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5/28 03:59



[今天歷史-4월22일] 손문, 장쉐량,닉슨...선택의대가는

국공합작의단초를 연 기념일을 맞아 하늘의손문은 국공합작에 대해 어떠한 평가를 할까. 득보다 실이컷다고 하지 않을까.

국공 합작으로 자신이 세운 국민당이 공산당과 소련의 힘을 빌어 중국 통일을이룩는 강력한 추동력을 얻었다는점에서보면 득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 공산당에게 대륙 전체를 넘겨주었으니 일은 것이 득 보다 더 크다.

손문은 신해 혁명 기념일인 쌍십절로 불리는 10월 10일 준화인민공화국 수도 베이징 천안문 광장과 대만 섬 의 중화민국 수도 모두에서 대형 초상화가걸리는 사실에서 보듯 양안 모두로부터 기림을받고 잇다. 그러나 하늘의손문은 결코자신의선택에 대해흡족하지는 안앗을 것이다

손문ㅢ 국공 합작 초심은 공산당은 국민당의 지도자인 자신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이엇다.

시안 사변의 주역 장쉐량은 자신의선택이 밚세기이상의 연금 생활을 격는 고초를 불러왔으나 결코 이를 후회하지 않았다.

자신이 만주를 지배하고 있던 때에 총장을 겸임하며명문 대학으로 발전시킨 동북 대학이 1993년 바뀌어져 있던 학교 명을 원래대로 환원하자 대만에 있던 그는 친필로 현판 글씨를 써서 보냈다.

그러나 연금에서 풀려나 있음에도 그는 자신의근거지로 돌아가지 않앗다. 미국하와이로 가서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장쉐량은중국을 단결시켜 일본과 싸우게 만든 자신의 선택을올았다며 죽을때까지 후회하지 않앗다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안고 대만에서도 떠난 것은 중국 공산화를 인정하지 않지만 장제스-장징궈 부자의 집요한 세뇌 교육과 살아있으되 살았다고 볼 수 없는 가혹한 처벌도 틀렷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닉슨은 매카시스트적 반공주의자에서 공산 중국과 화해의 문을 열었다.
닉슨은 중국 방문 그 해에 소련을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찾았다. 그의 생에 마지막 방문국은 중국이 아닌 소련이엇다.

자신이 중국과의 화해를 추구한 것은 공산주의이을 수긍한 것이 아니라 미국 국인을 위해 세력 균형의 국제 질서를 이이룩하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줄기차게 몸으로 확인시켜주고 자 한 것이다.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자신의 정치적 인생은 오욕으로 점철된 실패로 기록되갰지만 자시느이 선택은 올앗다는 것을 자신했던 것이다.

닉슨이 자신의 기념도서관 개소식에서 '참담한 실패는 의미 깊은 성공이 있었기 때문'이라는뉘앙스의 말을 남겼는데 그 성공이란 미중 화해를 통한 세력 귢령 체제 수립을 뜻하는 것일 것이다.<스위프트-버크왈드>

손문- 코민테른 대표 회담, 天演論 , 대만 계엄령 통치 근거법 폐지, 달라이 라마 티베트 자치위원회 위원장 임명, 주더 부인 사망, 동북공학원 張學良 명예 총장 추대, 닉슨 사망, 칸트출생, 레닌 출생

1922년 4월 22일 손문(孫文)이 광저우(廣州)에서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차 중국을 방문한 코민테른 대표 마링(Maring, 본명은 헨리쿠스
스니블리트Henricus Sneevliet로 네델란드인이다. 중국어로 馬林으로 표기)과 회담을 갖고 국공합작 문제를 논의하였다.
손문과 만날 때의 마링의 신분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전권대표 의 신분이었다.

손문은 마링에게 자신이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우호적 감정을 갖고 있음을 밝히고 소비에트 러시아와 우호적 관계를 수립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소비에트 러시아가 중국 혁명의 유일하고 실제적이며 진실한 친구로 여긴다고 밝혔다.

손문은 공산당원과 사회주의 청년단 단원의 국민당 가입을 허용하겠지만 자신의 영도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당외합작의 형식은 단연코 거부한다고 말했다.

손문의 이날의 선택으로 세계 공산당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통일전선 사례인 국공합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898년 = 청말의 변볍 운동의 주역 중우ㅢ 한 사람인 옌푸(嚴復)가 ‘천연론(天演論)’을 출판했다.
이 책은 옌푸가 토마스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1825~1895)의 ‘진화와 윤리’를 번역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 것이다.

영국에서 출판된 지 2년 만인 1895년 번역을 완성하였으나 출판은 3년 뒤에 이루어졌다.

옌푸는 이 책에서 중국이 ‘천연(天演)’의 법칙, 즉 진화의 법칙을 쫓아 변법유신(變法維新)‘을 단행한다면 강국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나라가 망하고 멸종되어 도태(淘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청일전쟁(1894-1895) 패전으로 청나라의 약체가 폭로되자 열강들이 중국을 분할하려 들려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책은 중국 사상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멋진 신세계’의 작가인 올더스 헉슬리(Aldous Leonard Huxley 1894~1963)의 조부인 T.H. 헉슬리는 의학을 전공한 생물학자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1859)’이 발표되자 그의 학설을 인정하고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었다.

