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7/18 06:10



[今天歷史-4월17일]下關조약...김옥균 명성황후 대원군

동북아의 노대국이자 대륙 세력인 청나라와 신흥하는 해양 세력 일본 간 지역 패권 쟁탈전 청일전쟁이 끝난 1895년은 간지로 따져 을미년이다

우리는 이해를 왕비가 본궁인 경복궁 한복판에서 일본 낭인들에 의해 참살당하고 시신이 불태워진 참담하며 부끄럽고 비분강개를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해로 기억하고있다.

청일전쟁을 전후로 하여 우리나라 조선 말기 역사에서 가장 중심인물이며 영향력이 컸던 세 사람이 4년 사이 정치 무대에서 모두 사라졌다.

그들은 갑신정변 지도자며 주모자 김옥균, 국왕 고종의 부인으로 최고 실권자 명성황후 민씨 그리고 고종의 부친으로 명성황후에 앞서 최고 실권자로 군림한 흥선대원군 이하응이다.

앞의 두사람은 생물학적 사망과 함께 더 이상 정치적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됐다. 마지막 한사람은 생물학적 사망에 앞서 정치 생명이 끝을 맺었다.

격동하는 서세동점의 국제정세 소용돌이 속에서 동북아의 약소국 조선의 세 정치인은 외세의 틈바구니에서 이런 운명을 맞았고 이는 망국이라는 비극적 앞날을 예고했다.

청일전쟁 발발 4개월 전인 1894년 3월 김옥균이 암살됐다. 청일전쟁 종결 6개월 뒤인 1895년 10월 왕비 민씨가 시해 당했다.

이하응은 일본의 허수아비 노릇을 거부하여 1898년 생물학적 종생 3년 앞서 정치적 사망 선고를 받아야 했다.

1851년생으로 동갑인 김옥균과 명성황후는 정적 관계였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관계인 대원군과 명성황후 역시 불구대천의 정적 사이였다.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켜 일본 메이지 유신과 같은 체제 변혁을 하려던 김옥균은 해양 세력인 일본의 힘을 끌어들여 실패한지 10년 뒤 대륙 세력인 중국 청나라로 말을 바꾸어 타려는 시도를 하려다 암살을 당했다.

그를 죽인 홍종우는 프랑스 유학생 출신으로 해양 세력을 미래의 패자로 간주, 김옥균의 변신에 주저 없이 총을 쏘았다.

명성황후는 일본이 승리하자 또 다른 대륙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이 승리를 통해 확보한 한반도에서 세력 우위를 잃도록 만들자 일본의 비상 조치로 제거된 것이다.

대원군은 이이제이와 원교근공 방식을 배합하여 프랑스의 힘으로 러시아를 견제하려 하였으나 두차례 서양 세력의 침략을 받기에 이르자 대책 없는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와중에 실각했다.

대원군은 실각 10년 뒤인 1882년 임오군란으로 잠시 권력을 되찾았으나 청나라는 일본 등 해양세력의 견제라는 국제 정치적 전략적 판단에 따라 대원군을 중국 톈진으로 납치했다. 이는 대원군의 불가역적 실각으로 귀결됐다.

대원군은 이후 정적인 며느리로부터 탈권에 골몰, 일본에 접근하기까지 하였으나 을미사변 후 그들의 허수아비로 이용당하는 것을 주저하다 정치적 식물인간이 되었다.

김옥균은 1894년에, 명성황후는 그 한해 뒤인 1895년 그리고 대원군은 명성황후 시해 3년 뒤 생을 마감했다.

고종은 힘있는 외세에 둘러싸여 질식사할 압박을 당하면서도 다중 접시 돌리기 식의 위태하고 불안한 세력 균형을 취했다.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독립 자주를 표방하는 황제국으로 체제를 바꾸는 나름 개혁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이는 허울뿐인 실속없는 코스프레였다. 결국 대원군 사후 12년 뒤 망하고 말았다.

