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7/21 23:31



[今天歷史-4월10일] 수양제...,끝이 좋아야 모든 것이

All's well that ends well.

'끝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다'라는 이 영어 격언은 '긴쪼 시대유신 시대 긴급조치 시대를 약칭하는 말)'에서 처음 접했다.

우리나라 영어 참고서의 베스트셀러는 6.25 사변 이후 춘추 전국 시대를 거치면서 패자가 나타나기 시작햇다. 1950년대엔 유진의 '영어 구문론'이 1960년대에는 안현필의 '영어 실력기초'가 패자로 군림했다고 한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로 넘어 가는 시기에 김열함의 '영어 정해'가 새로운 퍠자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려드는즈음에 송성문의 '정통 종합 영어( 성문 종합 영어)'가 혜성처럼 출현햇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문 종합 영어는 '패왕'이 되었고더 나아가 기존의 패왕의 위상을 뛰어 넘는 독보적이며 압도적인영어 참고서가 되었다.

긴쪼 시대에 고등학교 시절 을 보낸 이른바 긴쪼세데는 '성문 종합영어'의 천하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을목격햇다. 학교가달라 영어 교과서가 다를 수 잇지만 고등학생들이 하나씩 갖고 있던 영어 참고서는 거의 대부분 '성문 종합 영어'엿다.

'짧은 영광'의 김열함이 와신상담 절치부심하여'영어의 왕도'를 내놓았는데 아주 잘 만들어진 참고서엿고 예문도 다양하고 풍부햇으나 '성문 종합 영어'는'넘사벽'이었다. 시간이흐를 수록 '부처님 손바닥'이자 '바이블'이 되었다.

더도 덜도 아닌 대단히 적절한 분량의 핵심 내용을 잘 짜여진 구조에 담아 우리나라 수 많은 고등학생들을 영어의 대양으로 인도하였다.

각 단원마다 서두에 ?짤막한 격언명언과속담등이 실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는 골프 코스의 '그늘집' 구실을 톡톡히 햇다.그중 아직까지도 인상 깊게 남아 있는 것이 바로 'All's well that ends well.'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은 2기 집권 오래전부터 '시황제'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마오쩌둥이 높이 평가한 시황제, 즉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고 첫황제 제도를창설하여 초대 황제에오른 진시황에 자신이 비견되는 것을 싫어 하지 않는듯 보인다.

하지만 '최초'가 아닌 시진핑에게 '시황제' 보다는 '수양제'에더욱 비교될 수 있을 것 같다 더우기 '해양 굴기' 새로운 실크로드를강력하게 추진하는 시진핑에게는 만리장성을 구축한 사실에서 보득 국수주의적이며 폐쇄적인 시황제 보다는 두차례의 고구려 정벌에서 보듯 팽창주의 노선을 걸었던 수양제에 더욱 어울린다.

중국이 유럽처럼 여러 구가들로 조각 조가 나지 않게된 것은 흔히 시황제가 통일을 이룩하고 문자 통일과도량형 통일 그리고 도로 정비 등의 기초를 다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유럽에서 중국의 한 나라( 진시황 이후 통일제국을 건설하여 제국 체제를 장기간 지속시킨 대제국이었다)가 담당햇던 통일 제국의 역할을 한 로마가 멸망한 뒤 유럽에서는 샤를마뉴 대제, 나폴레옹 때 잠깐로마 제국 체제의 재현이 있엇을 뿐 바둑판 모양의 분리 체제가 정상이었다.

