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10/16 17:15



[今天歷史-5월4일] 5 · 4 운동 폭발.. 덕선생은 어디에

99년 전인 1919년 중국 5·4 운동의 시위 활동을 주도한 베이징 대 대학생들은 '덕선생(德先生)과 '색선생(塞先生)을슬로건으로 전면에 내세웠다.

'덕(德)'과 '색(塞)'은 중국어 발음으로 각각 '더'와 '사이'로 데모크라시(Democracy) 와 사이언스(Science)의 첫 머리 발음을 음차하여 표기한것이다.

이는 천두슈가 1915년 '신청년'에서 기고한 글을 통해 서구의 민주주의와 과학 정신을새로운 중국을 이끌쌍두마차로 삼자고 주장하며 쓴 표현이다.

각종 주의주장이 백화제방으로 펼쳐졌던 5·4 운동에서 이 슬로건은 단연 가장 임팩트가 컸다.

그러나이 슬로건 의 '생모'인 천두슈는 1921년 중국 공산당의 창당 주역이 되고 당수를 지내면서 '덕 선생'을 버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로 말을 갈아탔다. 결국 그는 죽음을 앞두고 수구초심햇으나 공산당에서도 쫓겨난 그의목소리는 '황야의 고독하고 낮은' 울림으로 묻혀졌다.

5·4 운동 70주년 때 천안문 민주화 시위를 벌이던 베이징의 대학생들은 다시 '덕 선생'을 들고 나왔다. '사이 선생'은 이미 중국을 끌고 나가는 주력 말이 되었기에 구태어 내새울 필요가 없었다.

1989년 천안문 광장의 시위대학생들은 미국 '자유의 여신상'을 연상시키느,는 '민주 여신상'을 광장에 세움으로써 부활한 '덕 선생'이 '민주 집중제'의
'민주'가 아니라 천두슈가 발제하고 1919년 베이징 대학생들이 드러내고자 한 '서구 민주주의'임을 분명히 했다.

'선 경제개혁 후 정치 개혁'을표방한 덩샤오핑은 조금의 주저 없이 1989년의 '덕 선생'을 압살했다. 덩의 사전에 '서구식 민주주의 '는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2018년의 시황제 체제 하의 중국은 '덕 선생'과는 더욱 더 멀어 졌다.
내년이면 5·4 운동 100 주년을 맞는다. '덕 선생'은 어디로 가는가.

더욱더 뒤로 아니면 눌려온 용수철 튀어 오르듯 100m 달리기 하듯 뛰어 갈까. <스위프트-버크왈드>

1919년 5월 4일 중국에서 베이징(北京)대학생을 중심으로 대규모 반제국주의 시위가 벌어졌다. 이른바 5 · 4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제1차대전이 종결된 이후, 전승국들은 파리에서 ‘평화회의’를 열고 패전국 독일에 대한 처리문제를 논의했다.

이 회의에서 강대국들은 독일이 중국 산둥(山東)성에서 보유하고 있던 특수 이권을 일본에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중국 역시 전승국 입장으로 이 회의에 참여하였으나 중국의 의견은 철저히 무시됐다.

이는 청일전쟁 이후 꾸준히 추진되어 오던 일본의 중국 침략의성과를 국제적으로 공인하는 격이었다.

일본은 1894∼95년 청일전쟁 이후 1904~1905년 러일 전쟁을 거쳐 1910년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한편, 제1차세계대전 중의 국제적 혼란을 이용하여 중국침략을 적극 추진했다.

우선 독일이 적극적으로 진출, 개발한 산둥성의 항구 도시 칭다오(靑島)를 점령한 다음 다시금 21개조 요구, 니시하라차관(西原借款) 및 중일공동방위협정의 체결을 중화민국 정부에 강요했다. 이 당시 중화민국 정부는 위안스카이를 총통으로 하는 청나라 말기 북양 군벌을 세력 기반으로한 군벌 정부였다.

군벌정부의 무기력에 실망하고 있던 중국의 지식인들과 민중들은 파리 평화회의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으나 이러한 결정이 내려지자 마침내 분노가 폭발하기에 이르렀다.

파리 평화회의 결정 소식이 전해지자 1919년 5월 4일 베이징 대학 등 베이징 소재 10여개 대학의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 집회를 갖고 정부를 규탄하고 친일파 인사인 차오루린(曹汝霖), 루쭝위(陸宗輿), 장쭝샹(章宗祥) 등의 처벌을 요구했다.

일부 시위 학생들은 차오루린의 집으로 몰려가 마침 차오의 집에 머무르고 있던 장쭝샹을 구타하고 차오의 집을 불태웠다.

군벌 경찰들은 이날 30여명의 학생들을 체포했다. 이튿날 베이징의 모든 대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하고 학생연합회를 발족시킨 뒤 전국에 궐기 전문을 발송했다.

리다자오(李大釗)는 당국의 학생시위 진압을 비판하고 파리평화 회의의 산둥성 문제에 관한 결의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아울러 그는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을 촉구했다.

베이징에서 촉발된 반제운동은 전국으로 확대되어, 각 지역의 학생, 노동자, 상인들은 베이징 대학생들을 지지했다.

이 운동의 역사적 배경으로는 21개조 요구 이후의 중국에 대한 일본의 노골적 침략정책과 그에 대한 중국민중의 항의 및 1915년 무렵부터 시작된 지식인층의 신문학운동 전개, 노동운동 및 한국의 3· 1운동 등이 있다.

특히 2개월 전에 발생한 한국의 3· 1운동은 운동 초기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의 결집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중국 지식인들에 의한 신문화운동은‘데모크라시(德先生)와 사이언스(賽先生)’라는 슬로건에서 알 수 있듯이 근대 서유럽을 모범으로 하는 지적 계몽운동이었다.

특히 예교비판(禮敎批判)은 군벌지배의 반동성을 지적한 것이었다. 이 지적 각성이 그들로 하여금 애국운동을 하게 했다.

한편 노동운동도 그때 일어나고 있었는데 자본주의가 아직 발달하지 못한 중국에서도 제1차세계대전 중 열강의 압박이 느슨해진 틈을 이용하여 민족자본을 발전시킴과 동시에 노동자가 조금씩 늘어남에 따라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싸웠다.

이러한 배경 아래 시작된 5· 4 운동은 그해 6월 3일 이후 노동자·상인 등을 포함한 ‘삼파투쟁(三罷鬪爭 : 학생,노동자.·상점의 동맹파업)’으로 발전했으며,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과 종속외교를 수용하고자 하던 군벌정부에 강력히 항의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민족자결주의’와 ‘실용주의’ 등 각종 사상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운동참가자들의 사상이 일치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그 뒤의 노동운동·농민운동 등 대중운동의 출발점이 되었고 공산중국의 사학계는 이를 신민주주의혁명의 시발점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1939년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던 ‘산간닝(陝甘寧 : 현재의 산시陝西, 간쑤甘肅성과 링샤寧夏자치구)변구(邊區)’의 서북청년국구연합회는 5· 4 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5월 4일을 ‘중국청년절’로 지정했다.

1949년 12월 공산 중국의 중앙 인민정부 정무원(국무원의 전신)은 이 날을 정식으로 기념일로 지정했다. 천안문 광장의 인민영웅 기념비에도 5· 4 운동의 장면이 부조되어 있다.

1989년 5· 4 운동 70주년은 천안문 광장이 시위 학생들에 의해 점거된 채 치러졌다. 당시 70년 전에 등장했던 ‘덕선생’이란 슬로건이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2018/05/04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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