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8/22 09:03



[今天歷史-4월21일] 양쯔강 도하전투...통일전선

북한 최고지도부와 종북세력에는 4월21일은 흐뭇하게 기억되는 날일 것이다.

1949년 이날 중국공산당의 인민해방군이 양쯔강 도강작전을 개시했다. 이 작전 성공으로 중국공산당은 중국 대륙을 완전 적화하는 발판을 확고히 구축했다.

이날로부터 26년 뒤 남부 베트남의 응웬 반 티에우(구엔 반 티우) 대통령이 사임햇다. 사임 열흘 뒤 남부 베트남이 북베트남 군에 항복, 베트남 무력 적화통일이 이루어졌다.

중국공산당은 양쯔강 도하작전 개시 반 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49년 10월1일 베이징에서 공산중국 '중화인민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중국공산당이 병력과 무기및 장비 면에서 압도적인 국민당의 국부군을 물리치고 승리한 것은 통일전선 전술의 성공 덕택이다.

친공, 용공 세력뿐만 아니라 모든 반국민당 세력을 끌어들였고 급기야 미국마저 등을 돌리게 함으로써 승패를 일찌감치 결정지었다.

북베트남도 최대 50만명이 남베트남에 주둔하기까지 했던 세계 최강 군대 미군과의 싸움을 견뎌내며 미군의 완전 철수를 이른 주요 요인은 역시 국내외적인 통일전술 성공 때문이었다.

북한 지도부와 종북세력은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앞으로 몇 년 뒤인 베트남 적화 43년+ 알파만에 아시아에서 세 번째의 통일전선 전술의 성공 사례를 보게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처럼 김칫국을 마시고 있다면 시대의 몽유병자요 각주구검(刻舟求劍)이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한 손으로는 'CVID'를 요구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참수작전'의 방아쇠를 당길 자세다.

베트남전 패배 이후 강산이 네 번 바뀌는 동안 미국은 베트남전의 실패를 거울삼아 '선택과 고도 집중'과 '참수작전'을 배합한 새로운 전략 개념을 수립했고 걸프전과 이라크 침공 및 아프간 전쟁에서 성공적으로 실천했다.

다른 한편으로 인권을 무기화하는 소프트 전략을 병행했는데 이는 소련 체제 붕괴와 동구권 변혁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트럼프 행정부는 남북 정상회담 일주일을 앞두고 '북한은 항시적인 인권 침해 국가'라고 밝혀 인 문제를 강력하게 제기할 것임을예고하고있다.

북한의 현 입장은 여전히 모호하다.

변용된 통일전선 전략을 일로매진하여 추구할 것인가. 그러면 이는 각주구검이다. 강물 속으로 뛰어 들어가 봤자 체제를 보호해줄 '칼'을 구하지 못할 것이다.

막다른 골목에서 선택 여지 없이 CVID를 받아들이면 시간은 벌 수 있다. 그러나 핵 공갈 '부메랑'이 북한 지도부를 겨냥하여 올 것이다. '부메랑'은 인권이다. 북지도부에는 다른 형태의 '핵 협박'이다. . <스위프트-버크왈드>

中 해방군 첫 홍콩 진주, 로마 건국, 구엔 반 티우 사임, 그리스 군부 쿠데타, 아이티‘파파독’ 뒤발리에 사망

1949년 4월21일 마오쩌둥(毛澤東) 중국공산당 주석과 주더(朱德) 인민해방군 총사령관이 양쯔강(揚子江) 도하를 명령했다.

마오와 주는 이날 발표한 성명서에서“장강(長江)을 건너 전 중국을 해방하라(打過長江去 解放全中國)”라고 지시했다.

1946년 7월부터 시작된 국공내전은 초기에는 국민당이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로 공산군을 수세로 몰았으나 점차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공산군은 국부군을 자신이 장악하는 지역으로 끌어들여 분산 각개격파, 공격 기세를 둔화 약화시킨 뒤 1947년 9월 총반격을 선언했다. 공산군은 이후 1948년 9월부터 1949년 1월 말까지 화북지역에서 벌어진 랴오선 전투(遼瀋戰役), 화이하이 전투(淮海戰役) 그리고 핑진전투((平津戰役) 등 3대
전투에서 모두 대승을 거두었고 국민당군의 주력은 궤멸되었다.

