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10/21 08:42



[今天歷史-4월4일] 홍콩기본법과 명보 시양 기자 구속

...‘닭’잡아 ‘당나귀’길들이기

중국에서 홍콩으로 이주하여 홍콩 최고 권위지 명보에서 기자로 활동하던 시양 기자가 1993년 중앙정부 금융기사를 보도한 뒤 당국에 체포되었을 때 홍콩 언론가에서는 '닭잡아 당나귀 길들이기'라는 분위기였다.

결국 중국 정부는 이 비유를 입증했다.

①중국 법원은 홍콩기본법 반포 4주년 기념일에 맞추어 시양 기자에게 12년형을 선고햇다(나흘 전인 3월31일 선고했으나 홍콩에 알려지기는 4월 4일이었다).

②시 기자에게 적용된 죄목은 국가기밀 절취와 탐지죄로 간첩죄였다.


④ 10년을 넘긴 장기형과 죄목은 '제5의 현대화' 즉 민주화를 요구하며 1978년 말 '베이징의 봄' 등을 주도하다 체포된 '중국 민주화 정치범 1호' 웨이징성이 선고받은 형량 14년형을 연상하게하는 중형이었다,.

홍콩 언론계가 들끓었다. 3년3개월 후로 박두한 홍콩 주권이양 뒤 홍콩 언론 자유가 심각하게 위협받을 위기 의식 때문이었다.

홍콩 반환 전에도 이러니 홍콩기본법이 규정한 '고도자치 보장'과 '홍콩 관습 유지' 그리고 '사회주의 제도 불강요'가 휴지조각이 될 것이라는 논리였다.

그러나 중국 당국의 입장은 확고했다. 시양의 신분이 영국 식민지 홍콩의 시민이지만 국적은 여전히 중국이고 홍콩의 유력지 명보의 기자이기는 하나 그의 중국 내 취재 할동은 중국법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름 타당한듯 보엿으나 형량과 적용 죄목으로 중국 사회주의 법의 뜨거운 맛을 과시했다.

시양의 보도 내용은 오보가 아니었다. 보도로 인해 중국 경제가 타격을 받았다는 이유를 대더니 물증을 제시하지 못한 국가기밀 절취죄와 탐지죄를 적용한 것이다.

'고도의 정치 판결'을 내인 중국 사법부는 홍콩 주권 반환 반 년 전인 1997년 1월 시양 기자를 가석방 형태로 풀어줬다. 두말할 것 없이 '고도의 정치적 석방'이었다.

그 사이 '당나귀'들은 상당히 길들여졌다.

시양 기자가 체포되기 보름 전 호주 출신 영국 언론계 재벌 루퍼트 머독 소유로 홍콩 최대 영자지 사우스 아시아 모닝 포스트지가 다소 황당한 중앙정부 비리 보도를 했다가 1면에 대대적 사과 사고 기사를 내고 그 당일날 머독의 지분이 말레이시아 화교 재벌에게 넘어갔다.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는 당시 친영 반중 기사로 인해 영국 식민정청의 기관지라는 비아냥을 받았다.

'떠나갈 주인'에 충성을 바치다가 '새주인이 오기도 전에 충성 대상을 바꾼 셈이다.

홍콩 최대 영자지에 이어 홍콩 최고 권위지에 대한 매서운 손보기였다.

'썩어도 준치'라는 말처럼 홍콩 언론은 현재도 나름의 언론자유를 견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당나귀는 과천 고개를 넘기도 전 산자락 밑에서 부터 기기 시작했다는 점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상태가 장기 진행되자 오프 프레스와 브로드캐스팅 언론 자유활동 움직임이 태동됐다. 2014년 도로를 점거하며 '우산혁명'을 일으킨 홍콩의 젊은 신세대가 그 주역이다.

그들이 홍콩기본법이 보장한 고도 자치와 관습 보장을 지켜내고 있는 것이다. <스위프트-버크왈드>

中正기념당, 席揚, 마오쩌둥 "난징정부 어디로 가는가", 국군 개성 다시 입성, '아버지'부토 처형, 킹 목사 암살

1990년 4월4일 중국 7기 전인대 3차회의가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 기본법(약칭 홍콩기본법)’을 통과시키고 같은 날짜로 공포했다.

홍콩기본법은 홍콩의 주권을 이양받을 1997년 7월1일 시행에 들어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홍콩기본법은 10장 160조로 되어 있으며 별도로 서문과 3개 부칙이 있다.

기본법 서언은 중국 헌법 31조 규정에 근거, 홍콩특별행정구를 설치하며 ‘일국양제(一個國家 兩種制度)’의 원칙 아래 홍콩에서 사회주의 제도와 정책을 실시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제1장 총칙에서 홍콩특별구는 기존의 자본주의 제도와 관습을 유지하며, 이는 50년 동안 불변이라고 규정됐다.

