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9/20 05:58



[今天歷史-4월3일]총장비부 창설...美따라하기 질적 변화

공산중국 수립 이후 모든 면에서 '소련 따라하기'가 중국의 대세였다. '일변도 정책'으로 불렀다.

수도 베이징 중심가 인민대회당을 비롯한 주요 건축물에서 소련풍을 엿볼 수 있는데 정권 수립 후 상당 기간 소련 따라하기의 한 사례다.

이념 분쟁으로 소련과 관계가 적대적이 되었을 때에도 모든 영역에서 소련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했다.

코페루니쿠스적 전환의 계기는 미중화해이고 이에 박차를 가한 것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다.

과도 기간을 거쳐 중국의 모델은 여러 부문에서 미국으로 바뀌었다.

현재 중국 외교부는 매주 5차례 내외신 브리핑을 갖는데 이는 미국 국무부의 '정오 브리핑(Noon brirfing)을 본뜬 것이다. 이를 도입한 인물은 한중수교 당시 외교부장이던 첸지천으로 그가 시문사장(공보국장) 때였다.

도입 초에는 목요일 한 차례였으나 1990년대 후반 두 차례로 늘렸다가 평일로 자리를 잡았다.

군사 부문에서 미국 따라하기는 1985년 덩샤오핑 군사위 주석의100만 감군이다

'인해 전술'이 상징하는'대병력 전근대적'의 인민해방군이 현대적 군대로 탈바꿈을 시작하기 위한 첫 걸음이었다. 이는 다른 측면으로는 '미국 따라하기'였다.

한국전에서 현대적 미군에 혹독히 당했던 참전 중공군 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에 의해 시도되었으나 마오쩌둥에 의해 좌절되었다가 덩에 의해 30년 만에 부활한 것이다.

두 번째 미국 따라하기는 1998년 총장비부 창설이다. 이는 1991년 걸프전을 통해 미군 첨단 무기의 위력을 실감햇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번의 따라하기가 '중체서용(中體西用)' 이라면 '탈중입미(脫中入美)'의 미국 따라하기는 2016년 2월 시진핑에 의한 환골탈태(換骨奪胎)의 군 전면개편 개혁이었다.

그 핵심은 총부 체제를 페지하고 대신 중앙군사위 직속의 15개 전문 부서로 바꾼 것이었다.

국공내전 승리 이전에 성립된 총정치부, 총참모부와 총후근부의 3총부 체제는 1998년 총장비부 신설로 4총부 체제로 전환되었으나 총부가 인민해방군의 수뇌 역할을 한다는 그 틀은 유지되었는데 마침내 시진핑에 의해 역사의 뒷장으로 넘겨진 것이다.

이를 계기로 공농 홍군에서 출발한 공산중국의 군은 2016년부터 미군을 모델로 하며 그에 근접한 현대적 첨단군으로 새 출발한 것이다. <盲瞰圖子>

네이멍구 자치위 , 달라이 라마 뉴욕에 티베트 연락 사무소 설치, 베트남전 사상자 수 공표, 제주도 4·3 사건

1998년 4월3일 중앙군사위 결정에 따라 인민해방군 총장비부가 신설되었다.

이로써 인민해방군의 지휘조직은 기존‘총정치부’, ‘총참모부’, ‘총후근부’ 등 3총부에서 ‘총장비부’가 추가된 4총부가 되었다.

총장비부는 전군의 무기장비에 관해 통일적 영도를 하여 국방과 군대 현대화를 촉진하는 것을 주임무로 삼았다.

중국이 총장비부를 신설한 배경에는 1991년 걸프전 당시 각종 첨단무기를 앞세운 미군에 쿠웨이트를 점령한 이라크군이 단기간에 무너진데 대한 중국 지도부의 충격이 깔려있다.

초대 총장비부장은 차오강촨(曹剛川)으로 후에 국방부장을 역임했다.

4대 총부 체제는 2016년 2월1일 시진핑의 군개편에 따라 폐지되고 중앙군사위 직속의 15개 부문으로 개편됐다.

[今天歷史-2월1일] 중국군 5대전구, 대만 네덜란드 축출

1946년 = 열하(熱河 '러허)성(국민정부 시절 베이징 북부 지역에 있던 성으로 공산화 이후 폐지됐다) 청더(承德)에서 네이멍구(內蒙古) 자치운동위원회가 성립되었다.

조직은 소련 조종 하에 이루어진 괴뢰 조직으로 일본이 괴뢰국 만주국을 성립시키기 위해 밟았던 수순을 연상시켰다.

이는 소련이 러시아 이래 중국에 가지고 있던 제국주의적 이권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이 통일되기 보다는 분열 상태를 유지하기를 바랐던 증거 중 하나이다.

1964년 = 달라이 라마 뉴욕에 티베트 연락사무소 설치.

세계사 속의 오늘

베트남이 베트남 종전 20주년을 앞두고 베트남 전쟁 기간 베트남인의 전사상자 수를 발표했다(1995).

발표에 따르면 미국의 참전(베트남은 분단된 1954년을 그 시점으로 보고 있다) 이후 21년 동안 지속된 베트남전에서 인민 총사상자 수는 800만으로 집계됐다.

항목별로는 전투원 중에서는

           
전사 110만 명,

실종자 30만 명,

부상자 60만 명,

비전투원은

피살자 200만 ,

부상자 200만.

화학무기로 인한 부상자
200만 명이었다.


한국사 속의 오늘

제주도 4·3 사건이 발생했다(1948). 남로당 제주도당이 이해 5월10일 실시되는 제헌의회 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일으킨 무장 봉기 이후 발생한 무장 충돌과 제주도민의 소요 사태 및 토벌·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대다수 양민이 희생된 사태를 총칭한다.

1954년 9월10일까지 지속된 이 사건으로 당시 6만여명의 제주 도민 중 1만50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4·3 희생자 추념식은 2014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2018/04/03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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