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4/27 06:20



[今天歷史-4월11일]애치슨과 맥아더...동은 동 서는

'동은 동, 서는 서, 둘은 하나가 될 수 없다'

'정글북'을 쓴 영국 작가 러드야드 케플 의 말이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보유하던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였던 시절 키플링에게 있어 동'은 인도라는 프리즘을 통해 본 아시아였고 '서'는 영국을 포함한 서양을 지칭했다.

동과 서는 서로 이질적인 존재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인데 각각에 대한 이해관계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동과 서의 이해를 동시에 맞출 수 없다는 지적으로도 이 말의 의미를 확대할 수도 있겠다.

4월11일은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 잊지 못할 중요한 영향을 끼친 두 사람과 관계있는 날이다.

본의는 아니었으나 그의 세계전략 정책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단군 이래 가장 참혹한 전쟁을 치르게 만든 딘 애치슨의 기일이다.

그리고 더글러스 맥아더가 한국전 와중에서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한국전 참전 유엔군 사령관과 미 극동군 사령관 직에서 해임된 날이다. 한국전 지휘봉을 박탈당했다.

맥아더 해임으로 우리나라의 분단은 '일시적'인 것이 아닌 '장기적'인 것으로 굳혀졌다.

애치슨은 유럽 중심주의자였다. 맥아더는 아시아 적극론자였다.

1950년 1월 애치슨은 중국 국민정부에 데한 방어를 사실상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동'을 버리고 '서'에 대한 보호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그의 큰 세계 전략 그림 아래서 '무(無) 대접' 대상이었다.

1950년 6월 한국전 개입 선택은 일본이 위협받게 되어 미국의 전력이 분산되어 유럽이 취약해질 것이라는 대 전략 차원에서였다.

맥아더에게 있어 한국은 '득농망촉'의 '농'이었을 뿐이었다. 그는 '촉', 즉 중국을 응시하고 있었다.

1951년 봄 트루먼은 '동'과 '서'를 함께 아우를 수 없었다. 선택을 해야 했다. 그의 선택은 '서'였고 그것은 맥아더의 해임이었고 한반도의 분단 지속화였다.

2018년 4월 미국은 '서'와의 인계 철선 시리아와 '동'의 도미노 첫 패 '한반도'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쫓아야 하는 처지다.

1951년처럼 제로섬 게임의 선택인가. 아니면 '동'과 '서'를 모두 아우르느냐다.

내일은 어제의 반복일까. 아니면 반면교사일까. <스위프트-버크왈드>

上海임시정부, 沈太福, 장제스 상하이 주둔군 공산당 무기고 접수, 나폴레옹 황제 강제 퇴위 엘바섬 유배, 미국 필리핀 점령 식민지 삼아, 1차 걸프전 종식, 김주열군 시신 발견, 김상진 군 유신 반대 할복 자살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上海)에서 수립됐다. 대한제국이 일제의 병탄으로 멸망한지 9년만에 임시정부가 세워진 것이다.

3.1 운동의 영향으로 수립된 이 임시 정부는 정체를 군주제가 아닌 공화제로 하였다. 주권을 잃은 가운데 군주제로부터 공화제로의 혁명이 이루어졌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임시정부 청사는 프랑스[ 조계(租界) 마랑루(馬浪路 현 마당루馬當路) 푸칭리(普慶里) 4호에 있었으며 대외적으로는 ‘고려교민사무소(高麗僑民事務所)’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1차 임시정부 대표회의에서 임시헌법을 통과시키고 이승만(李承晩) 박사를 국무총리로 선출했다(이승만은 미국에서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자신의 직함을 대통령으로 사용하였다. 이로 인해 안창호 등과 갈등을 빚기도 하였으나 1919년 9월6일 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1994년 = 베이징(北京)시 창청기전 과기산업공사(長城機電科技産業公司)의 총재 선타이푸(沈太福)가 최고인민법원이 사형을 확정함에 따라 형장으로 이송되어 처형되었다. 처형 당시 선타이푸의 나이는 37세였다.

