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4/27 06:20



[今天歷史-4월6일] 덩샤오핑 유엔서 제3세계론, 陳再道...毛 권력균형 맞추기


권력 유지는 저울대의 중심 맞추기와 같다. 정치세계나 경제계에서나 국제관계에서나 모두 이 원칙에 수렴된다.

소련 초대이자 마지막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대통령 직에서 사임하고 소련 체제마저 붕괴한 것이라든가 19세기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가 구축한 유럽 보수반동 체제가 그 자신의 망명과 함게 붕괴된 것도 새력 관계 권력 저울대의 좌우 균형이 되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왼쪽이든 오은쪽이든 기울어지는 것을 방치하다가는 한쪽은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다른 한 쪽은 바닥을 향해 내려간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속도에 가속도가 붙는다. 제때를 높치면 내려가던 한쪽은 바닥을 치게 된다. 그러면 '중심'은 없다. 권력 공백 또는 아노미 단계로 들어간다.

다시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여러 번의 시행 착오를 거쳐야 한다. 좌편향이든 우편향이든 새로 설정한 중심이 지속 가능해질 때까지 저울은 요동친다.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이 그가 우편향하다고 판단한 류사오치를 우두머리로 한 당권파를 쓸어버린 '천하 대란'이다.

권력 저울의 중심은 요동쳤다. 좌편향 중심을 새로 설정한 뒤 이를 지속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좌(左)'의 힘을 빼고 '우(右)'에 힘을 실어주어야 했다.

마오가 문화대혁명의 질풍노도를 통해 탈권에 성공한 후 하방 캠페인을 통해 녜위안쯔, 콰이다푸와 한아이징 등 문혁 돌격대를 숙청한 것과 4인방의 상하이 인민공사 추진을 무산시킨 것이 '좌(左) 무거운 돌' 거두기와 힘빼기라면 천짜이다오와 덩샤오핑은 '우(右) 돌' 보존과 힘 얹어주기'의 아이콘이다

새 '마오 중심'이 안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좌우 모두 자숙해야 했다.

오른편 쪽의 덩샤오핑과 천짜이다오는 좌편향 중심을 흔드는 어떠한 내색도 행동도 벌이지 않았다.

덩이 1974년 4월 유엔으로 가서 마오의 제3세계론을 복창한 것은 그 스스로도 동의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2호 주자파'라는 4인방이 낙인한 '주홍글씨 명찰'을 떼기 위해서였다.

천짜이다오는 기세등등하던 문혁세력에 타격을 가한 1967년 백만웅사 사건으로 군사령관 직에서 해임된 뒤 한 회의에서 마오가 좌중을 둘러 보며 "천짜이다오는 어디잇는가"라고 말한 의도를 이심전심으로 알아 듣고 이후 침묵했고 행동도 자제했다.

조급무모한 4인방과 달리 덩샤오핑과 천짜이다오 등 '좌편향 중심 체제 하의 '우'는 방어적 자세로 권력 저울대가 요동하지만 기울어지도록 하지 않도록 하면서 때를 기다렸던 것이다.

덩샤오핑은 1973년 공식 복권 이후 '2호 주자파'가 아닌 '마오 맨'으로 새 단장한 '덩샤오핑 마쇼르카'는 마오가 죽을 때까지' 벗겨도 벗겨도 마오 맨' 모습이었다.

그러나 마오가 죽은 2년 뒤 '덩샤오핑 마쇼르카'는 더는 '마오맨'의 모습이 아닌 '0호 주자파'의 모습을 드러냈다.

'시황제' 시진핑과 '차르' 블라디미르 푸틴 그리고 '최고 존엄' 김정은의 구권력도 안정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같은 안정은 세력균형에 의한 지속성의 안정이 아니 다.

다른 성격의 균형이다. 공포의 균형이다.

복합 공포 속에 시진핑에게서는 '망신의 공포'가, 푸틴에게서는 '대안 부재의 공포'가 그리고 김정은에게서는 '기관포 공포'가 도드라진다.

세력균형에서는 수면 하 '오리의 물갈퀴질'이 바삐 진행되어야 한다. '공포의 균형'에는 그런 수고가 덜 필요하다. 하지만 한 번에 훅 갈수도 있고 한 번 가면 불가역적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스위프트-버크왈드>

국민정부 은량제 폐지 위안화제 도입, 동진 건국, 파키스탄 인도 공격 가능 미사일 실험 성공, 나치 독일 그리스 침공, 미국 1차대전 참전

1974년 4월6일 덩샤오핑(鄧小平)이 중국 대표단을 이끌고 유엔 제 60차 특별회의에 참석했다.

4월10일 덩샤오핑은 마오쩌둥(毛澤東)의‘재3세계론'에 입각, 중국 외교정책을 설명했다. 그는 중국을 사회주의 국가이며 개발도상국이라고 규정하고 중국은 제3세계에 속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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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은 중국은 제3세계의 기타 국가와 함께 제국주의, 패권주의, 식민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을 강력하게 전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중국의 신성한 국제 의무라고 그는 덧붙였다.

덩샤오핑은 경제노선에서는 마오와 상반된 길을 걸었지만 외교노선에 있어서는 마오의 충실한 수제자였다.

덩샤오핑은 집권 이후 제3세계의 지도국이라는 입장에서 이탈, 미국에 적극적으로 접근했다.