중국은 오히려 그 정반대가 정상이었다.
유럽과 중국이 이처럼 서로 다른 길을걷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수양제의 대운하 건설이 결정적이었다.
후한 시대 이후 삼국 분렬을거쳐 진나라로 통일됏던 중구은 오호 16국 시대의 대분열 시대를거쳤고 양쯔강을경게로 남북조 시대라는 안정적인 대륙 분단 시대가 장기간 지속됐다.
수양제가 대운하구축을통해 중국 대륙에 동맥과 정맥에 실핏줄들을 만들지 않앗다면 경제적 통일을이룩, 유지할 수없어 유럽 꼴이 났을 것이었다.
수양제는 중국 역사에 있어 샤를마뉴와 나폴레옹의역할을 하엿고 또 남북북 전쟁 승리를통해 미국의 분열을막앗던 링컨의 역할 도햇다는역사적 평가를 내릴 수 있겠다.

수양제가 이런 불멸의 역사적 업적에도 불구, 시황제와 더불어 폭군의 대명사가 된 것은 한마디로 '끝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황제는자신의사후 손자대에서 나라가 망했고 수양제도 자신의 대에서 나라를지텨내지못했다.

고구려 원정 실패 때문에 망했다고는하지만 고구려 웑정 실패는 당나라 태종도 마찬가지다.

당태종은 그의아들 대에고구려 원정에서 성공했기 때문에 그가 이룩한 업적이도드라졌고 결국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로 평가되기에이르렀다.

걀국 한참 기세 등등 한 시진핑의역사적 평가도 이 격언이 예고하고 잇다.

All's well that ends well.

그리고 수양제의 경우처럼 그가성공적으로 해결해야 할 헥심 중요 숙제는 한반도 사태다. 즉 북핵 문제다. <스위프트-버크왈드>

중소우호조약 실효, 핑퐁외교, 재미 화교 워싱턴서 조어도 시위

618년 4월 10일 고구려를 2차례 침략했다 실패한 수(隋)의 양제(煬帝)가 반란군에 포로가 된 뒤 강박 속에서 자살했다. 569년 생으로 향년 49세였고 재위 14년 만이었다.

시호 ‘양(煬)’의 글자 뜻은 ‘말리다’ 혹은 ‘쇠를 녹이다’라는 뜻으로 그가 포악한 군주임을 드러내기 위해 붙여졌다. 후세의 당 현종(玄宗)에게 ‘검을 현(玄)’자를 시호로 한 것도 같은 논리에서였다.

양귀비에 눈이 어두워져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유발했고 그 때문에 성당(盛唐)이 한순간에 전란의 소용돌이에 빠졌다는 질책의 뜻이 시호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 현종이 치세 전반기를 당 태종에비견될 정도로 잘 다스렸던 것처럼 수양제도 대운하건설로 중국 남북을 경제적으로 연결하는 괄목한 업적을 이룩했다.

데운하 는 중국 대륙이 유럽 대륙 처럼 로마 제국 이후 여러 국가로 분열하지 않고 분열됏다가도 통일 국가로 환원을 반복하는 구심력의 결정적 동인의 역할을 햇다.

또한 수양제는 형벌 제도 개혁과 도서 편찬에서도 괄목한 업적을 쌓았다.

진시황이 중국을 정치 군사적으로 통일 시켰다면 수양제는 경제적 통일의 연결 고리를 든든히 구축하여 중국 통일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었다. 양자는 극히 대조적이기도 하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의 축조에서 보듯 폐쇄적이었다면 수양제는 고구려 원정에서 알 수 잇듯이 팽창적이엇다. 또한 수양제는 분서갱유의 진시황과 정반대로 방대한 분량의 서적을 편찬하엿다.

현대의 마오쩌둥은 통일 중국을 업그레이드했다는점에서 진시황과 수양제와비견할 만하다. 마오는 진시황처럼 페쇄적이었으며 동시에 수양제처럼 팽창적이었다. 그는 또 말년의 문화 대혁명과 같은과오를범해 자신이 세운 라라를 위기에 빠뜨렷는데 이점 역시 진시황과 수양제의 전철을 밟았다는평가를내릴 수 잇다.

로마의 네로 황제, 연산군이 그러했듯이 양제는 시인이었다. 그 것도 뛰어난.

