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12/14 06:07



[今天歷史-3월31일]유엔군, 휴전회담 재개 수락...끝날때까지 끝난게 아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포수 출신 미국 프로 야구의 '전설' 요기 베라가 현역 시절 자신이 속한 뉴욕 메츠 팀이 9.5 게임 차로 지구 순위 최 하위에 처져있을 때 한 기자가 "시즌이 끝난 뒤의 계획이 무엇인가"라고 한 질문을받고 응수한 동문서답 식 우문현답이었다.

메츠는 그 해 월드시리즈에 진출햇다.

정치 세계에서 정상에 올랐거나 정상에 근접 한 사람들이 일찌감치 '시즌 아웃 '하는경우가 적지 않다.

마오쩌둥과 함께 1920년 중국에 마르크시즘과 특히 레닌주의를 도입한 리다자오 밑에서비밀 학회 활동을벌였고 중국 공산당 창당의 주역이 된 장궈타오는 1938년 마오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베, 공산당에서 출당되었다.

장궈타오는 마오가 죽은 뒤 3년 후인 1979년 사망하였으니 공산당 출당 뒤에도 41년을 더 살았다.

생물학적 삶과는 별도로 그의 정치목숨은 불혹에 사실상 끝이 낫다.
마오에 앞서중국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가 됐었던 왕밍도 마오에 밀려나 정치적 핍박을 받던 중 1956년소련으로 망명햇다. 지천명 이태 뒤였다. 그는 18년 을 더 살았으나 권토중래를 이룩하지 못하고 마오 보다 2년 먼저 갓다

1953년 3월의 마지막 날 유엔군 측이 중국군이 앞서 한 휴전 회담 재개 제안을 수락했을 때 세계는 '한국전 시즌'의 결말은 실질적으로 결정된 것으로 보앗다. 요기 베라에게질문을 한 메이저리그 스포츠 기자처럼.

미국은꼭 2년 전인 1951년 3월 한반도 허리에서 분단 상황을 유지하는가운데 전쟁을 끝마치려 결심했다. 일찌감치다시 한 번 압록강과 두만강의 한만 경계선까지 올라가지는 않겠다고상대 측에 패를내보인 것이엇다.

공산 중국도 현해탄까지밀고 나가겠다는과대망상의 꿈을 치열한 소모전을 통해 혹독한 희생을치루고 나서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중 간극 벌리기의 소련 어부지리 세계 전략에 따라 한반도에 '혈우병 증세'를연장시키던 스탈린이 1953년 3월 5일 사망하자 한반도의 빅부라다더 3자는 의미 있는 휴전회담 재개 합의에 도달할 수 잇엇다.

중국이소련에서 스탈린이란 휴전 걸림돌이사라지자 중단된 휴휴전 회담 재개를 제의했고 유엔이 만우절 하루 앞서 이를수락했다.

이처럼 '한국전 시즌'은 끝내기 수순에 접어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게임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빅브라더 3자'가 '메스'를 넣어둔채 봉합하려 하자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초강수의 패를 1953년 6월 18일 던졌다.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처칠이 면도를하던 중 그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뺨이 베이기 까지 하였다는 일활를 남긴 이승만의 회심의 승부 수는 요기 베라의팀이 월드시리즈에진출한 것처럼 이승만에게 한미 방위 조약 체결이라는 '완전한 승리'는아니지만 '의미있고 소중한 소득'을쟁취하게 하였다.

끝날 때까지끝난 것이 아니다'라는불퇴전의 자세를 가져도 게임은 일찌감치 끈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장궈타오가 그랫듯, 왕밍도 그러햇듯이. 더나아가 장제스처럼.

하지만 요기 베라처럼 , 이승만의경우처럼 끝나지 않았다는자세로반전을 엿보고 자신에게 유리한 기회를 부단히 도모하는 인물들에게는 끝나지 않은 보상이 찾아 올 수도 잇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게임은 일찌감치 확실하게 끝난다는 점이다.

북한 핵 위기가 엎치락 뒤치락 하고 있다.이미 끈났다고 생각하는사람들에게는일찌감치끝난 것이다. 그러 끝날때까지끝이나지않앗다는 이이에게는 우리입장에서유리한 것이든 불리한 것이든 아직 끝난 것은 분명아니다. <스위프트-버크왈드>나

北京대 마르크스주의 연구회, 張國燾, 달라이 라마 대만 방문, 대만 관광객 중국서 해상 강도단에 집단 살해 당해, '변법 운동' 지도자 강유위 사망, 마카오 기본법 통과, 미국 켈리 중위 베트남 민간인 집단 살해 혐의로 종신형, 미국 페리 제독-일본 도쿠가와 막부 개항 조약 체결

1953년3월 31일 = 유엔군, 중국의 한국전 휴전회담 재개 제안 수락.

