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5/28 03:59



[今天歷史-4월23일] 중국 해군 창설...‘연못 속 이무기’서 ‘화룡점정

영국이 나폴레옹의 경고를 무시하고 잠자느 사자를 깨운 때는 1840년 이엇다.
워털루 회전 승리 이후 영국이 해군력을 앞세워 세계 패권 국가로거침 없는 항진을시작한 4반세기 후엿다.

'더러운 전쟁'의 원조 아편 전쟁을 통해 깨어난 '사자'의모습은 영낙 없이자신의 몇 발치 뒤에서 침을 흐리며무리지어 뒤쪼쫓는 하이에나떼를 쫓아내지도 못하는늙고 병든 이빠진 힘없는 사자의 모습이엇다.

치욕을 싯자며 절치부심한청나라 지도부는 ' 회춘영약'으로 해군력을 꼽앗다. 1880년대 이래 해군력 건설에 힘을쏟았다.

그러나 아편전쟁 패배 53년 뒤인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 연합 함대에 의해 청나라 북양 함대는완전 괴멸됏다

공든 탑이 무너진 것으로 이는 청라라의 멸망으로 이어졋고공화잴 바뀐 중국의 국력은 밑바닥을 치고 조금씩 조금씩 다시 상승했다. 그러나 해군에 관한 한 굴욕은 계속되었다.

공산 중국이 대륙을 장악하고 한반도에서의 지상전에서 세계 최강 미군과 대등한 전투를 벌엿으나 해군력 면에서는 철마앞의 버마재비 시신세르면하지 못햇다.

진먼다오 포격전은 실개천을 건너지못하는 공수병 환자 거인의 모습그대로엿다.

흐루시초프가 1958년 베이징에 와서 중소 연합함대 창설을 재의햇을을 때 마오쩌둥이"우리나라 연안 해안 지대를 집어 삼키겠다는거냐"라며 삿대질까지 하고 불같이 화를 내었던것은 중국의 급소를 건드렷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60년 뒤인 2018년 중국은 이제 '해양 굴기'를 호언하는 상황에 이르럿다. 그저 허장성세가 아니다.

옛 소련이 건조하다 소련 해체로 방치해둔 미완성 항공모함을 들여 와 개조하여 만든 중구 최초의 항공모함 랴오닝 호는 이제 항모전단을
꾸려 여러 차례 대양 훈련을 실시하였다.

중국 국산 최초의 항공모함을2017년에 진수시켜현재본격 가동을 하기ㅔ 앞서 각종 점검 을하고있다.

두번째 국산 항모이자 세 번째 항모도 선체 골조가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4번째 항모는 핵 추진 항모가 될것이라고 발표됏다.

미국이 남중국해에서 '자유의 항행 ' 훈련을 반복적으로 싨시하고 있는 것 등은 중국 해양 굴기에대한 대응의일환이다.

연못속의 이무기정도로 우습게 취급되던 중국해군은 이제 용의 눈을 그리는 단계에접어든 것은 부인 할 수없다.<스위프트-버크왈드>

공산군 난징 점령, 주희 사망, 포드 美 대통령 베트남전 종결 선언

1949년 4월 23일 중국 공산당의 인민해방군이 장쑤(江蘇)성 타이저우(泰州)에서 화동(華東)군구 해군의 창립을 선포하였다. 이로써 인민해방군에 해군이 창설되었다. 그 이전까지 해방군에는 사실상 육군만 있었을 뿐 독립적인 해군과 공군이 존재하지 않았다.
해군 사령원(사령관)겸 정치위원은 화동군구 부사령원 장아이핑(張愛萍)이 맡았으며 사령부는 난징(南京)에 두었다.

제3 야전사에 소속되어 있던 644명을 기초로 해군 사령부, 정치부, 후근부 등 3개 판공청을 구성하여 출발하였다.

인민해방군이 몇 개월 사이 확보한 함정 수는 다음과 같다.

투항 국민당 해군의 선박과 노획한 선박 183척(4만여 톤) ;
전국에서 징발한 중소선박 169척(6만여 톤);
침몰한 선박 개조 6척(1,705톤);
홍콩 등지에서 구매한 구 선박 48척(2.5만 톤)

이들 선박들은 대부분 노후하여 제대로 해상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이날은 또 양쯔강을 도하한 인민해방군이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南京)을 점령한 날이다.

21일 양쯔강을 도하한 인민해방군은 27일 우한(武漢)과 상하이(上海)를 점령함으로써 도강전역(渡江戰役)은 채 1주일만에 공산군의 완승으로 끝을 맺었다. 국민당군은 이 전투로
15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도강전역의 승리로 마오쩌둥(毛澤東)은 조조(曹操)와 부견(?堅)의 전철을 더 이상 우려하지 않아도 되게 됐다.

후한 말 화북 일대를 장악한 위(魏)나라의 조조가 208년 적벽대전에서 패배함으로써 유비(劉備)의 참모 제갈공명이 구상한 천하삼분(天下三分)이 이루어졌다

또 고구려에 불교를 전래한 것으로 인해 우리에게도 낯익은 전진(前秦)의 부견은 북부지역을 통일한 뒤인 383년 천하통일을 위해 남방 원정에 나섰다가 비수(?水)의 싸움에서 병력 면에서 약세였던 동진(東晉)군대에 대패함으로써 자신도 죽고 중국은 남북조 시대의 분열시대를 상당기간
지속해야 했다.

