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12/14 06:07



[今天歷史-4월7일]핑퐁외교...似而非 뱁새 황새 코스프레

북한 김정은 집단은 평창올림픽을 핑퐁외교의 재판으로 기대했다.

임신 상태 '최고 존엄'의 동복 여동생 김여정을 남으로 보내 억지 미소외교를 펼쳐 초대박을 가져왔으니 그들로서는 '1971년 어게인 한반도 버전'의 출시를 기대하게 되었으니 '심봤다' 심정일 것이다

'백두 혈통'의 4명 중 1인이자 현재로서는 '존엄' 유고시 승계 1순위를 남행시키는 최고 카드를 던졌지만 미국의 반응은 싸늘했다(김정은은 동복형 김정철이 있으나 마오쩌둥의 둘째 아들 마오안칭처럼 정신상 문제가 있어 도저히 후계자가 될 수 없으며 김정은과 부인 이설주 사이에 이제 걸음마 하는 딸이 하나 있다고 한다.

이복형 김정남을 암살했고 숙부 김평일 등의 왕통 계승은 김정은 호위무사및 섭정 세력의 붕괴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니 이들 '곁가지'들은 김씨 왕조의 완통 승계에서 배재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자 다시 남쪽 문재인 정부의 특사를 초청, 남북 정상회담에 합의하고 미국 트럼프 정부에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 한반도 비핵화 프로세스의 전향적 메시지를 전하였는데 트럼프로부터 정상회답을 즉각 하자는 답변이 날아왔다.

이는 1971년 미중화해 당시 미국 탁구대표단 초청과 성사에 이은 실무진 접촉, 대통령 특사 파견과 비밀회담, 대통령의 중국 방문 발표와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에 이은 양국 정상 간 대면 회담 실현 등으로 이어진 10개월의 프로세스를 2월여로 압축한 것이다.

트럼프는 예상 밖 대응에 당혹감이 가시지 않은 평양 측에 잇달라 숨돌일 새 없는 수를 밀어붙였다.

트럼프는 비둘기파 국무장관과 신즁한 매파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을 각각 매파 중 매파와 초울트라 매파로 교체하였다.

이러자 트럼프 뱃 속에 '칼'이 들어있을 가능성에 평야 측은 불안 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김정은의 북한은 김정은이 북한 노동당 조직지도부 의 '가게무샤'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고 있는 시진핑 등 중국 최고 지도부의 의심을 풀기 위해 북한 실질적 권력실세 1,2,3위가 모두 함께 베이징을 방문했다.

'명실 상부한 북한 '뇌수'의 베이징 이동을 위해 죽은 김정일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킨 방탄 '봉인 열차'가 동원되어야 했다. 만약 경우를 대비하기 위한 보험들기다.

이는 북한으로서는 '1971년 미국이 'One China yes,not now'와 같은 절충책 '북한 핵폐기 그러나 당장은 아냐'만 합의되면 대성공이고 합의가 불발이더라도 미국의 군사공격을 중국이 저지시켜 주면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1971년과 2018년은 이처럼 같은 듯하나 전혀 다르다.

1971년 미국은 베트남전 수렁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는 것을 중국은 소련의 군사공격 위협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상호 절실한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2018년 현재 미국의 요구는 북한 핵의 즉각적인 CVID 실현이고 북한이 바라는 바는 핵 보유 인정과 대북 옥죄기의 풀기다. 그런데 이는 교환하기가 불가능하다.

북한이 미국 조건을 들어주면 이는 김정은 체제의 붕괴와 직결된다. 그리고 핵없는 북한은 발가벗고 북극 빙산에 오르는 격이다.

트럼프 행정부도 현재 설정한 프레임에서 후퇴하는 것은 클린턴 이래 전 행정부와 차별화를 잃는 것으로 게도 구럭도 다 잃는 것이 된다.

또한 1971년 일본, 유럽 등의 중국 러시가 이루어졌던 것처럼 중국은 잠재적 시장으로서 매력이 무궁했다.

2018년 북한은 중국과 비교할 바 없는 시장이고 여전히 스탈린주의적 체제를 견지하여 투자보호와 관련 하여 '양치기 소년'이 된지오래다.

1971년 게임판에서 세계 전략적 차원의 큰 패만 있을 뿐이고 거래 방식도 아주 간촐했다.

그러나 2018년에는 중미무역 전쟁과 중국의 해양 팽창 등 복잡한 전략적 고려 사안이 결부되어 있어 게임을 아주 복잡하게 한다.

큰 판에서 약소국은 손해 보기 마련이다.

1971년 미국과 중국은 이익을 서로 교환할 수 있었고 손해를 본쪽은 남베트남과 대만이었다.

2018년에서도 한반도 남북한은 결코 고래는 아니다. 고래들은 서로 손해를 교환할 수 있는 구도다.