양제의 대표작으로 '음마장성굴행(飮馬長城窟行)'이 있다. 그가 서역을 순시할 때 지은 이 시의 대목은 다음과 같다.

"서늘한 가을바람 불어오니
유유히 만리길을 간다
겨울 까마귀 몇 개의 점처럼 날고
흐르는 물은 외로운 마을을 감고 도네

肅肅秋風起)
悠悠行萬里
寒鴉飛數点
流水繞孤村"

후대의 시인은 양제의 이 시를 두고 시인으로 이름을 날린 삼국지의 조조의 풍모를 지녔다고 평가했다. 명말청초의 대학자 왕부지는 "영웅의 기상(英氣)를 느낄 정도"라는 인상기를 남겼다. 성당 시대의 웅장한 미학과 호기는 그에서 비롯되었다고까지 극찬했다

양제는 이 시뿐만 아니라 여러 편의 명품 시를 남겼다. 양제는 장약허(張若虛)의시로 유명한 ‘춘강화월야(春江花月夜)’와 같은 제목의 시를 썼는데 장약허가 양제의 시를 모사한 느낌이 강하다는 평가가 있다.
황제가 쓴 시이지만 보아 줄 만한 정도라는 수준을 넘어 시인으로서도 아주 뛰어난 작품을 지었다는 것이다.

양제의 자살로 수나라는 2대 37년 만에 멸망했다. 남북조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천하를 통일했던 수나라가 멸망하게 된 결정적 원인은 바로 고구려 원정 실패 때문이었다.

수의 뒤를 이은 당 나라 역시 고구려 원정을 계속하였고 마찬가지로 여러 차례 실패했다. 그러나 결국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성공했다. 수양제의 1차 고구려 원정이 있었던 611년 이래 57년 만에 성취한 '동북공정'의 성취였다.

[동북공정] 鄭成功 그리고 고구려 (3) 2004/01/30 13:26

1995년 = 새장(鳥籠)경제론의 천윈(陳雲)이 사망했다. 1905년생으로 향년 90세였다. 덩샤오핑의 동지이자 경쟁자라는 이중적 위상을 갖고 있던 그는 덩보다 한 해 늦게 태어났고 죽기는 2년 먼저였다.

1980년 = 1950년 체결된 중소우호동맹 상호원조 조약 실효. 1950년 4월 11일 발효한 이 조약은 유효기간이 30년이었다. 체약국 중 한 나라가 조약 만료 1년 전까지 폐기를 제기하지 않으면 기한을 5년간
연장하기로 하였다.

이 조약은 그러나 중소 이념 분쟁과 국경 충돌로 인해 1960년대 후반부터는 사실상 식물 조약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중국은 조약 만료 1년 8일 전인 1979년 4월 3일 5기 전인대 상무위원회 7차회의에서 국제정세의 중대한 변화에 따라 이 조약을 만기 이후 연장하지 않기로 결정함으로써 오랫동안 방치한 이 조약의 관에 못질을 한 셈이다. 조약 발효 30주년을 하루 앞둔 이날 마침내 중소 우호동맹 상호원조 조약의 관이 역사의 무덤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

[今天歷史-2월14일] 周恩來 북한 방문, 중소 우호조약

1971년 = 재미 화교 중국 이 자국의 영토로 주장하고 있으나 일본이 실효 지배하고 잇는 ‘댜오위타이(釣魚台 : '조어도<釣魚島> 열도'의 주섬을 일컫음, 일본은 '센카쿠<尖閣> 제도'로 부른다)를 지키자는 ’ 슬로건 아래 워싱턴에서 시위.

1971년 4월 10일 일본 나고야(名古屋)에서 개최된 제 31회 세계 탁구선수권 대회에 참석했던 미국 선수단이 중국선수단의 초청으로 역사적인 중국 방문길에 올랐다.

