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8/22 09:03



[今天歷史-5월1일] 동원감란 종식선언...‘대만 모세’의 ‘출 중국’ 첫 조치

'대만의 모세'는 결코 살아 생전에 '가나안'에 도밟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모세를 만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오올해 95세의 '대만의 모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거리에 나와 '가나안으로 가자'고 외치고 있다.

'대만의모세'는 전 대만 총통 리덩후이다 그는 국민당 소속으로 총통 이 되었으으나 총통 퇴임 뒤 탈당하여 가장 강경한 독립 노선의 정당인 '대만단결연맹'을 창당한 것을 계기로 줄곧 독립 노선 추진을 뒷받침헤오고 있다..

그는 내성인 , 즉 대만성에서 태어난 대만 출신 첫 대만 총통이고 또 대만의 첫 직선 총통이다 기독교 신자인 그는 대만을 독립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한 길 속의 묻어두고 잇다가 2000년 총통에서 물러난 뒤부터 이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며 '대만의 모세'임을 자임해 오고 있다

대만섬 주민은 대만섬에서 태어난 내성인 과 대륙에서 태언났거나 그 자손들인 외성인들로 분류된다.

외성인들이 인구의 83%루ㅡㄹ 차지 , 인구 비율로는 압도적이나 1988년 1월 장징궈가 사망할 때까지외성인들이 정계를 독점해왓다.

내성인 리덩후이를 후계자로낙점한 인물은 외성인 장징궈였고 그가총통에 연착륙하고 자신의 지지 기반을 축적하는데 국민당 주류를 장악하고 잇던 쑹추위 등과 같은 외성인들이 적극적으로 도왔다. .

리덩후이는 그러나 현재 내성인 이며 첫 여성 총통인 대만 독립을 강령으로 한 민진당 소속 차이잉원 총통 보다 더 급진적이며 총통재임 시절 대만 독립 노선을 구체화하는 행동을 서슴없이 추구햇던 야당 출신 첫 총통 이며 역시 내성인 출신인 천수이볜 전 총통 조차도 대만 독립 행보에서는 리덩후이의 뒷발꿈치를 쫓아가는 처지다.

리덩후이의 '모세 본색'은 그가 야인이 된뒤부터엿으나 그 첫 출발은 1991년 '동원감란 시기' 종식을 선언 한 때부터 시작되엇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를 보좌했던 외성인 쑹추위는 대만의대만화와 민주화를 위해 이를적극 추진하며 리덩후이를 도왓다.

하지만 리덩후이의 마음 속에서는 이를 '출중국기'의 첫페이지로 자리매김햇다.

리덩후이는 야당 민진당 인사들과 만날 때에는표준어인 푸퉁화 대신 대만 방언인 민난화를 사용했다고 한다.

예리한 시각의 관찰자들은 이 행동에서 그의속 마음을 읽었을 수 있다.

1997년 총통 첫 직선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고 개최한 축하 행사에서 리덩후이는 TV로 생중계되고 있는 가운데 불쑥 민난화로 연설을 해 국민당원들과 지지자로 꽉메운 대회장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러나 대만인들은 리덩후이의 '모세 본색'을 알고도 모른척보고도 못 본척했다.
리덩후이는 차근차근 '모세 본색'의노출도를 넓혀 갔다.

결국 2000년 총통 선거를 앞두고 내,외성인들 모두로부터 고른 지지를받고 있던 차기 총통 '0 순위'로 공인된 쑹추위 대신 내성인 출신 렌잔을 국민당 총통 후보로 선출토록하여 쑹이 탈당 새로운 당을 만들어 출마토록 함으로써 천수이벤이 어부지리 박빙 승리를 거두게 햇다.

리덩후이로서는 이 를 아마도 모세가 바다를 가르고 홍해를 건넌 것과 같은 '출중국기'의 클라이 맥스 장면으로 여겼을 것이다.
ㅣ후 리덩후이는 '가나안'으로의 도정을 줄기차게 걷고 있다.<스위프트-버크왈드>

대만계엄령 통치 동원감란법 폐지, 대만 재정부장 베이징 ADB 총회 참석, 중 첫 노동절 개최, 나치 독일 선전상 괴벨스 자살

1991년 5월 1일 대만의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이 ‘동원감란시기 임시조관(動員戡亂時期臨時條款)’ 법의 폐지와 함께 ‘동원감란시기’의 종식을 선언하고 개정 헌법을 선포했다.

국민정부는 국공 내전 발발 1년 뒤인 1947년 7월 4일 잇단 군사적 실패로 군사, 정치상의 심각한 위기에 처하자 '감란공비반란총동원령(戡亂共匪叛亂總動員令)’을 선포했다.

이는 중국 공산당을 ‘반란단체’로 규정하고 ‘감란(戡亂)’, 즉 반란진압의 대상으로 간주한다는 것이엇다.이어 2주일 뒤 인 18일 의회는 ‘동원감란완성헌정실시강요(動員戡亂完成憲政實施要綱)’이라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주요 내용은 인력과 물자의 총동원, 태업, 파업 및 언론집회의 금지와 이를 위반할 경우 처벌하겠다는 것이었다. ‘동원감란법’으로 약칭된다.

국민정부는국공내전에서 공산당에 패배, 1949년 대만으로 옮겨온 뒤 ‘동원감란시기 임시조관’을 제정하고 대만에서의 ‘동원감란’ 체제를 확립하였다. 이는
대만에 대해 군사독재통치를 실시하는 법적 장치였다.

중국 개혁개방으로 양안관계의 긴장이 완화되자 대만에서는 ‘동원감란시기’를 종식시키고 ‘임시조관’을 취소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따라 대만에서는 헌정위기가 지속되었다.

