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12/14 06:07



[今天歷史-4월8일]秦邦憲 추락사...정치적 함의있는 퇴장

왕밍과 더불어 28인 볼세비키의 쌍두마차인 천방셴이 미묘한 시기 돌발사건으로 정치무대에서 퇴장했다.

보구(博古)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친방셴은 국민정부 임시 수도이자 국민당 최고사령부가 소재한 충칭에서 공산당의 '대본영'이 있는 옌안으로 귀환하던 중 탑승 비행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사망했다.

당시 2차 국공내전이 폭발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시점이었으며 보구는 마오쩌둥이 1935년 1월 군사 지도권을 장악하기 바로 직전의 당수로 마오 군사노선과 정반대되는 입장에서 공산당을 이끌왔던 인물이었다.

보구가 비행기 사고로 사맘할 당시인 1946년 4월 공산당의 권력 구도는 마오쩌둥을 중심로 한 국내파가 군사 지도권에 이어 당 지도권을 확고히 장악해가고 있었다.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 등 프랑스 유학파가 마오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가운데 왕밍과 보구를 쌍두마차로 한 '28인 볼셰비키 중심의 소련파가 권력 삼각형 밑변의 한 꼭지점을 불안하게 지키며 권토중래의 은인자중을 하던 시점이었다.

보구에게 당수 자리를 넘겨주고 코민테른 중국대표로 모스크바에 차출된 왕밍은 중일전쟁 와중에 마오 일파의 집중적이며 집요한 노선 공세로 날이갈수록 힘을 잃어가는 상황이었다.

국내를 떠나지 않았던 보구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마오의 지도권을 인정하는 자세를 감수할 수밖에 없어 왕밍과는 처지가 달랐다.

중국공산당은 국공내전이 본격화할 경우 당시로서는 적극적인 소련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권력역학 관계가 요동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마오파는긴장하고, 소련파는 반전을 꾀하고, 프랑스파는 좌고우면의 기회주의적 자세였다.

이런 복잡 미묘한 상황에서 소련파의 양축 중 하나가 사라졌으니 소련파로서는 심대한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소련파의 권토중래 기회는 더욱 더 멀어졌으며 1956년 왕밍의 모스크바 망명으로 불가역적 승패의 마침표가 찍혀졌다.

보구의 추락사건은 4반세기 뒤인 1971년 9월 일어난 린뱌오 추락사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린뱌오는 마오에 대한 쿠데타 살해를 기도하다 발각, 실패하여 가족과 함께 소련으로 망명하던 도중 탑승 비행기가 의문의 추락을 하면서 사망했다.

갖가지 음모설이 난무한 린뱌오의 추락사와는 달리 보구의 추락사는 어떠한 기록에서도 정치적 음모설이 끼어들지 않았다.

단순한 사고였으며 앞길 창창한 중국 젊은 지도자의 돌연한 정치무대 퇴장으로 역사 페이지에 자리매김됐다.

보구의 추락사가 단순한 사고사로 정리됐듯이 노리에가의 전임자이자 파나마 운하 반환 문제로 미국을 곤혹 시켰던 토리호스 파나마 대통령의 비행기추락사와 알리 부토를 총리 직에서 축출하고 처형한 지아 울 하크 파키스탄 대통령의 비행기 추락사 등도 사고사로 정리됐다.

그러나 이후 해당국에서 전개된 정치 상황은 의문을 완전히 지울 수 없게 한다.특히노리에가는 CIA첩자 출신이었음에도 토리호스의 노선을 따라 '남미 우파의 카스트로' 역할을 하다가 미국 침공군에 의해 국가 원수가 아닌 '마약 밀매업자' 취급을 당했다.

'인류는 모든 진실을 감당할 수 없다'라는 말을 상기해 본다면 토리호스와 지아 울 하크의 경우는 는 '완전 범죄'가 이루어진 '성공적 정치 모살'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가능성에 예민한 독재자는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

김일성은 1950년대 중반 권력투쟁 와중에서 탑승 비행기가 반대파의 대공포화 공격을 받은 이후 죽을 때까지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 그 아들 김정일도 권력의 정점에 가까워지면서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았다.

그 유명한 '방탄열차'를 타고 베이징과 중국 남부를 다녀왔으며 심지어 모스크바까지 기차여행을 했다.

국내를 전용기를 타고 다니던 김정은도 지난 3월 말 베이징 방문 때 아버지가 사용하던 '방탄 봉인열차'를 이용했다.

생물학적으로는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로 정리됐다.그러나 정치세계에서는 '트라우마'는 유전되고 있다. <스위프트-버크왈드>

1946년 4월8일 소련 유학파 출신‘28인 볼셰비키'의 중심인물 친방셴(秦邦憲)이 국공회담을 마치고 충칭(重慶)에서 옌안(延安)으로 돌아오던 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1907년생으로 향년 39세.

보구(博古)로도 부르는 그는 1931년 9월 28인 볼셰비키의 우두머리 지도자로 당 총서기를 맡고 있던 왕밍(王明 : 본명 천샤오위陳紹禹)이 중국공산당 코민테른 수석대표로 임명되어 모스크바로 떠난 뒤 그의 후임으로 당 총서기에 선출됐다.

왕밍은 1904년생으로 친방셴보다 3세 연상이다.

1934년 4월 중국공산당 6기 5중전회에서도 총서기에 연임된 친방셴은 국민당의 장시(江西) 소비에트 제5차 포위공격(초공(剿共))에 대한 대응 작전을 지휘했으나 패배했다.

장정(長征) 중이던 1935년 1월 쭌이(遵義)회의 에서 총서기 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홍군 총정치부 주임, 조직부장, 해방일보 사장, 신화통신사 사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국공회담 공산 측 주요 대표로 활동했다.

함께 사망한 사람 중에는 왕뤄페이(王若飛)와 예팅(葉挺) 등이 있다.

예팅은 1937년 일본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이루어진 2차 국공합작에 따라 중국 남부 지역에서 흩어져 활동 중이던 홍군 게릴라를 모아 새로 조직한 신사군(新四軍)의 지휘관이었다.

신사군으로 편제된 홍군 게릴라는 홍군의 주력이 장시(姜西) 소비에트를 버리고 장정에 올라 서북 지역으로 옮겨간 뒤 장시 소비에트 지구와 그 부근으로 흩어져 소규모 단위로 게릴라 활동을 벌여왔다.

친방셴의 죽음은 20대 후반에 중국공산당의 당권을 장악했던 공산당‘앙팡 테리블’의 양대 지도자 중 한 사람이 정치무대에서 사라진 것을 의미했다(왕밍은 27세 때 친방셴은 24세 때 당수 직에 선출) .

또 한 명의 지도자인 왕밍은 마오쩌둥의 집요한 견제로 친방셴이 사망한지 10년 뒤인 1956년 소련으로 망명함으로써 그의 나이 52세 때에 정치적으로 사망했다.

[今天歷史-3월27일] 王明, 러시아 뤼순과 다롄 조차

2018/04/08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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