'앞서의 일을 잊지말자 아프로 다가올일의 스승이 될지니(前事不忘 後事之師)' <盲瞰圖子>

1895년 4월17일 중국 청나라의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이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일본정부와‘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다.

중국 입장에서 치욕적인 이 조약은 청일전쟁에서 청군의 참담한 패전으로 인해 체결되게 되었다.

1894년 7월25일 일본군이 황해(서해) 아산 앞바다 풍도에 정박 중인 청나라 해군을 선제 기습 공격함으로써 일어난(정식 선전포고는 8월1일) 청일전쟁에서 청 육군은 조선에서 패배하였고 뒤이어 랴오둥(遼東)에서도 패전하였다.

[今天歷史-7월25일] 청일전쟁 개전, 한국전 참전기념탑

이홍장이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북양해군 함대 역시압록강 하구 해역서 벌어진 황해해전에 패전하였고 기지인 산둥(山東) 반도의 웨이하이웨이(威海衛) 앞바다에서 섬멸되었다.

이처럼 육해군의 궤멸로 인해 베이징(北京)과 톈진(天津)이
위협을 받는 지경에 이르자 청은 다급하게 화의에 나섰다.

중재에 나선 미국의 권유에 따라 청은 호부시랑 장음환(戶部侍郞 張蔭桓)과 호남순무 소우렴(湖南巡撫 邵友濂)을 전권대신에 임명하여 일본 히로시마(廣島)에 가서 일본과 화의 교섭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일본 측이 이들의 직책이 낮다며 회담을 거부하자 청조는 북양대신 이홍장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이홍장은 1895년 3월19일 아들 이경방(李經方)과 미국인 고문 포츠담 등 100여명의 수행원을 이끌고 시모노세키에 도착, 24일부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일본 총리와 화의회담에 들어갔고 미국이 중국을 거드는 가운데 마침내 4월17일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은 ‘조선의 완전 자주’를 규정하였는데 이는 실제적으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인정한 것으로 중국을 완전 배제한 가운데 조선에 대한 내정과 외교 간여와 통제를 승인한 것이었다.

시모노세키 조약 이후 중국은 반세기 넘도록 한반도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중국은 일본의 식민지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1943년 12월 카이로회담에 국민정부의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참석한 것을 계기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복원하기 시작했으며 1950년 10월 공산정권이 한국전에 개입함으로써 1895년 이전의 위상을 회복하였다.)

청나라는 또한 랴오둥 반도와 대만, 펑후(澎湖)열도를 할양했다. 이중 랴오둥 반도는 러시아가 주동이 된 '삼국간섭‘으로 3000만량의 백은(白銀)을 주고 돌려받게 된다.

이외에도 전쟁배상금으로 청이 일본에 2억량을 주는 것으로 했고 일본인들이 중국의 통상항구에서 공장을 세울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밖에 쑤저우(蘇州), 항저우(杭州), 충칭(重慶), 사스(沙市)를 개방하도록 했으며 청일통상항해조약을 구미열강과 같은 조건으로 맺고, 일본의 치외법권, 편무적 협정관세율을 승인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약내용이 알려진 후 이홍장은‘매국적(賣國賊)’으로 규탄되었으며 대만인은 타이난(台南) 수장(守將) 유영복(劉永福)을 군통(軍統)으로 추대하고 4개월 동안 일본군에 대항했다.

한반도에 대한 배타적 영향력을 놓고 중국과 일본이 전쟁을 벌이기 전후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청일전쟁 한해 전 1894년 갑신 정변 후 일본에 망명중이던 김옥균이 이홍장과 담판을 짓기 위해 중국을 방문했다.

10년 전인 1884년 갑신정변 때 일본을 이용, 중국의 속박에서 벗어나려 햇던 김옥균은 갑신정변 과정을 겼고 망명생활을 보내면서 일본의 침략 의도를 간파하고 중국을 이용하여 일본을 견제하려는 생각에 이홍장과의 담판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옥균은 일본에서 접근, 그의 중국 방문에 동행한 프랑스 유학생 출신 홍종우에게 암살 당해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 틈바구니에서 견제와 균형을 모색하는 해 19세기판 한반도의 등거리 외교라는 그의 꿈을 펴보지도 못했다.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배한 뒤 고종의 비로 정치 실권자였던 명성황후는 삼국간섭의 주도국 러시아에 접근, 점증하는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려 했다.