담 이를 마오의 외교노선에서 이탈한 것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화해의 물꼬를 튼 사람은 다름 아닌 마오쩌둥이었기 때문이다.

1993년 = 정협 제6기 전국위원회 부주석 천짜이다오(陳再道)가 베이징(北京)에서 사망했다. 1909년 1월24일 생으로 향년 84세였다.

후베이(湖北)성 마청(麻城)의 빈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난 천은 공산당에 가입, 홍4군 군장과 8로군 129사 6연대장, 독립여단장을 지냈다.

공산정권 수립 이후 1955년 상장(上將) 계급이 부여됐으며 우한(武漢) 군구 사령원, 철도병 사령원을 역임했다.

천짜이다오는 우한군구 사령원으로 있던 1967년‘백만웅사(百萬雄師) 사건’의 주역으로 유명하다.

문화대혁명 발동 이후 우한에서는 당 조직, 행정부, 노동자들이 만든 ‘백만웅사’와 4인방을 추종하는 급진혁명조직인 ‘공인 총부’가 문혁의 헤게모니를 놓고 무력 유혈충돌을 벌였는데 천은 바로 백만웅사의 지원자였다.

'백만웅사'란 말은 국공내전 말기 양쯔강 도하 전투(渡河戰役)을 수행한 인민해방군 병력을 지칭하는 호칭에서 따왓다.

천은 국공내전 당시 제2야전사(홍 4방면군의 후신) 소속으로 류보청(劉伯承), 쉬샹첸(徐向前)의 직계였다. 또한 제 2야전사는 덩샤오핑이 정치위원으로 있었던 덩의 군 세력기반이기도 했다.

따라서 우한사건은 군 원로세력과 4인방과 연합하던 제4야전사 출신을 기반으로 한 린뱌오(林彪) 간 대리전의 성격을 띠었다.

문혁 발동 첫 해인 1966년 베이징에서는 홍위병 세력이 류사오치의 부인 왕광메이 등이 조직한 기존 당 조직을 기반으로 한 적위대를 제압했다.

물론 여기에는 마오의 개입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런 중앙과는 달리 우한에서는 기존의 당 조직에 기반을 두고 우한군구의 지원을 받는 백만웅사가 공인총부를 압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문혁 2차 년도인 1967년 7월20일 공인총부를 지원하기 위해 베이징에서 온 셰푸즈(謝富治)와 중앙문혁소조의 왕리(王力)를 공격, 왕리를 연금하기에 이른다.

백만웅사의 과격파는 왕리 체포하는 과정에서 당시 우한사태를 시찰하고자 현지에 와서 머무르고 있던 마오쩌둥(毛澤東)의 숙소 인근에까지 난입, 마오의 경호원과 충돌을 벌이기까지 했다.

마오는 문화대혁명 발동이후 지방에서 벌어지는 4인방 추종세력과 기존 당 조직 간 소요 사태 실태를 둘러 본다는 명목으로 우한에 왔던 것이다.

마오는 명목과는 달리 백만웅사 쪽으로 기울어진 우한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의 권위로 이를 반전시키기 위해 우한에 왔으나 '권력 창출세력인 총구'는 가까이에 있는 적만이 보일 뿐 베이징에서 날아온 마오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인민해방군 간 충돌로 번질 수도 있었던 우한 사건은 저우언라이(周恩來)의 개입으로 수습되었고 천짜이도는 우한군구 사령원에서 해임되었지만 마오의 지시로 더는 처벌을 받지 않았다.

마오가 1936년 시안사변으로 연금된 장제스를 죽여햐 한다는 원래 주장을 굽힌 것은 저우언라이의 설득 때문이었다.

그 31년 뒤 한 번 삐끗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을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저우의 조언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마오는 조금 늦게 그러나 아주 정확하게 군심(軍心)과 권력 역학 관계를 파악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마오의 이 조치는 그가 군 원로세력을 쓸어버리고 군의 헤게모니를 잡으려는 린뱌오에 대해서도 견제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이는 마오가 문혁 과정에서 혁명보다는 탈권에 무게 중심을 두었음을 드러내준다.

마오는 혁명의 급진화가 내란을 불러 일으킬 위험에 직면하자 주저없이 제동을 건 것이었다. 마오는 같은 맥락에서 앞서 인민공사의 확대를 반대, 저지시켰다.

[今天歷史-2월5일] 공업은 大慶에서, 上海인민공사

마오 탈권운동의 무력적 기반인 린뱌오와 이론적 토대이자 선동의 주체인 4인방은 결국 마오 탈권운동‘불쏘시개’라는 역사적 임무가 끝나자 단계적으로 역사 무대에서 퇴출됐다.

천짜이다오는 1971년 9월12일 린뱌오가 몽골 상공에서 추락사 한 뒤 공직에 복귀했다.

1933년 = 중국 국민정부 재정부가 은량(銀兩)제를 전면 폐지하고 위안화로 화폐개혁을 실시하였다.

317년 = 사미예(司馬睿)가 동진(東晋)을 건국했다. 수도는 현재 난징(南京)인 건강(建康)이었다.

세계사 속의 오늘

파키스탄이 인도 공격이 가능한 중거리 미사일 발사 실험에 성공했고(1998), 독일이 그리스에 침공했으며(1941),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 1차대전에 참전하였다(1917).

2018/04/06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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