당시 선타이푸의‘창청기전’은 현재 세계 굴지의 가전제품 제조업체로 성장한 하이얼 집단유한공사(海爾集團有限公司) 보다 매출 규모가 월등하고 인지도 면에서도 훨씬 앞선 브랜드의 가전업체로 중국 최대의 민영 전자회사였다.

그의 죄목은 불법적으로 모집한 자금을 개인적으로 횡령하고 관리에게 뇌물을 제공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경제범죄에 극형이 선고된 것은 선타이푸가 24%의 고율의 이자율을 내세워 20만명으로부터 모집한 8억 위안(당시 한화로 800억원 상당)을 투자자에게 돌려주라는 인민은행의 지시에 대해 공개적으로 도전했기 때문이었다.

인민은행은‘묻지마 투자’에 따른 경제 과열을 진정시키기 위해 창청의 자금모집 방법을 불법적인‘난집자(亂集資)’로 규정했던 것이다.

인민은행의 지시를 이행하는 것은 회사의 파산을 의미했다. 선타이푸는 자신의 자금 모집 방법은 인민은행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회사채 발행이 아니고 창청이 개발한 신기술에 대한 일반 투자자와의 계약 행위라고 주장했다.

그는 인민은행의 조치는 기업에 대한 불법적인 간섭이며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의 지시와도 어긋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선타이푸는 1993년 3월27일 인민은행장 리구이셴(李貴鮮)을 상대로 1억 위안(당시 한화로 100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29일과 31일 잇달아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인민은행의 조치를 맹렬히 비난했다.

한 야심찬 청년 기업인의 이 무모한 도전은 그러나 당랑거철(螳螂拒轍), 즉 '사마귀가 수레 바퀴의 진로를 막아서는' 행위였다.

그는 이후 부인과 함께 해외로 도피하려다 체포되었고 1994년 3월 4일 베이징시 중급인민법원에서 탐오죄(貪汚罪)와 뇌물제공죄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전재산 몰수가 병과되었다.

1927년 장제스(蔣介石) 휘하의 상하이(上海) 주둔군이 공산주의 계열의 상하이 총공회 노동자 규찰대의 무기고를 접수하였다.

이 사건은 국민정부 국민 혁명군 총사령관인 장제스의 상하이 4 ·12쿠데타의 서막이었다.

당시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국민정부의 한 정파의 일부 세력이 다른 정파를 무력으로 타도한 것이기 때문에 쿠데타로 불러야 한다.

장제스가 국민당의 지도권을 장악한 뒤 국민당은 이 쿠데타를 '청당(淸黨)'으로 정당화하였다.

4 ·12쿠데타는 반공을 표방한 장제스를 영수로 하는 국민당 우파가 북벌전쟁의 승리에 영향을 받아 노동자, 농민의 운동이 확대되는데 불안을 느끼던 외국 식민주의 세력과 매판 자본가 등 국내의 반동파와 손을 잡고 일으킨 것이다.

상하이 노동자가 이해 3월 21일~ 22일 일으킨 무장봉기에 성공,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가 입성하기도 전에 군벌세력을 몰아내자 공산주의 이념에 생리적인 반감을 지니고 있던 장제스는 공산당 세력의 무장역량 강화에 위기 의식을 갖게 되었다.

장제스는 상하이로 진주한 뒤 비밀리에 쿠데타를 꾀하였다.

장제스는 상하이 비밀결사 청방(靑幇)의 우두머리 황진룽(黃金榮) 등에게 명하여 11일 노동자 규찰대 본부를 습격하게 하였고, 국민당 제26군이 이를 지원하도록 했다.

습격 과정에서 규찰대 수십 명이 살해되었다. 13일 상하이 노동자는 이에 대해 총파업으로 항의하고 10여만 명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장제스는 이 시위대에도 발포하게 하여 100여 명이 피살됐다. 이리하여 12일부터 불과 3일 사이에 3000여 명이 살해되고 5000명이 행방불명되었다.