중미 화해와 냉전질서의 해체를 가져 온 ‘핑퐁 외교’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미국과 중국은 국제전략적 차원에서 상호 접근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우선 소련과 국경충돌을 빚은 중국은 ‘원교근공(遠交近攻)’과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전통적 전략논리에 따라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하는 상황이었다.

또한 미국은 베트남전의 수렁에서 빠져 나오고 소련의 공세에 대한 수세적 입장에서 국면전환을 이루기 위해 역시 중국과의 화해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양국 화해 시도는 겉으로 보기에는 미국 측이 보다 적극적이었다.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은 1969년 8월 파키스탄의 아유브 칸 대통령과 루마니아의 니콜라이 차우세스쿠 대통령을 통해 중국과의 화해의사를 중국 지도부에 전달했다.

중국도 이에 응했고 파키스탄을 중계로 하여 미국 고위 지도자의 중국 방문 협상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열린 세계 탁구대회에서 미국인 선수들은 국제무대에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중국 선수단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급기야 미국 선수단 부단장이 중국 대표단 단장에게 미국 북쪽의 캐나다와 남쪽의 멕시코의 선수단은 초청하면서 왜 우리는 초청하지 않느냐며 중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공식적으로 전달하는 단계에 까지 이르렀다.

중국 선수단은 미국 선수단의 방문의사를 본국에 전달했으며 국가체육위와 외교부는 협의를 가진 끝에 현 시점에서 초청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국내인민들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도 같은 생각이었고 마오쩌둥(毛澤東) 역시 처음에는 이에 동의했다.그러나 마오는 곧 마음을 바꿔 미국 선수단을 초청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마오는 공산 중국 건국20주년 기념일인 1969년 10월 1일 '중국의 붉은 별'으 작가로 유명한 미국인 에드거 스노를 자신을 포함한 중국 지도자들과 함께천안문 망루에 세운적이 있었다. 이해 3월 소련과의 국경 충돌로 위기감에 빠졌던마오는 미국을 향한 화해 제스처의 정치 이벤트로 이 퍼포먼스를 연출햇던 것이다. 중소 화해의 물꼬를 튼 헨리 키신저는 그때는 중국의 간절한 신호를 알아채지 못했다고 훗날 술회했다. 미국은 '겉으로는 시큰둥하지만 속타는' 중국의 손짓에 호응하지 못하고 자기 나름의 구애 공세를 편 것이다.

마오는 파키스탄의 중재로 진행되고 잇는미중 접촉에 극적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미국 탁구 팀 초청을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작은 공으로 큰 공을 움직이자(小球轉動大球)‘라는 마오의 전략적 판단이 발동한 것이다.

미국 선수단의 중국방문을 계기로 미국에서는 ‘중국열’이 일었으며 이러한 분위기를 이용, 저우언라이 총리는 이해 1월 5일 닉슨 대통령이 파키스탄 대통령을 통해 전해온 서신에 대한 구두 메시지를 미국 측에 전했다.

그 것은 미국 대통령의 특사, 심지어 미국 대통령까지도 중국에서 맞을 용의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천안문 망루에 에드거 스노를 세우는 중국식의 은유적 응답이 아닌 보다 분명한 미국식 답변을 한것이다.

결국 이해 7월 백악관 안보담당 특별보좌관 헨리 키신저의 중국 방문에 이어 1972년 2월 닉슨 대통령의 역사적인 중국 방문이 이루어졌으며 2차대전 후 지속돼온 양극체제가 다극체제로 전환되는 계기가 마련됐다.

‘핑퐁’이 지구를 움직인 것이다.

핑퐁외교가 가져다 준 작은 소득 하나는 한자권 국가들에게
단절된 기간 동안의 중국의 문자개혁을 실감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핑퐁을 표기한 중국의 간체자 ‘??’은 한국을 포함한 기타 한자권 국가에서는 이전에 전혀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문자였다.

2018/04/10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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