따라서 2018년은 1971년의 '사이비(似而非)'이다. 그리고 2018년 북한은 1971년 중국의 코스프레다. '뱁새'의 '황새' 코스프레다. <스위프트-버크왈드>

鄧 3차실각, 중국 미국 휴즈사 제작 인공위성 발사, 리쭝런 일본군 3만 명 섬멸, IOC 중국 회원 가입승인, 나치 독일 유대인 사회주의자 등 공직 추방, 미군 일본 최대 전함 야마토 격침, 영국 포클랜드 인근 200해리 해역 전쟁구역 선포

1971년 4월7일 중국이 미국 탁구팀을 초청했다. 3일 뒤인 10일 미국 탁구팀이 중국 방문길에 오름으로써 미중화해의 단초가 된 '핑퐁외교'가 전개됐다.

핑퐁외교는 이후 상호 적대적인 국가 간에 관계 개선을 위한 선행 단계로서 체육 교류를 활용하는 새로운 외교 패턴의 전형이 되었다.

중국은 2006년 핑퐁외교 35주년을 앞두고 미국 탁구단을 초청했는데 이는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미국 방문을 앞두고 양국 간 우호적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또한 미국 탁구단 초청과 비슷한 시기 일본 탁구단을 초청한 것 역시 악화된 중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분위기 조성의 목적이 있었다. ‘핑퐁외교’의 리바이벌이었다.

[[今天歷史-4월10일]수양제, 중소우호조약 실효, 핑퐁외교

핑퐁외교 35주년...미 기념 대표단 방중 2006/03/26 20:57

1990년 = 베이징(北京) 시간으로 21시30분 중국이 자체 제작한 운반 로켓 ‘장정(長征) 3호’에 실린 ‘아시아(亞洲)1호’인공위성이 시창(西昌) 위성발사 중심에서 성공적으로 발사되었다.

인공위성은 미국 휴즈사가 제작한 것으로 중국은 처음으로 외국이 제작한 인공위성을 지구궤도에 올려 놓는데 성공한 것이다.

앞서 중국은 1970년부터 26개의 인공위성을 지구궤도에 쏘아 올렸다. 한편‘장정 3호’ 로켓은 1984년 4월8일 통신위성을 처음 발사한 이래 6 번째 인공위성 발사를 성공시킨 것이다.

발사 현장에는 한족 외에 이족(彛族), 티베트족(藏族) 등 소수민족과 17개국 및 홍콩과 대만 등지에서 온 200여명의 참관단이 발사 순간을 지켜보았다.

[今天歷史-3월26일] 이리듐 프로젝트 인공위성 발사

1976년 = 중국공산당 정치국, 화궈펑(華國鋒)을 정식으로 총리에 임명하는 결정을 내리고 청명절 천안문 사건을 배후 조종했다는 혐의로 덩샤오핑(鄧小平)에게서 부총리직을 포함한 모든 직책을 박탈했다.

이는 덩샤오핑 정치 생애에 있어 3차 실각이자 마지막 실각이었다.

화궈펑은 이와 함께 당 제1부주석으로 선출돼 마오쩌둥(毛澤東)의 후계자로서 입지를 다졌다.

화의 이 같은 부상은 자력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4인방과 덩샤오핑 간 권력투쟁에 따른 반사이익이었다.

또한 이는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둔 마오의 정치적 균형감각이 전혀 녹슬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마오는 이해 9월9일 사망했다).

1979년 =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중국의 회원가입 승인.

1938년 = 리쭝런(李宗仁)이 지휘하는 국부군이 일본 침략군과 이해 3월22일부터 산둥(山東)성 타이얼좡(台爾庄)에서 벌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로 쉬저우(徐州)를 탈취하려던 일본군 정예병력 3만명이 섬멸되었다 일본군과 사단급 이상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중국 장성은 매우 드물다. 리쭝런 외에 국부군에서는 쑨리런이 공산군에서는 린뱌오가 이에 포함된다.

리쭝런은 1949년 1월 잇단 국공내전에서의 패전 책임을 지고 장제스가 잠시 총통 직에서 물러났을 때 대리 총통을 맡았다.

그는 공산군과 화평교섭에서 공산당의 요구를 수용하였으나 장제스 세력의 동의를 받지못해 실패하였다.

이후 장제스와도 불화하여 1949년 12월 미국에 망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1965년 중국으로 귀국했으며 1969년 죽었다.

세계사 속의 오늘

나치 독일이 공직에 있는 유대인과 사회주의자, 민주주의자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1933).

미군기가 오키나와 근해에서 일본 최대전함 ‘야마토(大和)호’를 격침했고(1945). 영국이 포클랜드 주변 200해리를 전쟁구역으로 선포(1982).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이 창간되었다( 1896). 1884년 갑신정변 실패로 미국에 망명한 서재필이 귀국, 주도하여 창간한 독립신문은 독립협회 기관지로 순 우리글과 영문판으로 제작되었다.

당시 조선정부도 창간 과정에서 자금을 내놓는 등 지원하였다.

2018/04/07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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