1920년 월 31일 베이징(北京) 대학에서 마르크스학설 연구회가 정식으로 성립됐다.
이 연구회는 중국에 마르크스주의 학설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리다자오(李大釗)가 주도하여 비밀리에 결성했다. 주요 구성원은 덩중샤(鄧中夏), 뤄장룽(羅章龍), 가오쥔위(高君宇), 장궈다오(張國燾) 등이었다.

이 학회는 마르크스 학설 관련 중국과 외국의 서적을 수집, 마르크스 주의 논저를 간행하고 토론회와 강연회를 여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 학회가 정식으로 발족되기 전인 1918년부터 1919년 사이 베이징대 도서관 관장으로 있던 리다자오의 밑에서 사서로 일했던 마오쩌둥(毛澤東)도 이 모임에 참석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마오는 정식 대학생이 아니었지만 이 모임에서 고대 중국 사상들과 사회주의를 결합시키려는 시도로 인해 주목을 끌었다고 한다.

1919년 5 · 4운동을 이끈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리다자오는 ‘마르크스의 역사철학과 리케르트의 역사철학’ 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1927년 군벌 장쭤린(張作霖)군에 의해 교수형으로 처형됐다. 1889년 생으로 사망 당시 향년 3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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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 이해 3월 23일 개막되었던 중공중앙 정치국 확대회의가 옌안(延安)에서 폐막되었다.

이 회의는 ‘장궈타오 동지의 착오에 관한 결정(關于張國燾同志錯誤的決定)’을 채택하고 전당에 장궈타오의 착오에 대해 강력한 투쟁을 전개할 것을 촉구했다.

장궈타오는 서면을 통해 탈당서를 제출했고 중공중앙은 1938년 그의 당적을 박탈했다.

이로써 마오쩌둥의 당 지도권을 위협할 가능성이 높았던 2 명중 한 사람이 제거됐다. 나머지 한 사람은 ‘28인의 볼세비키’의 리더인 왕밍(王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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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궈타오는 홍콩으로 망명하였으며 1968년 캐나다에 이주하였다. 그는 마오가 죽은 지 3년 뒤인 1979년 캐나다의 한 양로원에서 쓸쓸하게 사망했다.

한편 왕밍 역시 중국 공산 정권 수립 후인 1956년 모스크바로 망명했고 그 곳에서 귀국하지 못하고 1974년 사망했다. 마오 사망 2년 전이다.


장궈타오(張國燾 :1898∼1979)

중국 정치가. 장시(江西)성 출생. 베이징(北京)대학 재학 중에 리다자오(李大釗) 등과 마르크스연구회를 조직하였고 1919년 5·4운동 때는 학생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으며 1921년 중국 공산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27년 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어 난창(南昌)폭동에 참가하였으나, 남정(南征)중에 패하여 모스크바로 갔다.

1931년 귀국한 뒤로 장시에 수립된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냈고, 장정(長征)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산베이(陝北)를 향해서 북상하기로 한 마오쩌둥(毛澤東)의 방침에 반대하고, 쓰촨(四川)성과 시캉(西康)성에 근거지를 둘 것을 주장하여 1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결국 뒤에 산베이에 합류했지만, 마오쩌둥과 의견이 맞지 않아 1938년 당적(黨籍)을 박탈당하고 홍콩으로 망명하였다가 1968년 캐나다에 이주한 뒤 그곳에서 죽었다.



2001년 =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대만을 방문했다. 달라이 라마는 10일간 대만에서 머물렀다.

1994년 = 대만 관광단 24명이 저장(浙江)성 첸다오후(千島湖)를 관광하던 중 현지 해상강도단의 습격을 받아 배의 승무원 8명과 함께 전원 살해당한 뒤 불태워졌다.

1927년 = 청나라 말기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을 본 뜬 변법자강(變法自疆) 운동을 이끈 강유위(康有爲)가 칭다오(靑島)에서 사망했다. 향년 70세.

1993년 = 중화인민공화국 8기 전국인민대표대회 1차회의에서 ‘마카오 특별행정구 기본법’을 통과시켰다.

이는 1987년 4월 13일 중국과 포르투갈 정부가 마카오 문제에 관한 공동성명을 통해 중국이 1999년 12월 20일까지 마카오에 대한 주권을 회복하기로 합의한데 따른 후속조치이다.

세계사 속의 오늘>

남부 베트남 밀라이촌 양민 학살을 지휘한 윌리엄 켈리 중위에게 1심에서 종신형이 선고됐다(1971).

켈리 중위는 부녀자를 포함, 100명의 주민을 학살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20명의 주민을 학살한 혐의만이 인정되었다. 이는 미국 역사상 최장기의 전범 재판이었다.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M.C. 페리제독과 일본의 도쿠가와(德川) 막부 정부가 개항조약을 체결함으로써 200여년간 지속되던 일본의 쇄국정책이 폐기됐다(1854).


2018/03/31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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