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7/18 06:10



[今天歷史-4월9일] 張學良-周恩來 비밀회담... ‘한길 속’ 트라우마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

마오쩌둥은 정치적 궁지에 몰린 린뱌오가 류샤오치처럼 나름 저항은 하겠지만 자신의목숨을 노린 반역을 저지리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마오는 린뱌오 사건 이 드러난 지 5년 뒤에 죽었는데린뱌오의 한길 속 마음을 간파합지 못햇던 데 대한 트라우마도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해리슨 솔즈버리는 그의 저서 <새로운 황제들>에서 마오가 린뱌오 사건 충격 이후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엇다고 적고 있다.

장제스 역시 시안에서 장쉐량에게 감금될 때까지 장쉐량의 '한 길 속'을 완전히 헛 짚고 있었다.

장제스 정권은 소련의 게페우와 나치 독일의 게슈타포 못지 않은 악명 높고 무자비한 비밀경찰 특무 조직 '남의사'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장쉐량이 '국민정부의 주적' 공산당의 수뇌부 인사인 저우언라이와 비밀 회동을 하고 '음모'를 키워오는 동안 깜깜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측근 몇 명 만 데리고 '호랑이굴'인 장쉐량 군 사령부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1936년 12월 12일 시안 사건일벌어졌을 때 그는 자신의노선을 버리느냐 아니면 목숨을던지느냐의 택일 처지에 놓였다.

장제스는 도리어 '칼끝'을 잡고 칼 손잡이를 쥔 장쉐량을 압박하엿으나 결국 부인 쑹메이링과 저우언라이의 설득으로 '공산당 완전 타도 이후 일본과의 전쟁'이라는 노선을 일단 포기햇다.

장제스가 이런 결정을 하기 4개월 전 스페인의프랑코 장군은 좌파 인인민 전선 정부에 대한 반란을 일으켯다. 그는 3년간의 내전 끝에 마드리드에 입성, 우파 독재 정권을 수립햇다.

그 10년 뒤 장제스는 대륙을 잃고 대만 섬으로 쫓겨가지 않을 수 없엇다.
두사람은 좌파와는함깨 같은 하늘을이고 살 수 없다는 신몀과 정치 노선의 지도자엿다. 또한 무자비한 철권 통치를 펼쳤다는 점에서 똑같았다.

장제스와 프랑코는 같은 해인 1975년에세상을떴다. 장이 5세 연상이고 프랑코가 장이 죽은 뒤 7 개월 뒤 뒤를 따랐다.

프랑코는스페인의 철권 통치자로 장제스도 역시 강권 지배자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장제스는 중화민국의 1개성만을 지배하고있엇다. 대륙 수복의비원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두 사람의너무나 같은 정치 노선과 통치 행태 그러나 성공과 실패라는 한 말로 요약할 수잇는상반된 정치 역정을 살펴 볼 때 프랑코는 '성공한 장제스'로 장제스는 ''실패한 프랑코'로 불러 봄직하다.

프랑코의 통치 행태를 압축하는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프랑코가 식민지 모로코 주둔 사령관으로 있을 때 열악한 급식에 불만을 품은 한 장교가 식당에서 장교와 사병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시찰나온 프랑코의 ,; 얼굴에 식판을 던진 사건이벌어졋다.

프랑코는눈도 깜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즉시 식당 관계자와 부식 담당 최고 책임자를불러 급식 상황을 개선할 것을 직접 지시햇다. 이 조치를 취한 뒤곧 바로 식판을 사령관의 면상에 던진 그 장교를 당장 끌어내어 총살하도록 명령하고 즉시 집행했다.

장제스는 대만으로 쫓겨 온 뒤 부패 사범에 대한 무자비한 처벌을 단행햇다. 며느리를자결하도록 햇고 부패 사범들을 수송기에 태워 탷평양 상공에서발로 차 망망대해 해상위로 떨어뜨려고깃밥이 되도록했다고 한다. 무자비함에 있어서는 막상 막하이다.

