 극히 상반된 메시지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고 이는 1951년 4월11일 맥아더를 유엔군 총사령관 직을 포함한 모든 직책에서 해임함으로써 구현됐다.

트루먼은 미군이 북진하더라도 중공군의 참전은 없을 것이라던 맥아더의 판단이 참담한 결과를 가져온 착오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소련의 참전을 배제한 '새로운 전쟁론.을 더는 신뢰하지 않았다.

또한 맥아더의 태도가 문민통제의 전통을 무시하고 있다고 판단한 점도 작용했다.

맥아더의 후임은 릿지웨이였다. 트루먼 행전부는 휴전 쪽으로 입장을 명확히 한 뒤 공을 상대방 쪽으로 넘긴 것이다.

결국 이해 6월 유엔 주재 소련 대표의 정전 제안으로 한국전은 미국이 소련의 개입으로 인한 3차 대전의 발발을 우려, 완전한 승리를 포기한 가운데 휴전회담과 치열한 전투가 병존하는 소모전 양상으로 접어들었다.

1917년 차이위안페이(蔡元培)는 칭화(淸華)학교 고등과에서 행한 강연에서 외국에 유학하는 학생은 외국의 사상, 언어, 학술을 흡수하고 소화하여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야지 동화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칭화학교(현 칭화대학)는 미국이 1900년 북청(北淸)사변(의화단 사건)의 전쟁 배상금을 포기함에 따라 세워진 학교로 초창기 외국 유학생을 교육하는 기능을 주로 하였다.

차이위안페이 강연의 요지는‘서양을 숭배하고 외래 문물에 미혹되서는 안된다(莫崇洋媚外)’로 요약되었다.

그는 유학을 앞둔 학생에게 타국으로 간 중국 유학생은 과학 수준을 충분히 습득하지 못한 채 모방에 급급, 자신의 특성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이같이 당부한 것이다.

차이위안페이는‘자신(我)’을 중심으로 하여 (외국 문물을) 먹고 소화해야 하며(食而化之) 동화되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1993년 = 제8기 전인대 1차회의에서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개정 헌법은 국가가 사회주의 시장경제을 실행한다고 규정했다.사회주의 시장 경제가 중국식 시장경제라고 한다면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덩샤오핑은 차이위안페이의 지침을 잘 소화했다고 하겠다.

1938년 = 우한(武漢)서 국민당 전국대표대회 개회.

이 대회에서

1.‘항일건국강령’ 제정 통과,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총재, 왕징웨이(汪精衛) 국민당 부총재 선출,

3. 민국참정회 성립,

4. 삼민주의 청년단과 중앙조사통계국 설치가 결정되었다.

이로부터 2년 뒤 바로 같은 날 왕징웨이는 일본군과 협력하는 난징(南京) 괴뢰정부를 세우고 천도(遷都) 행사를 가졌다.

세계사 속의 오늘

남부 베트남에서 미국의 마지막 군대가 철수했다(1973). 이로써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은 11년 만에 끝났다.

이로부터 불과 2년 뒤 남부 베트남은 북 베트남의 공격으로 패망했고 베트남은 통일되었다.

2018/03/29 14:14


경제| IT | 사회 | 정치 | 양안 | 문화 | 대만 | 홍콩 | 한중Biz | 한반도 | 인물동정

 
Copyright 2000 ChinaWatch.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