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5/28 03:59



[今天歷史-4월30일] 베트남전, 히틀러... 기적과 착각

1945년 4월 히틀러는 훗날 사무엘 베케트가 쓴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기다린 '고도가 찾아오기를 바라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고대했을 것이다.

히틀러로서는 '고도(Godot)'가 올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을 법하다.

그는 8개월 전인 1944년 7월20일 암살 공격을받았으나 구사일생했다. 히틀러 암살과 나치 체제 전복을 목표로 한 작전명 '발퀴레'의 주모자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폭탄이 설치된 서류가방을 히틀러가 앉은 회의 테이블 밑에 내려놓는데 성공했다.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자리를 빠져 나간 뒤 서류가방은 폭발했으나 히틀러는 가벼운 부상만 입고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폭발전에 회의실의 다른 참모가 무심코 서류가방을 옮겨 놓았는데 마침 그 자리가 테이블의 굵고 단단한 다리 앞이어서 방호벽 역할을 해 히틀러는 치명상을 입지 않았다.

히틀러는 신이 자신을 보호하고 있다는 확신에 빠졌다.

1945년 4월12일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뇌일혈로 급사했다. 베를린을 에워싼 소련군의 공세가 가열차게 진행되던 때였다.

히틀러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러시아군에 포위되어 항복하느냐 싸우다 죽느냐의 절박한 순간에 러시아 예카테리나 여제가 갑작스럽게 죽어 러시아군이 포위를 풀고 회군한 사실을 상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군이 히틀러 벙커까지 접근할 때까지도 '고도'는 오지 않았다. 히틀러는 권총으로 자신의 심장을 쏘아야 했다.

1975년 4월 월남(남베트남)의 지도자들은 각각 자기나름의 다른 착각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착각 도미노패는 하나씩 하나씩 쓰러졌다.

구엔 반 티우 월남 대통령은 17도선 휴전선에 배치된 월남 정예군이 무너지자 모든 군관민에게 남부 사이공 일대 지역으로 철수를 명령했다.

월남군이 월맹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월남 국민이 공산 지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과잉 연출함으로써 한국전 때 처럼 미국이 즉각 개입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각주구검'의 착각이었다.

티우의 '패배 과잉 코스플레'에 그의 핵심 지지 세력인 월남 해병대는 티우의 선산을 불도저로 밀어 버리며 분노를 드러냈다. 티우는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3년 고 딘 디엠 정권을 무너뜨린 군부 쿠데타의 지도자였으나 티우와 공군을 대표하는 구엔 카오 키 등 소장파 세력에 밀려나 자의반 타의반으로 재야지도자가 된 두옹 방 민은 그토록 갈망하던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으나 밀려오는 월맹군은 평화협상을 제의한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민은 패전 국가의 수반이 아닌 포로 취급을 받으며 대통령궁에서 끌려 나와야 했다. 얼굴도 못들고 끌려 나오는 그는 착각에서 그제서야 깨어났다.

역시 티우와 벌인 권력투쟁에서 패배, 총리에서 밀려난 키는 월맹군이 밀려 올 때 지지 시위 군중을 모아 놓고 자신만이 위기 속의 월남을 구원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월남의 처칠' 코스플레였으나 미국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착각에서 벗어나 주제를 파악한 키는 미국대사관 철수 헬기에 탑승하여 탈출하였다. 키는 미국에서 주류상을 운영하며 제 주제 걸맞은 만년을 보냈고 공산화된 베트남을 방문하기도 했다.

착각한 이들은 이들뿐만 아니었다. 반체제 학생 지도자들은 월맹과 협상하겠다며 대통령궁에서 월맹군의 입성을 기다리다 모두 체포되어 재교육 센터로 끌려갔다.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며 티우 정권의 몰락에 한몫을 했던 이른바 민주 인사들은 재교육 수용소에서 "미군은 언제 오지'라며 착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스위프트-버크왈드>

파리평화회의 21개조 요구 승인, 베트남전 종식으로 베트남 공산화 무력통일, 히틀러 자살, 조지 워싱턴 미국 초대 대통령 취임

1919년 4월30일 1차대전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파리평화회의는 독일이 산둥(山東)성에 갖고 있던 이권을 일본이 차지하도록 결정하였다.