장제스가 기존 우한의 국민정부에 맞서 난징(南京)에 새로운 국민정부를 세운 것은 상하이 쿠데타(4·12쿠데타)가 일어난 날로부터 겨우 6일이 지난 4월18일이었다.

상하이 쿠데타는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말로‘인간의 조건' 소재가 되었다.

1971년 = 한국전쟁 발발의 한 계기를 마련한‘애치슨 라인’을 설정한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사망했다. 1893년생으로 향년 78세였다.

1950년 1월12일 애치슨 국무장관은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서 행한 ‘아시아의 위기’라는 연설에서 이른바‘애치슨 라인’을 언급했다.

그는 태평양에서 미국의 방위선을 알류샨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정한다고 하였다. 즉 방위선 밖 한국과 대만 등의 안보와 관련된 군사적 공격에 대해 보장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애치슨은 이 발언으로 6개월 뒤 일어난 한국전쟁을 유발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겨냥한 목표는 다른 데 있었다. 그 것은 중국 공산정권을‘마오의 농민정권’으로 간주하고 이를 유고화하자는 것이었다.

‘애치슨 라인’이 미국의 대아시아 군사전략이었던‘도서방위선(島嶼防衛線) 전략’을 재확인하면서도 섬인 대만을 방위선 밖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도는 누가 보아도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었다.

미국이 마오의 공산 정권을 유고화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내자 소련의 스탈린은 이해 2월14일 마오와 모스크바에서 중국 동북 지방, 즉 만주에 대한 제국주의적 유산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중소 우호협력 동맹조약을 체결했다.

스탈린은 이에 안심할 수 없어 한반도에 친소적인 국가를 세우기 위해 김일성의 전면전 요구를 허용했고 이는 이해 6월 25일 한국전 발발을 가져왔다.

애치슨 라인은 그 의도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 셈이다.

1951년 =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한국전을 만주까지 확대할 것을 주장하는 맥아더 장군을 유엔 총사령관 직에서 해임하고 후임에 리지웨이 중장을 임명.

세계사 속의 오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 황제에서 강제 퇴위되어 지중해의 엘바섬에 유배됐다(1814).

미국이 1898년 12월10일 미-스페인 전쟁 종결을 위한 파리강화조약에 따라 필리핀을 점령했다(1899).

이는 미국이 아메리카주를 벗어나 제국주의적 영토 경쟁에 참여하였음을 의미했다.

필리핀 점령군 육군사령관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의 아버지 아서 맥아더였고 초대 총독은 윌리엄 태프트로 그는 1905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행정부의 육군장관으로서 일본과 미국 간에 조선과 필리핀에 대한 식민주의적 지배권을 상호 인정하는 가쓰라 -태프트 밀약의 미국 대표가 된다.

1899년 4월11일 에 완료된 미국의 필리핀 점령은 1898년 4월25일 발발한 미-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한데 따른 것이다.

프랑스의 조정에 의해 1898년 12월10일 체결된‘파리조약’은 스페인 식민지였던 태평양상 필리핀과 괌, 그리고 카리브해 푸에르토리코를 미국에 할양하고 쿠바를 독립시키기로 했다.

또한 스페인이 미국에 2000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했다. 미국은 이로써 제국주의 경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화함에 따라 1895년 청일전쟁 승리로 대만을 할양받은 역시 신흥 제국주의 세력인 일본과 잠재적 긴장 관계에 빠져 들었다.

주목할 것은 미-스페인 전쟁은 청일전쟁의‘아메리카 버전’이라는 점이다.

일본이 조선의 동학혁명을 빌미삼아 전쟁을 일으킨 것처럼 미국은 필리핀과 쿠바의 독립운동을 이용하여 스페인과 전쟁을 벌였다.

처리 방식도 비슷했다. 일본은 청국으로 하여금 조선이 독립국임을 인정케 하여 조선에 대한 배타적 영향력을 확보했다.