장제스(蔣介石)는 1949년 1월21일 패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통 직에서 물러남에 따라 리쭝런(李宗仁) 대리총통이 들어섰다. 하지만 장제스는 막후에서 여전히 실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양쯔강을 경계선으로 하여 화남지역을 보존함으로써(劃江而治), 일단 남북조(南北朝)의 상황을 유지한 뒤 권토중래한다는 복안이었다.

1949년 4월1일부터 15일까지 저우언라이(周恩來)를 대표로 한 중국공산당 대표단과 장즈중(張治中)을 대표로 한 국민당 대표단이 베이징(北京 : 당시 이름은 베이핑北平)에서 협상을 갖고 평화협정에 합의했다. 그러나 4월 20일 국민당 정부는 평화협정을 거부했다.

마오와 주의 명령에 따라 소위 인민해방군 백만웅사(百萬雄師)는 21일 서쪽의 장시(江西)성 후커우(湖口)로부터 동쪽 장쑤(江蘇)성 장인(江陰)에 이르는 1000리에 달하는 전선에서 일제히 도하작전을 벌였다.

이것이 이른바 국공내전의 마지막 대전투인‘도강전역(渡江戰役)’이다.

장제스가 공산군의 도강에 대비하여 구축한‘입체방어선’은 대규모 포격의 엄호 아래 각종 소형 선박을 이용하여 공격하는 공산군의 기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순식간에 궤멸되었다.

불과 24시간도 못되어 30만명의 인민해방군이 도강에 성공했으며 23일에는 백만대군 모두가 양쯔강 도하를 완료하였다. 그리고 바로 23일 밤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南京)을 점령하였다.

‘링(寧)’으로 약칭되는 난징은 역사상에서 금릉(金陵), 말릉(末陵), 건업(建業), 건강(建康) 등으로 불리던 곳이다.

삼국시대 오(吳), 동진(東晋), 남조(南朝)의 송(宋), 제(齊), 양(梁), 진(陳), 그리고 5대(五代) 때의 남당(南唐)이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이어 명나라 초기에는 중국 사상 처음으로 통일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도 이곳에 도읍을 세웠다.

1929년 7월6일 이후 중화민국의 수도였으나 국공내전의 공산군의 승리로 수도 지위를 다시 베이징(北京)에 넘겨 주었다.

중화민국 즉 국민정부 이전 역사적으로 난징에서 도읍을 정한 국가로 천하통일을 이룩한 국가는 명나라를 제외하고는 없다.

그러나 명나라도 주원장(朱元璋)이 죽은 후 베이징(北京)에 있던 주원장의 넷째 아들 연왕(燕王) 주체(朱棣가 주원장의 적장손으로 조카인 건문제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성공한 뒤 자신의 근거지인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처럼 난징이 통일국가 수도로서 있었던 기간은 지극히 짧았다.

난징을 수도로 한 국민정부의 패퇴로 한족의 발흥지로 고대 이래 정치 문화의 중심지인 중원(中原)이 위치한 북부 지역 밖에 있는 곳을 수도로 해서는 통일국가를 유지할 수 없다는 역사적 징크스가 형성됐다.

[今天歷史-7월6일] 南京 수도, 朱德 사망, 달라이 라마 탄생

양쯔강 도하작전 이후의 국공내전 상황은 다음과 같다

1949년 4월23일 = 인민해방군 100만명 양쯔강 도하 완료하고 국민정부 수도 난징 함락

1949년 10월1일 = 중국공산당 베이징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선포

1949년 10월25일~26일 = 국부군 진먼다오에서 인민해방군 상륙 군 7000여명을 사살하고 7340명을 생포

1949년 12월7일 = 국민정부 대만 타이페이로 천도 선언

1949년 12월27일 = 국부군 대륙 내 최후 주요군 공산군에 섬멸당함. 이로써 대륙 내 국부군이 소멸했다.