2장‘중앙과 홍콩 특별행정구 관계’에서 “홍콩 특별행정구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고도자치를 향유하는 하나의 지방 행정구로서 중앙 인민정부의 직할 하에 있다”라고 규정했다.

1994년= 중국 법원은 홍콩 명보의 시양(席揚) 기자에‘국가기밀 절취 및 탐지죄’로 12년형을 선고, 홍콩 각계의 격렬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사건은 홍콩의 주권반환을 앞두고 홍콩 언론에 대한 중국의 길들이기 작업의 일환으로 평가되었다.

추억...특종의 代價, 홍콩언론의 경우 2004/09/26 20:20

NYT 베이징지국 趙岩 기밀누설혐의 정식구속 2004/10/21 21:44

1980년 = 중정(中正) 기념당 낙성식이 장징궈(蔣經國) 대만 총통에 의해 주관되었다. '중정'은 장제스의 호이다.

장제스의 생년 89년에 착안하여 89계단을 오르면 2층에 장제스의 거대한 동상을 마주 하게 된다. 각종 공연과 행사를 치룰 수 있는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대만 민진당은 집권 시기(2000~2008) 후반기 대독(台獨) 추진 정책의 일환인 ‘정명(正名) 운동’에 따라‘중정기념당’의 명칭을 바꾸려 하였다.

'대만 민주기념당'으로 새로운 이름을 제시햇으나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하고 정치적 성향에 따라 달리 불리는 병행 호칭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

2006년 민진당 정부는 타이베이 인근 국제공항의 이름을‘장제스 공항’에서 ‘타오위안(桃園) 국제공항’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는 국민당이 2008년 재집권한 이후에도 환원되지 않았다.

1949년 = 베이징(北京)을 함락하여 내전의 승세를 잡은 마오쩌둥(毛澤東)이 ‘난징정부는 어디로 가는가(南京政府何處去)’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마오는 난징의 국민당정부와 그 군정(軍政) 인사의 앞에는 두 가지의 길이 놓여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 하나의 길은 장제스 전범 집단 및 그 주인이 되는 미국 제국주의자를 추종하여 계속해서 인민을 적으로 돌리는 것으로 이는 그들과 함께 망하는 길이라고 마오는 질타했다.

다른 한 길은 미국 및 장제스와 결별하여 인민의 관용과 용서를 구하는 길이라고 마오는 강조했다.

1951년 = 국군, 개성 입성. 미군의 탱크부대가 서부전선에서 한국전 발발 전 남북 군사분계선 38도선을 다시 돌파한데 이어 한국군이 38도선 바로 밑에 붙어 있는 개성을 수복함에 따라 미국 트루먼 행정부는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새로운 전쟁'에 대한 전략적 선택을 강요받게 되었다.

맥아더 원수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한 '새로운 전쟁'의 최종적이며 확실한 승리를 위해 만주폭격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과의 제3차대전을 우려, 맥아더를 해임하는 결정을 내렸다. 한국군의 개성 재수복 일주일 뒤인 4월 11일 일이었다.

당시 국방장관으로 있던(1950년취임) 조지 마셜 원수가 트루먼의 해임 결정에 캐스팅보트 역할을 했다. 마셜은 맥아더가 해임된지 5개월 뒤인 1951년 9월 국방장관 직에서 물러났다.

멕아더와 동갑(1880년생)인 마셜은 정치 장군이라는 공통점 외에는 모든 면에서 맥아더와 다른 길을 걸었으며 최대 경쟁자였다.

맥아더가 연방정부 산하 국립 육군사괂학교로 별칭이 '웨스트포인트' 출신인 반면 마셜은 버지니아 정부 산하 종합 사관생도 교육 기관인 버지니아 군사학교를 나왔다.

맥아더가 1948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거론됐을 정도로 공화당 골수 지지지자인데 반해 마셜은 트루먼 행정부에서 국무장관(1947~1949)와 국방장관( 1950~1951)을 역임한 '민주당맨'이었다.

마셜은 1차 국공합작 기간(1924~1927) 중국에 파견, 근무한 적이 있으며 2차 국공내전 발발에 앞서 대통령 특사로 중국에 파견 국공협상 중재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1947년 국공합작 실패를 선언하고 귀국한 뒤 국무장관에 임명된 마셜은 '마셜 플랜'으로 유럽 부흥의 기초를 다졌으나 중국 공산화를 저지하지 못했다.

마셜은 중국공산당의 내전 승리가 분명해진 1949년 1월 2차대전 이래 '실질적인 국무장관' 역할을 수행해온 국무차관 딘 애치슨에 국무장관 직을 인계했다.

마셜은 1927년에 중국에 근무했기 때문에 장제스의 상하이 쿠데타로 1차 국공합작이 와해되는 과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장제스 정권에 대해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국무장관 재임 중 중국공산당에 우호적인 국무성 내 '스틸웰 그룹'의 영향 하에 있었으며 유럽 중시파에 기울어졌다.