대만 정부는 1990년 5월 1년 안에 동원감란시기를 종식시키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1991년 4월 8일 대만 제1기 국민대회 2차 회의는 4월 23일 ‘동원감란시기’ 의 종결과 임시조관 폐지 결의안을 의결하고 10조의 헌법수정조안을 함께 통과시켰다. 리덩후이 총통의 이날 선언은 동원 감란 시기 종식을 위한 최종 절차엿다.

그러나 동원감란시기 임시조관의효력이 곧바로 정지 되지는않앗다. 관련 법률의 용은 1992년 1월31일까지, 특무기관의 조직법은 1993년 말까지 한시적으로 적용하도록 하였다.

동원감란법 폐지로 대만은 파시스트 체제에서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후 대만성 출신인 리덩후이 총통의 주도로 주권재민을 구현하는 대만의 민주화와 대만화가 추진되어 총통 직선제가 실현되었고 이는 2000년야당인 민진당의 천수이볜이 총통에 당선됨으로써 첫 여야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2008년 마잉주 가 총통에 당선되어 국민당의 재집권이 이우어졌고 마 총통의 연임 뒤 2016년 차이잉원 민진당 후보가 당선 되어 민진당이 8년 만에 권력을 탈환하게 되었다. 이로써 대만은 여야가 정권을 교대하는 민주적 권력 교체 관행이 뿌리박게 되었다.

1989년 = 궈완룽(郭婉容) 대만 재정부장이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총회에 대만 측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베이징(北京)을 방문했다. 이는 대만 대표단이 40년 만에 사상 처음으로 중국대륙을 방문한 것이다.

이는 양안관계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단초였으나 다음달 벌어진 천안문 사태로 후속 단계로 곧바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3년 뒤인 1992년 양안 반관영 기구인 중국의) 해협 양안관걔 협회(해협회)와 대만의 해협교류기금회(해기회) 간에 '하나의 중국'원책 아래 각자가 주장하는바를 상호 용인하는 내용의 '92공식(九二共識)' 합의가 이루어졌고 다음해인 1993년 4월 27일 중국의해협회 회장 왕다오한(汪道涵) 해기회 이사장 구전푸(辜振甫) 간의 회담이싱가포르에서 이루어졌다.이는 국공 내전 패배로 국민당이 대만으로 철수한 이래 양안 기구 대표 간의 첫 공개적이며 공식적인 접촉이었다 .이것이 물꼬를 틀어 국민당이 야당으로 있던 때인 2005년 4월 29일 공산당 총서기 후진타오와 국민당 주석 롄잔 간의 국공 베이징 정상회담 성사로 이어졋다. 다시 10년 뒤인2015년 11월 7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과 마잉주 대만 총통 간의 정상 회담이 싱가포르에서 열렷다. 이는 중국과 대만 국가 최고 지도자간의 첫 만남이엇다.

1920년 = 광저우(廣州)에서 노동절 기념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를 계기로 중국에서 노동절 기념대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세계사 속의 오늘

나치 독일의 선전상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가 부인, 자녀와 함께 자살했다. (1945). 1897년생으로 향년 48세였다.

괴벨스는 라인란트 출생으로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1922년 나치스당에 입당한 뒤 베를린을 나치스화 하였다.

1927년에는 당 기관지 ‘공격(Der Angriff)’을 창간 편집하고, 이어 1929년에 당중앙선전부장, 1933년에는 히틀러내각의 계몽선전장관이 되어 가혹한 언론통제를 실시함과 아울러, 나치스 정책의 보급과 수행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특히 1933년 분서(焚書)운동을 전개하여 유대인과 마르크스 주의 서적들을 불태웠으며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등의 방법으로 민족주의와 전쟁을 고취하였다.

자신의 목적에 따라 대중이 믿도록 하는 것이 그의 선전의 골자였다. 이는 공산당의 선전 선동 방식과도 맥이 통하는 것이다.

괴벨스의 이러한 선전 방식은 전세가 불리해진 상황에서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 독일 국민들이 베를린이 함락될 때까지 나치당에 등을 돌리지 않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괴벨스는 하루 전 자살한 히틀러에 의해 총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6명의 자녀를 독살한 뒤 나치당 호위병에게 명령하여 자신과 부인을 총격 살해하도록 함으로써 생을 마쳤다. 그는 죽음의 순간까지 충성심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던 대상인 히틀러의 예를쫓아 시신을 소각하도록 지시햇으나 완전 소각되지 않고 타다 만 흉측한 모습으로 대중에 공개됏다. .

사실과 진실여부와는 관계없이 대중이 믿는것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막강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선전의 목표는 자신의 목적에 따라 대중의 믿고자 하는 바를 개발, 고취하고 이를 유지하기위해 부단히 노력하는데 두어야 한다는 괴벨스의 선전 논리는 좀비처럼 요즘에도 선진국과 후진국을 막론하고 세계 곳곳에서 배회하며 조건이 맏는 상황이 조성되면 정치적, 사회적 대역병을 불러 일으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그진상이 밝혀진 뒤에는 타다 만 괴벨스의시신 사진 처럼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긴 하지만 말이다.

" 라디오가 없었다면 우리에겐 힘이 없었거나, 주어진 우리 상황에서 힘을 활용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라는그의 말처럼 그의 선전의 핵심 수단은 라디오엿다. 현재의 '좀비 괴벨스의 '라디오'는라디오 자체는 뒷전에 물러나 있는 상황에서 신문, TV 와 'sns'로 확산한 상황이다..

미국의 U2 정찰기가 소련 상공에서 격추됐다(1960년).



2018/05/01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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