23일 오후 난징 함락 소식을 들은 마오쩌둥(毛澤東)은 다음과 같은 시를 도강전역을 수행한 류덩(劉鄧)군, 즉 제2 야전사에 보냈다.
띄어난 시인이기도 한 조조는 적벽 대전에 앞서 승리와 천하 통일을 미리 자축하는 시를 썻고 부견은 비수 ?싸움이 벌어지기 전에 "전군이 말채찍을 던져 강을 메우자"라는 호언장담의 글귀를 남겻다. 둘다 성급했다.

역시 시인이기도 한 마오는 이러한 전례 때문인지 승리가 확정된 이후에 비로서 시를 썻 다.

鍾山風雨起蒼黃,
  百萬雄師過大江.

  虎踞龍盤今勝昔,
  天?地覆慨而慷.

  宜將剩勇追窮寇,
  不可沽名學覇王.
  
天若有情天亦老,  
 
人間正道是滄桑.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난징의 종산에 비 바람 몰아쳐 모두들 당황하고 떨고 있는가운데
(인민해방군) 백만웅사 대군이 장강을넘었노라

웅크리고 있던 범과 숨어 있던 용이 오늘 밤 승리를 거두어
하늘이 엎어지고 땅이 뒤집혀지니 강개한 마음 이루 말 할 수 업구나

남은 힘을 쏟아 부어 궁지에몰린 적을 쫓아야 마땅할 터이니
헛되게 이름을 구하지 말고 패왕을반면 교사로 삼아야 하리

하늘도 더이상 무심하지 않고 또 노숙해졌을을 터이니
인간 세계의바른 도리가 뽕밭이 푸른 바다로 변하는 것이리라."
1200년 = 남송의 대학자 주희(朱熹) 사망.

<세계사 속의 오늘>
남부베트남의 내각이 총사퇴하고 제럴드 포드 미 대통령이 베트남 전쟁의 종결을 선언했다(1975).

이로부터 일주일 뒤인 4월 30일 남부 베트남의 수도 사이공(현 호치민시)이 함락되고 5월 1일 북부 베트남군이 남부 베트남 전역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1954년 제네바 협정으로 분단되었던 남북
베트남이 21년만에 통일되었다.

미국은 1961년 군사고문단을 파견하는 것을 시작으로 베트남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였으나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1973년 1월 27일 파리평화협정을 통해 휴전을 성립시켰다.

미군 철군 뒤 1975년 3월에 시작된 북베트남군의 춘계 대공세에 남부 베트남군은 버텨내지 못했던 것이다.

남부 베트남은 당시 세계 4위의 공군력과 미국이 남기 고 간 각종 무기와 장비 등으로 하드웨어 면에서는 북 베트남 군에 앞섰지만 만연한 병역 기피와 티우 대통령과 키 전 수상 등 군부 실력자들간의 알력 등으로 소프트웨어 면에서 북 베트남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여기에 정계에 침투한 공산 첩자가 대통령 선거에서 2위를 차지할 정도로 극심한 정치적 분열 그리고 워터게이트 사건 등으로믹슨이 사임하는 등 미국의 정치리더십의 타격을 받은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남부 베트남은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티우 대통령은 붇부 전선에서 정예병이 무너지자 한국전 초기 당시와 같은 미국의 즉각적이고 강력한 개입을 기대하며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민관군이 서로 엉킨 채 철수를 거듭했다. 그러나 미국은 더 이상 수렁에 빠져들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러한 배경에는 닉슨의 중국 방문 이후 미중 간의 관계 정상화 무드가 진전되고 있는 상황이 도사리고 있었다.

티우는 4반세기 만에 코페르미쿠스적 전환 양상으로 변화하고 있는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도리어 자구 노력마저 포기하는 자세를 취하는 최악수를 둠으로써 미국이 양심의 가책 도 미련도 없이 베트남을 포기할 수 있는 정신적 면죄부를 주는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

미국의 지원을 이끌어내지 못한 티우는 자신의 핵심지지 기반인 해병대가 그의 선산을 불도저로 밀어버리능 등 노골적으로 등을 돌리자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두옹 반 민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1963년 10월 고 딘 디엠 정권을 무너뜨린 쿠데타의 주역이었으나 티우와 키 등 소장파 장성들에 밀려 권좌에서 축출됏다.

재야에서 비둘기파적 정치 노선을 취해왓던 그는대망하던 대통령이 되자진격하는 북 베트남에 대해 평화 협상을 제의햇으나 북 베트남이 들어줄리 만무했다.

4월 30일 무장한 북 베트남 병사들에 의해 사이공 대통령궁에서 끌려 나오며 고개를 푹 숙인 민 대통령의 모습은 남부 베트남의 전혀 비장감을 느낄 수 없는 초라한 종말을 상징했다.

민의 이 같은 모습은 보름 전 캄보디아의 마지막 총리 롱 보레가 크메르 루즈 군에 체포될 때까지 꼿꼿한 자세를 취했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꼿꼿한' 롱 보레는 처형됏고 '비굴한' 민은 공산 베트남에서 재교육을 받은 뒤 풀려나 여생을 보냈다.

덩치가 커서 '빅 민'으로 불렸던 두옹 반민은 외세의 추종자로서 무능햇고 정치인읗로서는 철이 없었다. 댗통령이 된 뒤에는 주제 파악을 하지 못햇고 공산 치하의 국민으로서는 아주 조용했다. 남 베트남이 왜 멸망했는가는 이들 정치인들의 행보를 보면 알 수 있다. 군인과 정치인으로서 남 베트남의 구세주인것처럼 행동했던 티우와 키는 모두 십자가에 매달리기를 거부하고 미국으로 망명, 민과 마찬가지로 아주 조용한여생을 보냈다.

2018/04/23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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