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8/22 09:03



[今天歷史-4월29일]평화5원칙 실리는 명분을 앞선다

공산중국은 1949년 건국 이후 4차례 전쟁을 벌였다.

1950년 한국전에 개입, 미국과 전쟁을 벌였고 1962년에는 인도를 침공했다. 1969년에는 소련과 국경 지역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1978년에는 베트남을 공격했다.

첫 번째 국가인 미국을 제외하고는 모두 군사적 대립 국가로 분류할 수 있는 적국이 아니었다.

소련과 베트남은 같은 공산주의 국가였고 인도는 비동맹그룹 창설 국가였다.

1세대 때 발표, 5세대인 지금까지 여전히 중국 외교 원칙으로 견지되는 평화 5원칙은 저우언라이 원칙으로도 부르는데 자와할랄 네루 인도 총리와 교감 하에 탄생했다.

이런 인도에 대해 등에 비수를 찌르듯 군사 공격을 가한 것은 영토 문제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4번의 전쟁 모두 영토와 관련된 것이었다.

한국전 개입은 일본 괴뢰국에서 중국의 영토로 되찾은지 불과 5년밖에 되지 않은 만주의 불안한 위상이 촉발시켰다.

소련과 군사충돌, 베트남과 전쟁 또한 정리되지 않은 국경선 문제가 이유였다.

인도와 전쟁 역시 중국 입장에서는 티베트의 불안한 위상 때문이었다.

티베트는 1911년 신해혁명 이후 1950년까지 사실상 반독립국 지위를 누렸던 곳이다.

1959년 티베트 무장봉기 후 티베트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하여 망명정부를 세우자 중국 지도부는 한국전 개입 전야의 위기감을 느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진군하는 더글러스 맥아더의 미군을 지켜보며 그가 만주를 탐내려는 것으로 간주했듯이 이러한 일련의 사태 진전을 티베트를 중국 판도에서 분리하려는 움직임으로 여겼던 것이다.

마오쩌둥의 한국전 개입이 오버액션의 선제 조치였던 것처럼 중국의 인도 침공은 자신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과잉 방어적 선제적 경고 조치였던 것이다.

1962년 '뱃속의 실리'는 '혓바닥의 명분'을 제압했다 <盲瞰圖子>

정성공 대만 상륙,윤봉길 의거

봉직 전투와 만주 자치 선언

1954년 4월29일 중국과 인도가 서명한‘중국의 티베트(시장西藏지구와 인도 간 통상 및 교통에 관한 中印협정’의 첫 머리에 평화5원칙이 삽입됐다.

중국 대외정책의 기본 지침이 된 원칙은 상호 영토주권 존중, 상호 불가침, 상호 내정 불간섭, 평등호혜, 평화공존이다. '저우언라이(周恩來) 5원칙'이라고도 불린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앞서 1953년 12월31일 티베트 문제 회담을 갖기 위해 베이징(北京)에 온 인도 대표단을 접견한 자리에서 이 원칙을 밝혔고 인도 대표단도 이에 적극 찬동했다.

1661년= 정성공 (鄭成功)이 대군을 이끌고 대만의 녹이문(鹿耳門)에 상륙, 네덜란드 세력을 축출했다. 대만에서는 이날을 ‘정성공 대만수복기념일’로 기리고 있다.

1922년 = 청나라 말기 이홍장이 실권자로 있을 때 성장한 북양군벌이 위안스카이 사후 분파 간 잇달아 벌어진 내분 중 하나인 제1차 봉직(奉直) 전투가 발발. 이 전쟁에서 펑톈(奉天)계의 장쭤린(張作霖)군이 대패했으며 장쭤린은 6월‘동북보안사령관(東北保安司令官)’이라고 자칭한 뒤 동북지방(즉 만주)의 자치를 선언하였다.

이후 베이징(北京) 정부는 완전히 베이징과 그 부근 일대를 근거지로 한 직예(直隸)계의 통제 아래 들어갔다.

이를 계기로 1912년 청나라 멸망 후 사분오열되었던 중국 천하는 일단 큰 덩어리로는 3분되었다.

손문이 지도하는 국민혁명 세력과 북양군벌 직예파의 베이징 정권 그리고 장쭤린의 만주 등이다.

물론 소군벌이 중국 각지에서 난립하고 있으나 크게 보아 이들 3 세력이 군벌 시대의 주요 세력이었다.

남방 지역에 근거지를 둔 국민정부 장제스의 북벌에 의해 1928년 통일이 이루어졌으나 군벌 연합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중일전쟁 등으로 인해 이에서 탈각하지 못했고 때문에 새롭게 성장한 공산 세력에 의해 1949년 중국 천하의 패권이 넘어가게 됐다.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

윤봉길(尹奉吉)의사가 상하이(上海) 홍구(虹口) 공원에서 개최된 일본 왕(천황) 생일 경축 기념 식장에 폭탄을 투척, 일본군 상하이 주둔 총사령관 시라카와(白川) 대장 등 일본군 장성 7명을 사상케 하였다(1932).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장제스의 국민정부가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이는 장제스가 참석한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는 내용이 포함되는데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장제스는 윤 의사의 의거 뒤 중국군 100만 대군이 하지 못했던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이룩했다고 치하했다. 국민정부는 임시정부를 승인한 유일한 국가였다.

2018/04/29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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