이는 일본이 중국에 요구해온 21개조 요구를 수용한 것으로 중국 민중에 의한 반식민 애국운동인 5 4 운동이 전개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1904년 = 런비스(任弼時) 출생.

1962년 = 중국 공산당 중앙위 문예 8조 비준

세계사 속의 오늘

남부 베트남의 두옹 반 민 대통령이 사이공(현 호찌민) 대통령 궁에서 북부 베트남군에 포로가 됨으로써 베트남전이 종결되고 베트남이 통일되었다.(1975).

이는 다른 한편으로 미국이 베트남 개입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도미노 이론'의 부분적 실현이었다.

그러나 이를 미국의 참담한 실패로만 규정할 수 없는 것은 동남아의 공산화가 베트남, 캄보디아 그리고 라오스 등 3개국에 그쳤기 때문이다.

만약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없었다면 동남아에서 공산화의 대폭적 확산이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당시 미국 지도부는 미중화해로 최대 전략적 주적인 소련에 대한 견제가 이루어졌고 베트남 공산 세력이 미국과 벌인 10년전쟁으로 군사력이 소진되었기 때문에 호찌민이 구상하였던 베트남을 맹주로 한 '인도차이나 반도의 연방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판단 아래 고비용 저효율의 전략적 자산 남부 베트남을 버렸다고 해석할 수 있다.

미국은 남부 베트남을 버림으로써 '전략적 혈우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미군 철수 후 중국은 북베트남 국경지역에 배치되었던 24개 사단을 중소국경 지역으로 이동시켜 소련의 침공에 대한 우려를 덜었다.

소련은 유럽 지역에서 미국과 대립하고 등 뒤에서는 중국의 견제를 받아 전략적으로 안팎 곱사등이 신세가 되었다.

미국은 남베트남 멸망과 중국과 화해로 1981년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군비 경쟁을 소련 견제에 집중시킬수 있었다.

소련은 소련판 베트남전인 아프카니스탄 전쟁의 수렁에 빠져든 데다 미국과 펼친 해군력 경쟁, 레이건이 촉발한 '스타워즈 전쟁'에 대응하느라 경제적으로 완전 파산상태에 빠졌다. 결국 1991년 소련 체제의 붕괴를 가져왔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완전 철수한 지 18년 만에 그리고 남베트남이 지구상에서 사라진지 16년 만에 소련의 붕괴를 보게된 것이다.

미국은 전략적 불량자산을 과감히 버리고 전략적 환경을 최적화 한 뒤 선택과 집중으로 전략자산을 주적에 집중시켜 이런 결과를가져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今天歷史-4월23일]인민해방군 해군 창설, 공산군 난징 점령, 포드 미 대통령 베트남전 종결 선언 나치 독일의 총통 히틀러가 부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총통부 지하벙커에서 자살했다(1945). 히틀러는 권총으로 브라운은 독약을 마시고 생을 마감했다.

히틀러 생일은 4월20일로 1889년생인 그는 열흘 전 56세 생일을 맞았다. 생일 바로 8일 전인 4월12일 최대 적국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뇌일혈로 사망하는 그에게는 '기적'이자 '축복'이 내려졌으나 기적은 없었고 그는 제발로 루스벨트의 뒤를 따라 가야했다.

히틀러는 자살 이틀 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도주하다 빨치산에게 체포되어 처형된 뒤 그의 시신이 애인 페타치와 함께 밀라노 광장에서 거꾸로 매달려 전시됐다는 사실을 보고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살 뒤 부부의 시신을 소각하라고 친위대 병사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하였다. 그러나 완전하게 소각되지 못한 그의 시신은 베를린을 먼저 점령한 소련군에 의해 수습되어 비밀리에 소련으로 후송돼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히틀러의 자살로 유럽 지역에서 2차대전은 종결되었으나 2차대전의 최종 종결은 3개월15일 뒤인 8월15일 일본의 항복선언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조지 워싱턴이 미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1789). 같은 해 7월14일 미국 독립에 군사적 지원을 한 프랑스에서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프랑스대혁명이 시작됐다.


2018/04/30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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