1950년 3월28일 = 중국대륙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국부군 병력이 시캉(西康)성-현재 쓰촨(四川)성 서부와 시짱(西藏)자치구(티베트) 동부를 관할했다-시창(西昌)에서 철수

1955년 1월20일 = 대만 국부군이 장악하던 저장(浙江)성 연안의 이장산다오(一江山島)가 중국 공산군의 육해공군의 합동공격으로 함락됨. 이 섬을 지키던 대만 군병 720명이 전사

양쯔강을 앞에 두고 대치한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역사를 떠올렸을 것이다. 장제스는 후한 말 삼국정립을 가져온 적벽대전(208)과 남북조 시대(221~589)를 200여 년 더 연장시킨 비수의 싸움(383) 재현을 기대했다.

마오쩌둥은 실패한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았다. 조조가 빠졌던 '연환계'를 경계했고 "말 채찍을 던져서 (강을 메워) 강을 건널 수 있다"라고 병력의 압도적 우위를 호언한 부견의 여유와 교만을 전철로 삼았다.

조조는 기동성에 족쇄를 채워 화공작전에 일패도지했고 부견은 군대를 뒤로 물려주는 여유를 부리다 대군이 어이없이 스스로 붕괴되고 말았다.

마오는 경계만 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이 같은 역사의 트라우마를 깨뜨리려는 과감한 행동을하였다.

도리어 이 과정에서 장제스를 반면교사로 삼기까지 하엿다. 북벌 막바지 단계에서 동북군벌 장쉐량의 독자적 군사력을 온전히 유지시켜 주었다가 시안사변과 같은 사태를 맞은 것을 잊지 않고 무자비하고 철저하게 장제스군을 몰아부쳤다. 결과는 기대 이상.

전투와 전쟁은 기세 싸음이다. 수치로 계량한 전망을 배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베트남전에서 미국의 패배가 그 극적인 예다.

장강 도하작전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의 '전략적 스윙'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소련 대사는 철수하는 국민정부 비행기 트랩에 가장 먼저 올라탔고 미국대사는 미국민 보호라는 명분 아래 공산군의 입성을 기다렸다.

소련은 중국 분할 유지라는 희망 사항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미국은 이해 8월5일 '중국백서(白鼠)'를 발간하여 잔뜩 뜸을 들인 뒤 다음해 1월12일 애치슨 라인을 발표하면서 공산중국을 중국 대륙의 새 주인으로 받아들일 자세임을 세계에 공표했다.

중국백서 발표 이전에 비록 결실을 보지는 못했으나 미국 대사 스튜어트와 그의 제자로 훗날 공산중국 외교부장이 되는 황화 간 접촉이 있었다.

1950년 2월 중소 우호동맹 상호원조 조약으로 소련이 또한 번 전략적 스윙을 하였고 같은 해 6월 한국전이 발발하자 미국이 즉각적이며 전면적인 개입으로 멍군식의 전략적 스윙이 뒤따랐다.

1997년 = 중국군 영국에게서 주권 환수에 대비하여 홍콩에 첫 진주했다.

1903년 = 러시아군과 만주 마적단이 압록강 하구 용암포를 강점했다.

세계사 속의 오늘

남부 베트남의 구엔 반 티우 대통령이 사임했다(1975). 이로부터 열흘 뒤 남베트남 정부는 북베트남군에 항복했다.구엔 반 티우는 알파벳 베트남어 표기를 미국식으로 읽은 것으로
정확한 발음 표기는 응웬 반 티에우(Nguyen Van Thieu). 한문으로는 阮文紹(원문소)이다. 2001년 망명지 미국에서 75세로 사망했다.

그리스 군부가 쿠데타로 집권했으며(1967), 파파 독으로 불리는 아이티 독재자 장 클로드 뒤발리에가 향년 64세로 사망했다(1971).

로물루스에 의해 로마가 건국된 날이다(BC 753).

2018/04/21 05:21


경제| IT | 사회 | 정치 | 양안 | 문화 | 대만 | 홍콩 | 한중Biz | 한반도 | 인물동정

 
Copyright 2000 ChinaWatch.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