미국도 쿠바를 독립시켰다. 이로써 쿠바에 대한 스페인의 종주국으로서의 영향력은 소멸됐다.

미국의 필리핀, 괌 접수는 일본이 랴오둥(遼東) 반도와 대만을 할양받은 것을 연상시키지 않을 수 없다. 패전국이 승전국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한 것 역시 같다.

명말 청초 대만을 근거지로 반청활동을 벌였던 정성공(鄭成功)이 이미 필리핀 공략의 계획을 세웠던 사실을 감안하면 필리핀과 대만의 새로운 지배자인 미국과 일본은 서로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러일전쟁 기간인 1905년 일본과 미국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것은 잠재적 갈등 요인을 제거하자는 것이었다. 밀약을 통해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했다.

그러나 태평양의 패권경쟁자들이 속속 탈락하는 가운데 미국과 일본의 갈등은 에스컬레이트 될 수밖에 없었고 폭발한 것이 바로 1941년 태평양 전쟁이었다.

미국의 필리핀 점령이 완료된 날로부터 만 52년이 지난 1951년 4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유엔사령관 직에서 해임했다.

한국전에 개입한 중국군을 한반도 허리 부분에서 일단 저지하는데 성공한 맥아더가 전쟁의 최종 승리를 위해 만주폭격을 통해 만주까지 전쟁을 확대할 것을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맥아더가 만주폭격을 주장한 이해 3월24일 미군이 서부전선에서다시 38선을 돌파했고 국군도 동부전선에서 다음날인 3월25일 38도선을 돌파했다.

3월30일에는 미군 탱크부대가 서부전선에서 38도선을 넘었고 4월 4일에는 국군이 38도선 바로 밑 개성을 다시 수복했다.

전황이 유엔군의 재북진 모드로 급속도로 진행되자 트루먼 행정부는 맥아더의 확전 요구에 답을 내려야 했다.

그 답은 맥아더 해임이었다. 확전 요구에 분명하게 "No"를 선언한 것이다.

트루먼의 맥아더 해임은 일본의 전철을 반면교사로 한 것으로 보인다. 만주에 들어간 일본은 중국과 일전이 불가피했고 이는 또 태평양 전쟁으로 빠져들게 했다.

만주확전이 소련과의 3차대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트루먼은 보았던 것이다.

트루먼의 역사적 선택으로 아편전쟁이 이후 전쟁이 그칠 새 없던 동북아는 장기간 지속되는 평화시대의 막을 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평화는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라는 비용을 지불했다. 기형적이며 본질적으로 불안한 것이었다.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할 때 육군사령관은 남북전쟁의 영웅 아서 맥아더로 더글러스 맥아더는 그의 셋째 아들이다. 미국의 아시아 진출의 첫발을 맥아더가 그 한계선 역시 맥아더가 그은 셈이다.

[書中一滴] 한국전쟁 전야의 중국 중앙위 전체회의 2004/02/04 18:37

[書中一滴] 한반도 중국외교의 함정 2005/10/19 15:04

1차 걸프전이 종식되었다(1991).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

마산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군의 시신이 발견됐고(1960), 서울농대생 김상진군이 유신체제와 긴급조치에 항의, 할복 자살했다(1975).

김주열군의 시신이 발견된 8일 뒤 4·19 혁명이 일어났고 그 일주일 뒤인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이승만 정권이 종식을 고했다. 김주열군이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3월15일 (마산 부정 선거 규탄 시위가 일어난 날) 한달 11일 뒤 이승만 독재 정권이 붕괴한 것이다.

한편 김상진의 항의 자살 4년6개월 보름 뒤인 1979년 12월26일 유신체제는 종말을 고했다.

김상진 할복 자살은 15 년 전의 김주열 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될 만큼 반정부 분위기는 고조됐으나 같은 달 베트남이 월맹군의 무력으로 공산화함에 따라 도리어 유신체제가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결국 유신체제는 유신 제의 내부 모순으로 '총구'가 '심장'을 쏨으로써 붕괴하고 말았다.

2018/04/11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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