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4/23 06:21



[今天歷史-4월15일]胡耀邦 사망... ‘죽은 총서기’, ‘산 시황제’를 쫓다.

오늘은 후야오방의 29주기다. 또 이날은 김일성이 테어난지 106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중국 공산주의 역사에서 개혁과 정치 민주화의 아이콘이자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는 후야오방 존재의 의미를 공산당 선언의 첫 문장을 패러디하여 짚어보자.

'하나의 유령이 중국 상공을 배회하고 있다. 그것은 '정치 개혁과 민주라는 이름의 유령이다.'

중국 고사에 빗대어 보자.

'죽은 총서기'가 ''산 시황제'를 쫓다.

후야오방을 추모하기 위한 대학생이 주도한 시위는 천안문 광장에 '민주 여신상'을 세우기에 이르렀고 그 며칠 뒤 덩샤오핑에 의해 유혈 진압됐다.

1989년 천안문 광장에 모인 중국 대학생은 1978년 말 정치 민주화라는 민주의 벽 운동을 일으킨 웨이징성과 마찬가지로 너무 앞서 나갔다.

그리고 덩샤오핑은 1978년과 마찬가지로 레드라인 안쪽에 여전히 머물렀다.

덩샤오핑의 '손오공 개혁 비상'은 '여신의 손바닥' 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2008년 류샤오보가 '체코의 68 헌장'을 오마쥬한 '중국의 민주 정치개혁을 촉구하는 '08 헌장' 을 발표하여 민주 정치개혁의 잉걸(이글이글 핀 숯덩이)을 지켰다.

류샤오보는 중국 최초 노벨 평화상 수상이라는 영광과 자신의 생명을 교환했다.

시진핑은 1인독재 강화와 영구 집권을 정력적이며 과감하게 추진하여 이를 거의 성취한 느낌이다.

거센 북풍의 한파 속에서도 웨이징성, 왕단 그리고 류샤오보로 이어지는 정치개혁의 잉걸은 꺼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후야오방은 하늘에서 '유령'처럼 배회하며 이를 지켜보고 있다.

덩샤오핑은 공산주의 버전의 '민주'를 레드라인으로 삼았다. 개혁적이지만 여전히 공산주의자였던 후야오방은 민주의 외연을 넓히자는 것이었다.

시진핑은 덩샤오핑이 설정한 레드라인에서 후방으로 크게 뒷걸음질을 한 것이다.

중국 대륙의 하늘 아래서는 시간이 갈수록 '민주'라고 쓰고 자유로 읽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김일성 생일 명절인 이날 후야오방 외에도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이 많이 세상을 떠났다.

'킬링 필드'와 '킬러 스마일'이 오버랩 되는 폴 포트가 독재자의 추한 몰골을 연출하며 지상을 떠났다.

"그도 프랑스의 영광이다"라며 우파 대통령 샤를르 드골에 의해 '언터처블'의 존중을 받았던 공산주의를 옹호한 좌파 지식인이자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샤르트르도 이날 타계했다.

젊은 시절에는 사람들을 은막 속의 가공세계로 끌어들였고 은퇴 뒤에는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던 그레타 가르보가 이날 세상과 작별했다.<스위프트-버크왈드>

중-인 국교 회복, 김일성 출생, 그레타 가르보 사망, 사르트르 사망, 폴 포트 사망, 타이타닉 호 침몰

1989년 4월15일 = 후야오방(胡耀邦) 중국공산당 전 총서기가 심장병으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향년 74세.

그의 죽음이 전해지자 베이징(北京) 대학 학생이 추념시위를 벌였다. 추념 활동은 결국 전반적인 민주화를 요구하는 천안문 시위로 발전하였으며 이해 6월4일 유혈진압으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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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6.4 천안문 사태 야근2005/06/03 22:06

천안문 민주화 시위와 천안문 유혈 진압을 포괄하는 천안문 사태로 인해 후야오방에 대한 당의 제대로 된 평가가 늦춰졌다.

후야오방의 복권은 그의 사후 26년 뒤인 2015년 11월20일 그의 탄생 100주년 좌담회에 시진핑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을 비롯한 당 정치국 상무위원 전원이 참석함으로써 사실상 이루어졌다.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은 후야오방 총서기 해임에 끝까지 반대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1976년 = 인도와 중국이 국교를 회복했다. 1962년 10월20일 중국과 인도가 국경 충돌을 벌인지 14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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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세계적으로 저명한 인사들이 많이 사망한 날이다. 미국 할리웃의 전설적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가 뉴욕에서 향년 84세로 사망했으며(1990),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향년 74세로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1980).

가르보는 1941년 35세로 영화계에서 은퇴한 뒤 독신으로 베일 속에 살면서 문자 그대로 '살아 있는 전설'로 지냈다.

크메르 루즈의 지도자로 킬링 필드의 주역인 폴 포트가 심장병으로 사망했다(1998). 1928년생으로 사망 당시 나이는 70세였다. 본명은 살로스 사르(Saloth Sar)다.

47세이던 1975년 4월부터 베트남군이 침공한 1978년 12월까지 캄보디아 최고 지도자였던 그는 축출 후에도 게릴라 항쟁을 지휘하다가 사망 한 해 전인 1997년 6월 부하에 체포되어‘민족 반역’과‘동지 살해’죄를 범했다는 이유로 그 해 7월25일 종신형에 처해져 감금 생활을 하다가 죽었다.

폴 포트는 농촌 공산혁명과 절대적 평등으로 요약되는 마오이즘을 크메르와 같은 작은 나라에서 극단적으로 실시할 때 어떠한 지옥이 연출되는가를 보여준 인물이다.

그 과정에서 숱한 동족을 살해하고 기아에 내몰아 '평등의 공산 낙원'이 아닌 '살해와 죽음의 벌판'을 만들었다.

폴 포트는 '덕의 공화국'이라는 이상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길로틴을 무자비하게 동원한 프랑스 대혁명의 로베스 피에르를 연상시킨다.

처형 공포에 가위 눌린 부하에 의해 몰락한 점도 로베스 피에르의 몰락과 흡사하다. 그러나 로베스 피에르를 길로틴으로 보낸 프랑스에서와는 달리 폴 포트는 비록 감옥에 갇혔으나 '와석 종신' 했다.

하지만 순간에서 모든 것을 끝 맺게 한 프랑스 방식보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시달리게 하다가 심장발작으로 죽게한 것이 그에게 합당한 단죄인지 모른다.

밀림 게릴라 기지에서 폴 포트 재판 광경과 죽은 뒤 화장되는 모습 등이 동영상으로 공개됐다. 동영상 속 폴 포트는 최고 지도자였던 이의 위엄과는 거리가 멀었다.

불안해 하고 수치심에 찌들려 행동이 부자연한 한 노인네의 모습이었을뿐이었다.

영국 호화여객선 타이타닉호가 첫 출항 3일 만에 북대서양에서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하여 1500명이 사망했다(1912).

우리나라 역사

김일성이 태어났다(1912).

영국이 거문도 섬을 점령했다(1885 ).



2018/04/15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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