특히 진화론 반대자인 B.S. 윌버포스의 주교(主敎)와의 논쟁을 통해 진화론을 대중에 보급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만년에 철학에 몰두한 가운데 내놓은 ‘진화와 윤리’ 는 20세기 전반기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사조를 일으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옌푸의 ’천연론‘ 역시
사회진화론의 중국적 변용이라고 할 수 있다.

1956년 = 중국 달라이 라마를 티베트 자치위원회 위원장에 임명.

1991년 = 대만 국민대회에서 국민당 정부가국공내전 패배로 대만에 천도 한 후 계엄령 통치의 근거가 된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動員戡亂時期臨時條款)’을 폐지했다.

1992년 = 중국 인민해방군을 창설한 주더(朱德)의 부인 캉커칭(康克淸)이 사망했다. 1911년 생으로 향년 81세였다.

장시(江西)성 완안(萬安)현의 가난한 어촌에서 태어난 캉은 어렸을 적부터 사회의식에 눈을 떠 14살 때부터 부녀활동을 시작했다.

1926년에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하였으며 1928년 9월 100여명의 적위대원들과 함께 중국 공농홍군에 참여, 정강산(井岡山)으로 들어갔다.

1929년 18세 때 43세이던 주더와 결혼하였으며 1931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34년 장정(長征)에 참가하였고 1937년 옌안(延安)의 항일군정대학(抗日軍政大學)에서 공부하였다.

1951년 신중국 아동옹호위원회 비서장, 1955년 전국여성연합회 서기 및 정치협상 상무위원, 1977년 당중앙위원, 1978년 정치협상 부주석 및 여성연합회 주석, 1980년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 1982년 당중앙위원, 1983년 정치협상 부주석 등을 지냈다.

그녀가 임종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였다고 한다.

1994년 = 미중 화해 시대를 연 리처드 닉슨 미 전대통령이 사망했다. 1913년 생으로 향년 81세였다.

닉슨은 영광과 오욕이 점철된모순의 일생을 살았다.

로스앤젤레스 인근 작은 도시에서 소규모 요리집을 경영하는 부친 밑에서 태어난 그는 고학으로 대학을 마쳤다.

닉슨은 39세 때인 1952년 미국사상 최연소 부통령으로 당선됐다.

하지만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존 F 케네디에게 패배, 미국 사상 두 번째로 젊은 대통령(첫 번째는 시어도어 루즈벨트)이라는 영광의
기록을 케네디에게 안겼다.

부통령 시절 불법 정치자금 문제로 위기에 몰렸을 때 아이들에게 점박이 강아지를 사준 것밖에는 잘못한 것이 없다라는 유명한 ‘체커즈 연설’로 대중의 감성을 자극, 위기에서 탈출했다.

이처럼 언론의 수혜자이면서도 케네디와의 대선에서 패배한 이후에는 언론에 대해 지극히 적대적이었으며 이는 그의 몰락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대선과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연거푸 패배하여 정치적 생명이 끝나는 듯 보였던 닉슨은 1968년 대선에서 승리, 불사조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닉슨은 매카시즘의 연루 의혹을 받을 정도로 강경한 반공주의자였으나 집권한 이후 당시 가장 급진주의적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과 화해를 성사시킬 정도로 전략적 안목이 탁월한 현실적
정치가였다.

1972년 2월 중국을 방문,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와 상하이 공동성명을 발표, 미중화해의 길을 열었다. 그리고 같은 해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균형감각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1972년 압도적인 표차로 재선에 성공했으나 선거운동 기간 중 발생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결국 1974년 8월 8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닉슨은 재임중 사임한 최초의 대통령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겼다.

정치무대에서 강제퇴출된 닉슨은 1976년 2월 평민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정치무대로 서서히 복귀하였다.

1977년 오래 동안 피해오던 TV기자와의 인터뷰를 받아들여 자신의 존재를 대중에 알렸던 그는 1981년 암살당한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 장례식에 미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점차 활발한 행동을 보이자 미국의 시사주간 뉴스위크는 1986년 5월 ‘그가 돌아왔다’라는 표제아래 표지인물로 다뤘다.

말년에 그는 국제문제에 관심을 쏟았으며 죽기 한 달 전에 아직 추위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벌였다.

죽기 4년 전 자신의 이름을 딴 도서관 개소식에 참석한 닉슨은 “실패는 사람을 슬프게 한다. 하지만 최대의 비극은 일생 중 승리가 없었기에 실패가 없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1993년 = 동북공학원(東北工學院)이 옛 교명인 동북대학의 명칭을 회복하고 장쉐량(張學良)을 명예 총재로 추대하였다.

1923년 개교한 동북대학은 동북지역, 즉 만주지역의 최고 대학으로 성장했으며 1928년 장쉐량이 총장을 겸임한 이후 전국 일류대학으로 발돋음하던 중 1931년 중일전쟁 발발로
중국 최초의 '망명(流亡)대학'이 되었다.

1949년 3월 동북대학은 동북공학원, 동북사범대학, 동북 농학원으로 분리되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 국내외의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교명 환원 운동이 벌어진 끝에 교명이 환원되기에
이른 것이다.
대만에 거주하던 장쉐량은 ‘동북대학’현판 글씨를 써주었다.
<세계사 속의 오늘>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1724)와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이 탄생했다(1870)


2018/04/22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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