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8/19 08:01



[今天歷史-4월27일] 해협회-해기회 첫 회담... 쳇바퀴 첫 라운드의 시작

' 마침내 핵 전쟁이벌어져 인류가 멸망햇다. 그 직후 밀림 속의 '남편 원숭이'가 옆 자리의 '아내 원숭이'에게 귀찮다는표정으로 이같이 말햇다. " 이제 맨 처음부터 다시 시작 해야겠네"'.
<세계 유모 모음집>에서 읽은 이야기다.

1993년 4월 27일 양안이 1949년 국공 내전 종식 후 첫 공식-공개 회담을 가졌다.

양안이 각각 양안 접촉 창구로 설립한 반관 단체인 해협회와 해기회의 수장이 만나 출발을 시작한 양안 회담은이후 발전을 거듭했다.

렌잔 국민당 주석과 후진타오 공산당 총서기 간의 국공 영수 회담을 거쳐 2015년 11월 7일 시진핑 중인민 공화국 줏국가 주석과 마잉주 중화민국 총통 간의 회담으로 이어졋다.

'첫 티업' 장소가 싱가포르였고 한 라운드의 '마지막 홀'장소 역시 싱가포르엿다.

그러나 이 양안 회담은 한라운드를 끝맺은뒤 도약하지못하고 있다.
양안 첫 정상 회담 이 있은지 불과 2 개월 뒤인 2016년 1월 대만에서 동시에 치러진 대선과 총선에서 대만 독립을 강령으로 한 민진당이 양선거 모두에서 압승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2015년 회담은 도약의모멘텀을 구축하지 못하였기에 양안은 쳇바퀴 돌기 2 라운드의 직전 상황에 놓인 것이다.
남북한 판문점 정상 회담이 이루어진 날 출발과 시작 등등의 말이 차고 넘쳤다. 이것이 도약단계의 첫 출발인지 아니면 쳇바퀴 돌기의 원위치인지 지켜 볼 일이다. <스위프트-버크왈드>

천시퉁 베이징 서기 겸 정치국 위원 베이징 시 서기 직 해임

1993년 = 중국의 해협양안관계협회(해협회) 회장 왕다오한(汪道涵)과 대만의 해협교류기금회(해기회) 이사장 구전푸(辜振甫) 간의 회담이 싱가포르에서 개최됐다.

해협회와 해기회는 각각 양안의 반관영 접촉기구로 왕구 회담은 중국 공산화 이후 첫 공식적이며 공개적인 양안접촉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今天歷史-11월7일]양안정상 66년만 대좌, 新華 李鴻章

1995년 4월 27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베이징(北京)시 서기 천시퉁(陳希同)의 사임을 수리했다.

중국에서 비통상적인 고위층 인사는 바로 정치적 지각변동을 의미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가까이는 2012년 3월 보시라이(薄熙來) 충칭(重慶)시 서기의 해임이고 2006년 9월 천량위(陳良宇) 상하이 서기의 해임과 2007년 3월 시진핑(習近平)의 상하이 서기 전격 발탁도이러한 성격의 사례다. 천시퉁에 대한 이 인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1989년 천안문 사태 당시 베이징 시장으로 한 때 총서기 후보로 거론되기까지 했던 천시퉁의 사임이 갖는 의미는 복합적이었다.

천시퉁은 경제범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고 조사를 받던 중 자살한 왕바오썬(王寶森) 전 베이징 부시장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했다. 따라서 이는 주룽지(朱鎔基) 당시 총리가 “내 몫을 포함한 100개의 관을 준비하라”는 비장한 자세로 추진한 반(反)부패 캠페인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또다른 배경으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대립, 상하이(上海)출신 장쩌민(江澤民) 총서기 세력과 천시퉁을 중심으로 한 베이징 세력 간의 권력투쟁이 지적되고 있다.

덩샤오핑(鄧小平)과 마찬가지로 쓰촨(四川)성 출신인 천시퉁은 중국 공산화 이후 46년간 베이징을 한 번도 떠나지 않은 베이징 ‘토박이 정치가’로 그의 추종세력은 베이징 정관계에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어 ‘베이징방(北京幇)’ 이라고 불렸다.

1995년 9월 개최된 중국공산당14기 5중전회는 천시퉁의 정치국 위원 및 중앙위원직을 공식적으로 박탈하고 전인대에 전인대 대표 직책에서 파면할 것을 건의, 시행되게 했다.

1997년 8월 29일 중앙기율검사위는 천시퉁의 당적을 박탈했다.

1998년 7월 31일 베이징시 고급인민법원은 천시퉁에게 부패와 권력남용죄를 적용, 16년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천시퉁은 형기의 절반을 복역한 2006년 7월 전격 가석방되었고 이는 그의 실각 이후 명실상부한 집권 세력으로 부상했던 장쩌민(江澤民) 중심의 ‘상하이방’의 몰락의 전조였다.

천의 석방 2개월 뒤인 2006년 9월 25일 상하이 서기 천량위는 비리 연루 혐의로 전격 해임됐고 그 자리는 상하이방과 대립각을 세운 총서기 겸 국가 주석 후진타오지지 기반인 단파(團派)의 인물이 아닌 태자당의 시진핑이 차지했다.

화궈펑(華國鋒), 장쩌민를 최고지도자로 밀어 올렸던 중국 정계의 어부지리의 법칙이 또 한 번 작동한 셈이다.

시진핑의 상하이 서기 취임 후 중국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는 '단파의 황태자'로 총서기 0순위로 지목되어왔던 리커창(李克强) 당시 랴오닝(遼寧)성 서기에서 시진핑에게로 급속히 옮겨 졌다.결국 시진핑은 총서기가 되고 리커창은 총리가 되었다. 보시라이의 해임과 몰락은 그의 지나친대권 야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시진핑-리커창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가지치기의 성격도 포함됏다.

태자당 시진핑 5세대 선두로

상하이방 이제 의자를 비워주시죠

조선일보 전 베이징 특파원 박승준(朴勝俊) 현 인천대 교수(중국 상하이 푸단대 교환교수)가 번역 소개했던 천팡(陳放)의 ‘천노(天怒)’는 ‘반부패’ 의 관점에서 천시퉁 사건의 이면을 다룬 것이다.

[차이나칼럼] 한 중국 지식인의 죽음(조선, 박승준) 2005.12.16 20:21 56'

반부패 투쟁과 중앙의 지방 길들이기 2000/09/22 00:17



2018/04/27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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