반면 종전 후 일본 점령군 사령관으로 국공내전을 가까이서 지켜 보았던 맥아더는 중국 공산화가 트루먼 행정부의 실책이라고 판단했다.

만주폭격을 주장한 맥아더의 이런 자세는 미군이 중국으로 진입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거의 모든 당정군 지도부 인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전에 개입한 마오쩌둥의 결정을 정당화 하는 것이다.

마셜은 맥아더의 만주폭격 주장과 워싱턴과 상의 없이 38선 이북으로 진군은 대통령의 권한을 월권하는 것으로 '문민통제'의 원칙을 저버리는 행위로 보았다.

마셜은 195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윈스톤 처칠이었다. 처칠은 회고록 '제2차 세계대전'으로 수상했다.

마셜과 처칠은 2차대전 종전 후 유럽 지역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는 두 주역이다. 또 두 사람은 한국전이 휴전으로 마무리되게 하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햇다.

마셜이 트루먼 행정부 국방장관으로서 맥아더 해임의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여 중국으로 확전을 저지했고 처칠은 영국 총리로서 후에 총리 직을 넘겨주는 이든 외무장관을 앞세워 미국이 한국전에서 빨리 손을 떼도록 부추기는 외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두 사람 모두 유럽 중시주의자로 미국이 아시아에서 전쟁에 발목 잡혀 유럽의 안보를 소홀히 할까 크게 우려했다.

한국전 휴전이 이루어진 해 두 사람에 대한 노벨상 수여는 '유럽의 보은'이라 할 수 있다.

세계사 속의 오늘

파키스탄의 전 총리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교수형으로 처형됐다(1979). 1928년생으로 향년 51세였다.

귀족 집안 출신인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을 거쳐 1952년에 옥스퍼드 대학 법률학 석사와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귀국한 뒤 변호사 개업을 하였으며 1958년 30세에 아유브 칸 군사정권의 상공장관에 임명되었다. 1963~66년 외무장관으로 있으면서 친 중국 정책을 추진하였다.

대통령과 대립하여 정부에서 물러나온 뒤 1967년 사회주의를 지향하는‘파키스탄 인민당’을 창당했다. 인민당은 1970년 총선에서 인민연맹 다음의 제2당으로 부상했다.

1971년 동파키스탄 지역이 방글라데시로 독립하여 떨어져나간 이후 아유부 칸 군사 정부가 붕괴하자 대통령을 거쳐 총리에 취임했으며 토지개혁, 은행과 주요 공업을 국유화하는 등 사회주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1977년 7월 반정부 운동이 격화하는 가운데 지아 울 하크 참모총장의 군사 쿠데타로 실각했다. 하크 군정은 교황을 비롯한 각국 지도자의 구명호소에도 불구하고 정적암살죄로 사형을 언도받은 그를 처형했다.

그의 처형 당시 영국에 유학 중이던 딸 베나지르 부토는 1986년 귀국, 파키스탄 인민당을 이끌었으며 1988년 11월 총선에서 대승, 총리에 취임하였다.

당시 35세인 그는 파키스탄 역사상 첫 여성 총리였다. 그의 부친을 처형한 하크 대통령은 그의 집권 3개월 전인 1988년 8월17일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1990년 8월 칸 대통령에 의해 부패 등을 이유로 해임됐다가 1993년에 다시 총리에 취임하였다.

총리에서 물러난 뒤 각종의 의혹사건으로 곤경을 겪었던 그는 남편과 함께 영국과 아랍 에미리트를 오가며 망명 생활을 했다.

이들 부부는 부패 혐의를 받았으며 스위스에서는 궐석재판을 통해 돈세탁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파키스탄 정국의 변화로 2007년 귀국, 선거유세를 하던 중 암살됐다. 이후 선거에서 그가 이끌던 인민당이 집권, 남편이 대통령에 올랐다..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로 유명한 미국 민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가 테네시 주 멤피스에서 백인 인종주의자에 의해 암살됐다(1968). 1929년생으로 향년 39세였다.

조지아 주 애틀랜타 출생으로 침례교파 목사인 킹 목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마하트마 간디의 무저항 사상을 결합한 비폭력 시민 불복종 방식을 통해 흑인에 대한 법적, 제도적 차별을 타파하기 위한 운동을 남부를 중심으로 전개하였다.

196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미국 정부는 1983년 그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1월 셋째 월요일을 국민경축일로 지정했다.

2015년 3월7일에는 킹 목사의 주도로 진행된 미국 흑인 참정권 운동의 효시인 '셀마 행진' 50주년 기념 행사가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앨러배마 주 셀마 시 현지에서 열린 행사에는 전임 대통령인 공화당의 조지 부시도 자리를 함께 하였고 미국 첫 여성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은 힐러리 로드햄 클린턴 전 국무장관 역시 참석했다.

북대서양 조약이 워싱턴서 체결됐다.(1949)

2018/04/04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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