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5/28 03:59



[今天歷史-5월6일] 왕징웨이 日 투항...제1호 漢姦

과감하고 거침없이 겨털을 노출하고 살며시 살짝 음모까지 드러낸 중화권 영화 '색계' 주연 여배우 탕웨이의 베드신 연기를 통해 우리 관객은 일단 '피핑 톰 면허'가 주는 숨막히는 흥분에 듬뿍 취했을 법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중국 역사교육 기능을 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은 잘 알지 못했던, 아니 전혀 무지했다고 보아도 과언이아닌 하지만 무심코 뛰어 넘어갈 수는 없는 중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에 대해 부지불식간에 주입식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위(僞) 중화민국'의 존재였다.

'위 중화민국'은 중일전쟁 시기 일본군이 점령한 지역에 수립된 일본 괴뢰정권이었다. 장제스 국민정부의 2인자였던 왕징웨이 등 국민정부에서 이탈한 세력이 일본에 투항하여 세운 별도의 중국 정부였다.

이들은 뻔뻔스럽게도 자신들이 정당성을 갖춘 정통 정부라며 장제스 정부와 똑같이 '중화민국 국민정부'라고 내새웠고 외교 및 각종 공문서에도 그대로 이 명칭을 사용했기 때문에 '가짜'라는 '僞'자를 붙여 구별하고 있다.

이탈리아 영화감독 베르톨루치가 연출한 '마지막 황제'를 통해 우리나라 관객이 비교적 상세히 역사적 배경과 실상을 알게 된 일본 괴뢰국 만주국을 중국에서는 '위 만주국'으로 표기하는 것 과 마찬가지 맥락이다.

중국 정부는 색계에 출연한 탕웨이의 중국 내 활동을 금지하기도 했는데 이는 영화가 일제 침략기의 중국 젊은이의 목숨을 건 애국투쟁 활동을 폄하하는 인상를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탕웨이가 맡은 역은 '위 국민정부' 특무대장을 암살할 상황을 만들기 위해 그에게 미인계로 접근한 반일 지하단체의 여자요원이었다.

탕웨이는 암살의 표적이 되어 극도로 경계심이 많은 특무대장( 양조위 분)의 철저한 경계망을 뚫기 위해 '진정한 애정'을 '연기'하여 마침내 그 방어망을 뚫었다.

그러나 완벽한 암살 조건이 이루어진 그 상황에서 탕웨이는 '연기'가 '진정'으로 바뀐 탓에 죽음 직전의 양조위에게 "도망쳐요"라고 말을 던짐으로써 정교한 '공든 탑'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탕웨이는 모든 것을 다버린 지하 비밀요원에서 한 남자를 진정으로 사랑한 여인이 되어 그 애인의 명령으로 동료 요원과 함께 총살 처형됐다.

양조위는 특무대장으로서 자신의 진면목을 되찾아 '애인'의 목숨을 구해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는 그에 의한 묵시적 직접 처형'이었다.

양조위는 처형된 탕웨이의 손가락에서 빼어낸 자신이 사준 반지를 부하로부터 전달받아 이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림으로써 공과사를 철저하게 분리했지만 사랑만큼은 진정이었음을 확인시켜 주며 영화는 끝이 난다.

선악은 구분되어야 하고 구분되어 있으나 영화에서 권선징악은 혼란스럽다. 정의를 행하는 쪽의 '사랑'은 가식이었고 반역자 쪽의 '사랑'은 진정이었다.

양자 모두 방법은 지독하고 비열했으며 처벌과 응징은 무자비했다.

과거의 역사에 대해 선악과 옳고 그름이 이제는 가름마 타듯 정리되어 있지만 실제의 진실은 혼재되어 이처럼 아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언젠가 외신에서 세익스피어 4대 비극 중 하나인 '오셀로' 연극에서 데스데모나가 남편 오셀로에 의해 목졸려 죽기 직전, 자신의 진실과 진정서을 밝히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으로 옷을 모두 벗고 나체로 호소하는 신을 연출하였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색계'의 감독 리안이 거침없고 무제한의 베드신을 연출한 것은 데스데모나의 나체 호소 연기와 같은 맥락이 아닐까.

탕웨이는 가식에서 출발했으나 처절한 '진실사랑'을 추구하는 과정을 통해 진정에 이르렀고 양조위의 마지막 경계 빗장을 여는데성공했다.

'색계'에서 남녀는 진정한 사랑에 이르렀으나 비극적 결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진정하고 진실된 사랑이었으나 데스데모나는 처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한 의심이 거짓임을 입증하는데 실패했다.

세익스피어의 '오셀로'도 데스데모나를 죽이고 나서야 그녀의 진실한 사랑과 자신의 진실한 사랑을 확인한다.