장제스는 장쉐량이 자신의 행동을 '병간(兵諫'라는논리를 펴며 그를 수행하여 난징에 따라오자 일단 사형 선고를 내린 뒤 사면하여 처형하지는 않았다. '죽어도 충신'이라는 자부심과 정치적 부담 때문에 자신을 죽이지는 못할 것이라는계산아래 '호랑이굴'에 대담하게 들어 온 것이다.

시안의경우와는달리 장쉐량의 '칼끝'과 '칼 손잡이'를 바꿔 잡고 벌인 게임에서 일단 '칼끝'이 승리했다.

장제스와 장쉐량의 2라운드 싸움이 시작됏다 이 싸움은 장제스죽을때까지 39년간 지속됏고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가 죽을 때까지인 1988년 까지 대를 이어 반세기 이상 지속됐다. 그리고 죽은 뒤에도 계속됐다.

장제스는 사면 뒤 곧바로 장쉐량을 연금햇고 대만으로 쪼겨올 때도 그를 데리고 와서 계속 연금 상태를 풀지 않았다.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가 1988년 죽은 뒤에서야 연금이해제됐다.

연금에서 풀려난 장쉐량은 대만을 떠나 하와이로 이주 그곳에서 여생을마쳤다.
그가 대륙의 자신의 근거지 만주, 즉 동북 지방으로 가지 않고 미국 하와이로 간 것은 자신이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중국 공산화를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지만 일본과의 싸움이 먼저라는자신의노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중국이 공산화하도록 길을 터 준 '반역자'가 아닌 일본 침략을 막아낸 '병간자'로 역사에 자리매김을 하기위한 것일 것이다.

청나라의 강희제는 명나라에 여전히 충성하는 학자를죽이지 않고 유교 경전에 바탕을둔 논전을 벌여 그를 굴복하게 한 뒤에서야처형햇다는일화가 생각이난다.

장제스부자가 장쉐량의 연금을 풀지 않았던 것은 그로부터 진정한 과오 시인을인정받기 위해서였던듯하다.

하지만 하와이의 장쉐량은과오 시인은 커녕 죽음을앞두고 "장제스는 황제가 되려햇다"라고 비난, 그를 위안스타이와 같은 반동주의자로 매도하고 자신의 선택의정당성을견지햇다. 그리고 그주장 뒤 얼마 안가 장제스부자의곁으로 떠났다.

시안 사변으로 장제스부자는 대륙을 잃었고 장쉐량은 인생을 잃엇다.<스위프트-버크왈드> .

리펑 총리에 정식 선출, 미국 남북전쟁 종료, 나치 독일 덴마크와 노르웨이 침공

1936년 4월 9일 국민정부 동북군의 장쉐량(張學良)과 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샨베이(陝北) 푸스(膚施)에서 비밀회담을 갖고 내전을 종식시키고 항일전쟁에 협력하자는 데 합의했다.

장쉐량은 이 회담에서 자신의 재량이 미칠 수 있는 한에서는 공산군의 출로를 열어줄 수 있지만 기타 대부대의 이동을 허용하는 문제는 장제스(蔣介石)의 중앙군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밝혔다.

장쉐량은 당시 만주(滿洲)로 불리던 동북지방을 근거지로 한 군벌 출신이었다.

장쉐량은 만주에서 최대 군벌로 성장한 아버지 장쭤린(張作霖)이 일본군에 의해 암살당한 뒤인 1928년 12월 29일 자신의 휘하 군벌 병력을 거느리고 장제스가 지휘하는 국민정부 국민 혁명군 북벌군에 투항했다.
가난한 만주 랴오닝 성의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 만주 지역의 소규모 군벌로 성장한 장쭤린은 리홍장이 육성한 위안스카이를 우두머리로 한 중앙 정부의 북양군벌에 편입되면서 세력이 크게 확대하엿다.

일본의 후원아래 장쭤린은 베이징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위안스카이 직계 부하들인 북양 군벌의 주류 세력들을 무리치고 베이징까지 세력을 확대했으나 장제스의 북벌군에 쫓겨 자시느이 근거지인 만주로 전용열차로 이동하던 중1928년 6월 4일 일본군이 설치한 폭탄에 의해 폭사했다.