하지만 명성황후 역시 1895년 10월 일본 낭인대에 의해 암살됐다. 이른바 을미사변이다.

1851년생으로 동갑인 김옥균과 명성황후는 국제 정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각각 나름의 국가의 자주권을 유지하려다 1년 간격으로 비극적 최후를 마쳐야 했다.

김옥균은 청일전쟁 발발 4개월 전인 1894년 3월28일에 프랑스에 유학, 국제 정세를 파악했을 것으로 판단되는 개화파 조선인 홍종우에 의해 중국 상하이에서 암살됐고 명성황후는 청일전쟁 종전 반년 뒤인 1895년 10월7일 일본 낭인에 시해됐다.

여기서도 친일적 개화파 조선인이 앞장서 인도했다. 대표적 인물이 훈련대 2대대장 우범선이다. 그가 일본에 망명한 뒤 일본인 여자와 사이에서 낳은 첫째 아들이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한 우장춘 박사다.

김옥균은 일본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일본을 끌어들여 정변을 일으켜 과오를 범했고 또 명성황후는 자신의 가문인 민씨 척족세력을 끌어 들였고 또한 그의 정치적 판단도 그 기초는 나라 보다는 자신의 가문과 왕가 가족이 중심이었다.

따라서 두 사람에 대한 정치적 평가와 역사적 평가의 호불호가 크게 갈린다.

고종은 인도된 김옥균의 시신을 능지처참했다. 대역죄인으로 간주한 것이다.

명성황후의 암살에 참여한 조선 측 인사들은 나라를 위해 좀 더 구체적으로 개활를 위해서는 수구파의 핵심 명성황후가 제거되어야 한다는 나름의 정치적 소신을 갖고 있던 확신범이었다.

이런 치명적 단점을 지닌 두 사람이지만 그들이 선택했던 길은 그 성패와 관계없이 조선의 망국을 막기위한 유일한 길이었다.

고종은 1896년 2월11일 경복궁에서 경운궁(현 덕수궁) 부근에 있었던 정동의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이른바 아관파천을 단행, 김홍집 친일 내각을 무너뜨렸다.

김홍집이 고종에 환궁을 간언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하다가 분노한 민중에 의해 저자 거리에서 맞아 쓰러진 가운데 밟혀 죽혔다. 그의 시신은 며칠 동안 수습되지 않고 방치되었다고 한다.

윤치호의 스승으로 중요 개화파 인사로 김홍집 내각에서 탁지부 대신(호조판서에 해당 )을 맡았던 어윤중은 고향으로 피신했다가 원한을 샀던 동네 사람에 의해 타살됐다.

우범선은 일본으로 망명했으나 고종이 파견한 자객에 의해 피살됐다.

고종은 파천 1년 뒤인 1897년 2월 환궁하였으며 8개월 뒤인 1897년 10월12일에는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함으로써 러시아로 일본을 견제하여 조선의 일본 속국화를 막자는 명성황후의 소박한 그러나 당시 국제정세 하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구상을 구현하였다.

한반도에서 황제국 수립은 고려 광종 이후 처음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지난해인 2017년 정유년은 대한제국이 선포된지120주년이 되는 해였다. 두 번째 환갑을 맞은 해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도 자국의 실력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세를 굳히기 시작한 직후의 상황으로 돌아갔고 이는 결국 1910년 일본에 의한 병탄이라는 치욕으로 이어졌다.

청일전쟁을 전후한 김옥균과 명성황후의 죽음은 스스로 힘을 각추지 못한 약소국의 지도자가 자국의 독립 자주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이 얼마나 힘들며 자신의 목숨을 담보해야 하는 것임을 일깨워 준다.

2018/04/17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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