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5/28 03:59



[今天歷史-4월24일] 사스 대책본부 ...어부지리, 새옹지마

페스트가 중새ㅔ 유럽의 역사 흐름을 바꾸엇듯이 사스 란질병이 중국 정치의 흐름을요동치게 하였고 중요 정치가 여럿의 막판 행로를 극적으로 바꿔쳣다.

2003년 4월 중국판 글라스노스트 사건이기도 한 사스 사태 이 전 멍쉐눙(孟學農)과 왕치산의정치적 운명은 대조적이엇다.

그해 1월 베이징 시장에 선출된 전자가 '떠ㅗ르는 태양'이었다면 후자는 낙조였다. . 하이난성 서기에 선출된 왕치산 역시 승진이엇으나 중앙에서 천리 길이 넘는 곳이 임지니 사실상 정치적 유배엿다.

그러나 사스 사태로 먼쉐눙은잘못도 없이해임됏고 그 빈 자리를 왕치산이 맡게됐다

왕치산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던 주룽지가 그를 인민은행장으로 밀었는데 장쩌민과 후진타오가 중앙 요직을 나눠먹기 하는 바람에 하이난 성으로까지 밀린 것이었다 그러나 사스 사테 후 수습과정에서 바로 이같이 장과후ㅢ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왕은 '황금 사다리'에 올라타게 되었다.

산마루에서의 실족은 아무리 그것이 심각해도 만회할 수 있다.그러나 정상 부근에서서 한 번 삐끗하면 만회란 기적에 가깝다. 멍쉐눙은 끝내 회복하지못한 반면 왕치산은 그 기적 같은 기회를 하늘이 내려준 동아줄로 만들엇다.

왕치산은 현재 국가 부주석이다. 서열은 정치국 상무위원 다음의 8번째이지만 그의 위상은 '예비 섭정'에 가깝다.
멍쉐눙은 산시성 성장으로 제임 중 이던 2008년대형 인명 피해를 낸대규모 산사태 사고로 또 다시 인책 사임헤야했다. 이역시 멍의 과오는 아니었다. '천재'이지 '인재'는 아니라는 말이다. 억세게 운이 없는 인물이다.

2010년에도 공청단 파의 수장으로 멍의 정치적 보스인 후진타오 총서기가 멍ㅡ의능력을 아껴 중앙 직속 기관 위원회 부서기란 중앙애 자리를 마련, 재기의 길을 터주었으나 결국 권토중래하지 못햇다.

왕치산은 '어부지리'요 '새옹지마'다. 멍쉐눙은 '엎어져도 코가께진다'의불울를 두 번 연거푸 겪고 결국 소리 소문 없이 정상부근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다가 되었다. <스위프트-버크왈드>

中 최초 인공위성, 노구교, 중, 러 등과 감군협정 체결

2003년 4월 24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사스(SARS :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대책 지휘본부가 성립되었다.

홍콩과 광둥(廣東)성, 그리고 베이징(北京)을 휩쓸고 있던 괴질에 대한 그동안의 ‘은폐’를 ‘공개’로 전환시킨 뒤에 이은 후속조치였다.

당시는 사스라는 명칭이 확정되기 이전으로 중국은 이 괴질을 ‘비전형폐염(非典型肺炎)’이라고 불렀다.

대책본부의 공식 명칭은 ‘전국방치비전형폐염지휘부(全國防治非典型肺炎指揮部)’로 최고 책임자인 총지휘는 정치국 위원 겸 부총리인 우이(吳儀)였다.

그녀는 위생부장의 직책도 겸임하게 된다. 부총지휘는 국무위원 겸 국무원 비서장 화젠민(華建民)이었다

대책본부는 당 중앙, 국무원. 군대 및 베이징 시 산하 30개 부문과 단위의 인원으로 조직되었다. 산하에 10개 공작조와 판공실을 설치하였다.

그 조직은 다음과 같았다.


방치조 조장(防治組 組長) 가오창(高强) 위생부 상무 부부장

위생검역조 조장 리창장(李長江) 질검총국(質檢總局) 국장

과기공관(攻關:연구)조 조장 쉬관화(徐冠華) 과기부 부장

후근보장(後勤保障)조 조장 마카이(馬凱) 발전개혁위 주임

농촌조 조장 류젠(劉堅) 농업부 부부장

선전조 조장 지빙쉬안(吉炳軒) 중앙선전부 상무 부부장

사회치안조 조장 톈치위(田期玉) 공안부 상무부부장

외사조 조장 다이빙궈(戴秉國) 외교부 부부장

교육조 조장 저우지(周濟) 교육부 부장

베이징조 조장 왕치산(王岐山) 베이징 대리시장

판공실 주임 쉬야오스(徐紹史) 국무원 부비서장.