만주의 일본 관동군은 그들의 중국 전략에 반발하여여 불화를 빚고 있 는 장쭤린이 더 이상 이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 그를 암살하기에 이른 것이다.

장쭤린 사망후 그의 아들 장쉐량이 뒤를 이어 만주 군벌의 지도자가 됐다. 장쉐량은 일본의 뜻을 따르라는 부친의 측근 인사들의 압력에 직접 자신의 총으로 그들을 처결하고 반일 자세를 분명히 했다. 일본에 등을 돌린 장쉐량은 국민혁명군에 투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정부는 장쉐량이 항복의 표시로 동북 전역에 청천백일기를 게양하자 그를 동북변방군 사령장관에 임명하여 자신의 군대를 계속 보유한 채 동북 3성에서 여전히 반 독립적 지위를 누릴 수 있도록 허용했다.

[今天歷史-12월 29일] 東三省 전역에 청천백일기 휘날리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근거지에서 쫓겨난 장쉐량은 만주를 회복하기 위해 항일전에 나서고자 했으나 장제스는 ‘먼저 안을 안정시킨 뒤 외세와 싸운다’는 전략 방침에 따라 장쉐량에게 공산군 토벌에 나설 것을 압박했다. 만주 출신으로 구성된 동북군은 장제스의 이 같은 전략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장쉐량은 저우언라이에게 장제스가 일본에 항복한다면 그를 떠나겠지만 현재 상황은 장제스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공산군 점령지구로 진출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 회담 후 공산당은 동북군공작위원회를 설립하고 저우언라이와 함께 회담에 참석했던 리커눙(李克農)을 뤄촨(洛川)의 장쉐량 사령부에 파견하였다.

이 비밀회담 8개월 3일 뒤인 1936년 12월 12일 시안(西安)사변이 발생한다.

[今天歷史-12월 12일] 시안사변(西安事變)

장제스는 북벌 과정을 통해 공산당을 말살해야할 불구대천의 적으로 삼았으나 반동적이며 역사 퇴행적인 군벌 세력에 대해서는 자신의 군사적 우월권과 국민정부 의 정통성을 인정하면 그들의 군사,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도록 허용, 공존을 택했다.

그러나 장쉐량의 경우에서 보듯 장제스에게 투항한 군벌들은 장제스와의 공존이 한시적이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면종복배하는 자새였다. 자신의영향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세력을 강화하는 장제스에게 등을 돌릴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았으며 공산당을 '붉은 군벌'로 간주하고 장제스 견제에 협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장제스는 시안 사변으로인해 그가 가장 경계하였던 사태인 공산 세력을 그대로 둔 채 항일전쟁에 나서야 했으며 이는 종전 후 대륙을 공산 세력에 넘겨주는 원인이 되었다.

국공내전 말기 베이핑(베이징의 당시 명칭) 방어 총사령관 푸쭤이(傅作義)도 공산군의 공세에 남하 퇴각하지 않고 스스로 포위당한 채 협상을 벌여 항복했던 것도 자신 휘하 병력을 근거지에서 밀려나지 않도록 하여 세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계산 때문이었다. 장쉐량과 마찬가지 동기였다.

또한 장제스를 대신 임시 총통이 된 리쭝런(李宗仁)은 마오쩌둥을 ' 또 다른 장제스'로 간주, 혒상이 가능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시간을 허비, 국부군의 패배를 가속화 하는데 기여햇다.

장제스의 대륙 상실 중에는 이런 면종 복배의 군벌들을 방치한 것도 한 가지 원인으로 도사리고 있다.

내부의 적이 외부의 적보다 더 위험한 것이다.
1988년 = 리펑(李鵬)이 전인대에서 총리에 정식 선출되었다. 리펑은 1987년 1월 자오쯔양(趙紫陽)이 후야오방(胡耀邦)의 후임으로 총서기에 선출된 뒤 총리 대리에 임명되었으며 곧이어 중앙위 전체회의에서 총리에 선출됐었다.

세계사 속의 오늘

1861년 4월 12일 발발한 미국의 남북전쟁이 남부군 총사령관 리 장군의 항복으로 종식되었고(1865), 나치 독일군이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침공했다(1940).

2018/04/09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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