'색계'와 '데스데모나 알몸 호소 연기 연출의 오세로'는 같은 듯하며 다르고 다른 듯 하면서도 같은 듯한 결말이다.

어쨌든 영화 속에서 '위 국민정부'를 '왕지웨이 정부'로 표현하는데 이는 당시의 일반적 호칭에 맞는 것 같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장제스 정부'와 '왕징웨이 정부'로 불렀을 것 같다.

왕징웨이는 '포스트 손문'으로 간주되었다는 점에서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키는데 레닌 다음의 공로자로 레닌 후계자로 여겨졌으나 끝내 1인자에는 오르지 못한 트로츠키에 비견될 수 있겠다.

그러나 왕징웨이는 침략자에게 투항했다는 면에서 2차대전 중의 프랑스 비시정부의 수반 페탱 원수를 연상하게 한다.

왕징웨이는 청나라 타도를 도모한 주요 지도자 중 하나였으며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의 생부이자 섭정인 순친왕 재풍을 암살하려다 발각되어 사형 판결까지 받은 '행동하는 혁명가'이기도 햇다.

페탱은 1차대전 당시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여 프랑스를 구한 전쟁 영웅이었다.

왕징웨이는 중국의 주요 지역이 일본군의 군화발에 밟히자 '현실'을 수용하고 일본에 투항했다. 페탱 역시 나치 독일의 프랑스점령을 '불가피한 현실'로 받아들였다.

이 착오적 결단으로 왕징웨이는 '민국의 인기 수위의 정치가이자 혁명가'에서 1호 한간(漢姦), 즉 매국노이자 민족 반역자로 역사에 자리매김됐다.

페탱 원수도 '구국의 영웅'에서 '프랑스 공화국의 반역자'로 역사에 기록됐다.

우리나라 역사의 이완용도 관계 진출 초기에는 깐깐한 처신과 출중한 능력에 거시적 식견의 신진 관료로 상하의 주목을 받았다.

지위에 오른 뒤에는 독립협회의 지도자로 재정적 지원도 매우 컸다. 독립문 현판 글씨도 명필로 이름난 그의 작품이란 말도 있는데 이는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이 되고 있다.

영어에 능통하고 주미공사관에서도 근무하여 국제정세에 밝은 이완용은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확실하고 단호한 친일 매국노의 길을 걸엇다.

이완용은 삼일운동 직후에도 여러 차례 조선인에 대한 경고성명을 발표할 정도로 '확신 매국노'였고 그렇게 죽었다.

이완용은 자신의 매국적 선택이 영구화할 것이라는 분위기 속에 잘못된 확신을지 닌채 죽었다.

왕징웨이는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러나 이완용과 마찬가지로 와석종신했다.

하지만 페탱은 자신의 판단이 잘못됏음을 두 눈으로 확실히 보았고 '반역 죄인'으로 치욕과 수치그리고 회한의 여명을 외로운 섬에 갇혀 유폐 생활을 하다가 죽었다.

이들 세 사람은 죽은 때가 어떻든 판단은 과오였고 평가는 반역자'로 통일된다.

역사의 기로에 서서 판단을 내려야 할 지도자들이 명심해야 할 경귀는 ''전일의 역사를 잊지말자. 앞으로 일어날 일의 스승이 될지니(前事不忘 後事之師)'이다. <스위프트-버크왈드>
발표

매화 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꽃, 브란트 서독 총리 사임, 도버 해저터널 개통, 로베스피에르 탄생, 스탈린 소련 총리 취임, 류성룡 사망, 윤보선 대선 패배로 정계 은퇴

1939년 = 국민당 좌파 지도자로 장제스(蔣介石)에 이은 2인자 위치에 있던 왕징웨이(汪精衛)가 일본에 투항한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힌 전문을 장제스(蔣介石)에게 발송했다.

왕징웨이는 1883년(청 광시光緖 9년) 5월 4일 광둥(廣東)성 판위(番禹)에서 태어났다. 장제스보다 4년 연상이다.

조적은 장시(江西) 우위안(?源)이었다가 저장(浙江)성 샤오싱(紹興)으로 옮겼다. 징웨이는 호이며 이름은 자오밍(兆銘)이고 자(字)는 계신(季新 : 제신)이다.

1905년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에 가입하고 1910년 청의 섭정왕 재풍(載?)의 암살음모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되었으나 다음해 발발한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석방되었다.

신해혁명후 위안스카이(袁世凱) 정권에 참가하였다가 후에 손문(孫文: 쑨원) 진영에 다시 참여하였다. 1923년 손문의 국민당 개조 및 3대 정책의 실천을 옹호하였다.