2002년 말 중국 공산 16차 전당대회( 16대 )에서 장쩌민 군사위 주석- 후진타ㅗ 총서기 의 과도적 체제로 출범한 중국 최고 지도부는 권력 배분에 골몰하느라 사스 사태를 쉬쉬하다가 결국 이를공개하고 거당·거국적 사태 해결에 나섰다.

이에 앞서 후진타오의 심복 베이징 서기와 위장쩌민 의 사람인 국무원 위생 부장을 함께 해임하는 방식으로 장쩌민세력과 후진타오세력 간에 정치적 공동 책임을진다는 자세를 보엿다.

대신 장쩌민과 후진타오 모두에게 거리를두고 잇던 전임 총리 주룽지가 자신의 후임 총리로 밀었던 우이 부총리에게 샃태 해결의 총 책임을 맡긴 것이다.

정책의 최고 · 최종 결정을담당하는 정치국 상무위로 진출하는 코스 중 하나인 관계로 정치적 위상이 큰 베이징 서기로는 역시 주룽지의 심복인 왕치산이 임명됏다.
주룽지는 자신 이 부총리 시절 인민은행장을 겸임할 때 부행장으로 있었던 왕치산을 인민은행장으로 임명하고 싶어했으나 장쩌민의 사람인 저우샤오촨에 밀려 하이난 성 서기로 좌천성 승진을 하였다.

사스 사태로 하이난 성 서기ㅔ 부임한 지 얼마안 되어 전혀 예상치 못한 가운데 갑작스럽게 중앙에 불려 올려진 왕치산은 사스사태의 최대 수해자다.

왕치산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도약의발판으로삼았다..

그는 시진핑 집권 1기 중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기율검사위 서기로서 시진핑의'칼' 노릇을 하였고19대에서 '7상8하 원칙에 따라 상무위원에 연임되지못하엿으나 2018년 3월 전인대에서 국가 부주석에 선출되어 대미 외교와 통상 관계 등을맡고 있다.

1997년 = 중국, 러시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크스탄 등 5개국이 러시아의 크렘린에서 국경지구 상호감군 협정(邊境地區相互裁減軍事力量協定)을 체결했다. 이 협정 등에 기반하여 상하이 협력기구(SCO)가 성립되게 된다.

[용어설명] 상하이협력기구(SCO) 2006/06/15 12:18

1970년 = 중국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 인공위성의 이름은 동방홍(東方紅)1호였고 이를 우주궤도에 쏘아 올린 로켓의 명칭은 ‘장정(長征) 1호’였다.

1955년 =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아시아-아프리카 회의가 개최됐다. 반둥회의로 약칭 되는 이 회의는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대통령, 중국 저우언라이(主恩래) 총리 그리고 인도의 자와 할랄 네루 총리가 주도했다.

1192년 = 노구교(蘆溝橋)가 베이징성 서남 영정하(永定河) 하상에 세워졌다. 1189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3년만에 완성되었으며 길이가 266.5m, 폭은 7.5m이다.

다리 양편에 각각 140개의 기둥이 세워졌으며 이 기둥에 모두 485개의 돌사자상이 새겨져 있다.

처음 이름은 ‘광리(廣利)’였으나 영정하의 별칭인 노구하(蘆溝河)를 가로지른다 하여 노구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청나라 초기인 1689년에 중건 되었으며 청 건륭제(乾隆帝)가 다리 근처에 ‘노구효월(蘆溝曉月)’ 이라는 글을 새기고 정자를 세웠다.

‘연경8경(燕京八景)’중의 하나로 불린 이 곳은 1937년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노구교 사건 (중국에서는 7 · 7사변으로 부른다)’ 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됐다. 서양인들은 이 다리를 ‘마르코폴로 브릿지’로 부른다.



▲ 노구교의 상판 모습



▲ 노구교의 석사자상



▲ 노구교의 여러모습



▲ 노구교의 전경그림

2018/04/24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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