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10/16 17:15



[今天歷史-4월18일] 톈진조약...대륙과 해양 세력의 휴전

1885년 중국 청나라와 일본이 맺은 톈진조약은 서세동점 시기 한반도 현상유지를 위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간 타협책으로 마련한 휴전 조약이었다.

휴전 조약의 양자는 승부를 보아야 결말이 난다는 계산 아래 무력 증강을 꾀했다.

결국 휴전 조약 체결 9년 뒤인 1894년 한반도에 양 세력 사이에 군사 충돌이 벌어졌다. 청일전쟁이었다.

해양세력인 일본이 완승했으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한반도에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간 갈등은 동북아라는 지역 규모에서 글로벌 규모로 확대되었다.

러시아가 주도하여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인 3국간섭을 통해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로 중국 대륙에 확보한 대륙 진출 교두보 요동반도를 토해내야 했다.

1895년 이후 한반도에서는 대륙 연합세력이 상대적 우월적 지위를 갖춘 가운데 해양세력인 일본이 수세적인 처지에 놓였다.

1885년 톈진조약 이후 군사력 확충에만 올인했던 일본은 삼국간섭 이후 세불리를 만회하기 위해 서구 해양세력과 손을 잡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병행했고 그 결과물이 1902년 영일동맹 체결이었다. 여기에 미국도 일본 편에 가세했다.

이러한 정세 변화가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간 갈등을 증폭시켰고 결국 삼국간섭 다시 9년 뒤인 1904년 전쟁이 또 터졌다. 러일전쟁이었다.

한반도를 놓고 벌인 제로섬 전쟁에서 대륙세력의 전면에 러시아가 나선 가운데 프랑스가 러시아편에 섰다.

반면 해양세력의 전면에는 일본이 앞장선 가운데 영국이 적극적으로 일본을 도왔다. 미국은 중립적 자세를 취했으나 초록은 동색 식으로 일본을 지원했다. 전쟁의 결과는 일본의 승리였다. 범 해양세력의 공동 승리였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간 1885년 이래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한 갈등은 20년 뒤인 1905년 일단 해양세력의 승리로 끝을 맺었고 이는 한반도의 해양세력 독점으로 결말이 났다.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은 한국전(1950년~ 1953년)을 통해 전 세계 모든 국가가 모두 인계된 글로벌 차원의 제로섬 전쟁을 벌였다.

동서 양 진영의 참전과 이데올로기 대립이 중첩하여 한반도에 축소된 '예비 3차대전'이었다.

결국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등 지정학적 양 세력 대결과 자유 자본주의와 독재 및 공산주의 양 진영의 대립이 중첩된 전쟁은 휴전 상태로 현상유지하기로 타협을 졌다.

1885년 휴전은 20년 만에 종결되었으나 1953년부터 시작한 새로운 한반도 휴전은 올해로 67년째를 맞고 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17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플로리다에서 정상회담을 갖기 앞서 남북한이 휴전 상태를 종시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며 이에 성취를 이루도록 기원한다고 말했다.

152년 전인 1885년의 휴전은 두 번의 전쟁을 잉태했고 113년 전 1905년의 휴전 종결은 우리 민족에게는 망국의 치욕을, 전세계에는 참혹한 재앙을 불러 일으켰다.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고 '완전하며 검증 가능하고 더나아가 불가역적인'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盲瞰圖子>

1885년 4월18일 청나라와 일본이 톈진(天津)조약(정식 명칭은 天津會議專條)을 체결했다.

조약은 한해 앞서 조선에서 발생한 갑신정변의 뒷수습을 위한 것이다.

김옥균(金玉均)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개화당은 1884년 12월4일 일본 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郞)와 모의하여 유혈정변을 일으켜 사대당의 대신들을 죽이고 친일정권을 세웠다.

임오군란(1882년 6월9일) 이후 서울에 대병을 주둔시키던 청나라의 군대(지휘관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조선 국왕의 요청에 응해 정변에 동원된 일본 군대를 격파하고 개화당 정권을 성립 3일 만에 붕괴시켰다.

일본은 아직 군사력이 청과 전면적으로 대결할 정도가 못된다고 판단하여 일단 청과 평화를 유지한 뒤 훗날을 기약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1885년 2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전권대사, 사이고 쓰구미치(西鄕從道) 육군 중장을 부사(副使)로 삼아 청나라로 파견하였다.

이토 히로부미와 사이고 쓰구미치는 명치유신의 일으킨 조슈번(長州藩)과 사쓰마번(薩摩藩)을 각각 대표하였으며 특히 사이고 쓰구미치는 정한론(征韓論)을 주창했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동생이었다.

이들은 당시 청나라의 실권자인 이홍장(李鴻章)과 협상하여 조선으로부터 청일 양국 군대가 철병하고 조선에서 변란 등 중대사건이 발생하여 조선에 출병할 경우, 상대방에게 문서로 통지한다는데 합의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조선에 출병할 수 있는 특권을 인정받은 것이다.이 대목은 한반도 유사시를 상정한 일본의 유사입법을 연상시키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이 유사입법에 강한 경계감을 드러낸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 때문이다.

[今天歷史-4월16일]미일新가이드라인 三家村札記 燕山夜話

톈진조약은 중국이 갑오전쟁으로 부르는 청일전쟁(1894~1895)의 빌미를 제공했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뒤에는 이홍장이 일본으로 건너가 역시 항구인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조약을 체결했다.

이홍장의 카운터파트는 이토오 히로부미로 10년 전과 마찬가지였다.

[今天歷史-4월 17일]시모노세키(下關) 조약

2018/04/18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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