1925년 국민당 정부 주석 겸 군사위원회 주석에 선출됐다. 정치 권력과 명목상 군사지도권을 확보했으나 실질적인 군권은 장제스가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국민정부 국민혁명군 북벌군 총사령관 장제스가 북벌 중이던 1927년 4월12일 4.12 상하이 반공 쿠데타에 반대하여 장제스의 난징정부에 대항하는 우한(武漢) 정부를 수립했던 왕징웨이는 3개월 뒤인 7월15일 공산당과 결별하고 공산당원과 노동자-농민 세력을 탄압한 뒤 장제스와 손을 잡았다.

이를 난징과 우한 두 도시의 약자를 따서‘닝한(寧漢) 합류’로 부른다. 이는 내용적으로는 왕징웨이가 장제스의 최고지도권을 인정한 것이다.

1932년 난징(南京) 국민정부의 행정원장, 외교부장 등을 역임하며 대내적으로는‘공산세력의 전면 타도(全力剿共)'와 대외적으로는‘일본과 제휴(中日提携)’라는 장제스의 정책을 겉으로는 충실히 추종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국민당 부총재, 중앙정치위원회 주석, 국민당 참정회 의장에 선출됐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장제스의 데 항전에 반대 입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38년 11 24일 홍콩에 있는 자신의 측근 가오쭝우(高宗武), 메이쓰핑(梅思平)으로 하여금‘일화협의기록(日華協議記錄)’과 ‘양해사항(諒解事項)’을 체결하도록 하였다.

1938년 12월 중칭(重慶)에서 베트남 하노이로 탈출했다.

1939년 5월5일 베트남에서 상하이로 출발했고 이어 다음날 장제스에게 전문을 보내 공개적으로 일본에 투항했음을 밝혔다.

선상에서 일본의 이마이 다케오(今井武夫) 중좌와 밀담을 갖고 충칭 국민정부와 대립되는 정부를 설립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중국 대륙에 만주국에 이은 제2의 일본 괴뢰정부를 세우려는 일본의 의도에 협력함으로써 왕징웨이는 되돌이킬 수 없는‘매국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중국 인민은 그를 대표적인‘한간(漢奸)’, 즉 민족반역자로 간주한다.

왕징웨이의 이 같은 민족 반역 행위는 그의 최고 권력에 대한 야심 때문이었다는 지적이 잇다.

이런 점에서 보면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려는 욕심 때문에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수락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해 5월31일 왕지웨이는 저우포하이(周佛海), 메이쓰핑, 가오쭝우, 그리고 둥다오닝(董道寧) 등과 일본을 방문, 히라누마 히로코이치로(平沼鱗一郞) 내각 각료들과 회담을 가졌다.

연말 일본과‘일본-중국 신관계 조정강요(日支新關係調整綱要)’을 체결했다.

해가 바뀐 1940년 3월30일 난징에 괴뢰 국민정부를 수립하고 주석과 행정원장이 되었다.

나치 독일에 항복한 프랑스가 1940년 7월10일 1차대전 영웅 페탱 원수가 나치 독일에 협력하는 비시 정권을 세웠으니 중국의 일본 괴뢰 정권은 프랑스의 독일 괴뢰 정권보다 2개월10일 앞서 수립된 셈이다.

왕징웨이는 이후 분명한 친일노선을 확고하게 걸엇다. 일본의 침략전쟁을‘대동아성전(大東亞聖戰)’으로 지지한 것이다. 결국 그는 중국인의 저격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치료를 받던 중 1944년 11월10일 일본 나고야(名古屋)에서 병사했다.

1987년 5월6일 매화가 10개월여 동안 실시된 중국의 전통꽃 선정 투표에서 수위를 차지했다.

‘서리와 눈에도 고고한 자태를 뽑내는(傲霜鬪雪)’ 매화는 29개 성, 시, 자치구에서 총 14만9000여표를 획득했다. 10대 전통 명화 선정은 114명으로 구성된 평가위원회가 투표 결과를 근거로 하여 최종적으로 이루어졌다.

매화 다음으로 모란(牧丹), 국화(菊花), 난초꽃(蘭花), 월계화(月季), 진달래꽃(杜鵑), 동백나무(山茶), 연꽃(荷花), 물푸레나무 꽃(桂花) 및 수선화(水仙花) 순이다.

1882년 = 미국 중국인의 이민 10년간 금지.

세계사 속의 오늘

동방정책으로 동서독 화해를 성사시켰던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측근 기욤 등이 동독 간첩으로 판명돼 사임했다(1974). 영국과 프랑스 간 도버해협의 해저터널 개통됐다(1994).

프랑스 혁명기 공포정치를 펼친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가 태어났고(1758) 소련 철권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소련 총리에 취임했다(1941).

한국사 속의 오늘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 류성룡(柳成龍)이 사망했고(1607), 4대 대통령을 역임한 윤보선(尹譜善)이 박정희(朴正熙) 후보에게 패배해 정계은퇴를 선언했다(1967).

2018/05/06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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