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5/28 03:59



[今天歷史-5월8일]日 선양총영사관 앞 탈북자, 덩리쥔

[어제 오늘 내일]닉슨 북베트남 항구 기뢰 봉쇄령...美 새옹지마 초대박 단초

중영 아편협정, 남북한 첫 직교역

2002년 5월 8일 중국 선양(瀋陽)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 진입을 시도하던 탈북자 5명이 중국 공안에게 체포됐다.

남자 2명과 여자 2명, 그리고 어린아이 1명으로 구성된 이들 탈북자들은 오후 1시 55분 일본 총영사관 경비를 맡고 있던 중국 공안을 따돌리고 영사관 진입을 시도하였다.

여자 2명과 어린아이 1명은 공안에게 붙잡혔지만 남자 2명은 일본 영사관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하였다.

탈북자 중에는 후에 조지 W 부시(아들 부시) 미 대통령과 회견하게 되는 김한미양 일가족 3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탈북자 5명은 오후 1시55분 일제히 일본 총영사관 정문을 통해 영사관 진입을 시도하였다.

당시 28세이던 김한미양의 아버지 김광철씨와 또 다른 남자 1명은 경비를 맡고 있던 중국 공안을 따돌리고 일본 총영사관 안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했지만 김한미양과 김양의 어머니 이귀옥씨(당시 29세)등 여자 3명은 붙잡혔다.

당시 영사관 철문 안 쪽에서 두 명의 중국 공안원에 의해 영사관 바깥쪽으로 끌려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어린-당시 생후 2년 4개월이었다- 김한미양의 모습은 TV화면을 통해 전 세계 방영됐고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사진)부시 미 대통령이 많은 탈북자 가족 중에서 김한미 가족을 만나기로 한 것은 아마도 천진함과 절박함이 대조를 이룬 당시의 그 장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중국 공안은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대문 안 쪽으로 나와 이 광경을 지켜보았던 일본 영사관원의 묵인 하에 일본 영사관 청사 안으로 들어가 영사관 구내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던 남자 탈북자 2명마저 연행하여 영사관 경비실로 데리고 갔다.

공안의 강제 연행에 앞서 일본 영사관원은 이들이 탈북자임을 확인해주었다.

경비실에는 앞서 영사관에 진입하려다 붙잡힌 김한미양 모녀외에 다른 여성 탈북자 1명 등 모두 3명의 부녀자가 있었다.

일본 영사관원의 연락을 받은 일본 부영사는 이들의 신분을 확인하였으며 중국 공안이 이들을 데려가겠다고 하자 잠시 생각한 끝에 이에 동의했고 공안의 연락을 받고 출동한 다른 중국 공안 요원은 이들 탈북자 5명을 인계하여 연행해 갔다.

한국 TV를 통해 이 일련의 상황이 전세계에 생생히 보도되면서 파문이 확대되자 일본 외무성은 중국 공안이 일본 영사관의 허락도 받지 않고 무단으로 영사관에 들어와 탈북자들을 연행하여 갔다고 주장했으며 중국 측은 외교부대변인 성명을 통해 이를 반박, 한동안 양국간 외교적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일본 총영사관에 진입하려는 여성 탈북자의 사생결단 모습과 기를 쓰고 끌어내려는 중국 공안의 자세, 그리고 이를 강 건너 불을 보듯, 무덤덤하게 바라보던 일본 외교관의 태도는 탈북자에 대한 중국과 일본의 시각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들은 이처럼 일본 외교관의 방치 속에 모두 중국 공안당국에 끌려갔으나 불과 보름만에 풀려나 한국 측에 인도됐다. TV화면을 통해 이 모든 장면이 생생하게 세계에 공개됐기 때문이었다.

당시 천진난만한 자세로 물끄러미 어머니와 중국 공안 간 실랑이를 지켜보던 두살박이 김한미양 가족은 4년 뒤인 2006년 4월28일 미국을 방문, 백악관에서 아들 부시 대통령과 회견했다.

김한미양 가족은 전남 순천에 정착하여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한국으로 올 수 있었던 데는 언론의 힘이 컸다고 말했다.

백악관에서 있은 부시 대통령과 회견에서 김광철씨는 북한주민 2000만의 해방과 30만 탈북자 구출을 위해 미국 정부가 노력해줄 것을 호소하는 호소문을 전달했다.

김한미양 일가족과 일본인 북한 피랍여성 메구미의 어머니 등과 만난 부시 대통령은“대통령 재임 중 가장 감동적인 만남이었다”며 “미국 대통령으로서 인권과 자유가 없는 북한 주민을 위해 끝까지 노력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부시와 김한미 가족과 만남이 이루어진지 12년 뒤인 올해 1월30일 미국 의회에서 행한 연두교서를 통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탈북자 지성호씨를 언급했으며 이에 방청석 2층에 앉아 있던 지씨가 목발을 들어 올리며 화답했다.

이 장면은 TV를 통해 전세계 인에게 전달됐다. 트럼프가 북한 핵 문제와 같은 비중으로 북한의 참혹한 인권 문제를 강력하게 이슈하할 것임을 시사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6월12일 열리는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 인권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1995년> = 대만 여가수로 양안 등 중화권은 물론 한국과 일본에서도 폭 넓게 인기를 끌었던 가수 덩리쥔(鄧麗君)이 휴양 중이던 태국 치앙마이에서 천식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향년 42세.

대만은 20주기를 앞두고 2015년 4월15일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덩리쥔, 왕페이와 시공을 초월한 듀엣곡 완성2015/05/03 10:18

대만 ‘가희’ 덩리쥔 20주기 맞아 기념우표 발행2015/04/15 22:22

[Pensees] 三金’과 ‘三鄧’ 그리고 ‘벌겋게 물든 서산’2015/02/26 20:36


1911년 = 영국과 청나라 아편협정 체결.

세계사 속의 오늘

1972년 5월8일=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 북베트남의 모든 항구에 대해 기뢰봉쇄 명령을 내렸다. 파리 평화협상 타결을 성사시키려는 압박 조치였다.

이해 2월 닉슨의 방중으로 이루어진 미중화해를 배경으로 던진 닉슨의 승부수는 효과를 발휘, 결국 파리 평화협상이 미국이 의도한 대로 마무리되었다.

미국은 1973년 1월27일 조인된 파리평화 협정에 따라 베트남전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미국 , 북베트남, 남베트남 그리고 베트콩 측 외무장관이 서명 조인한 파리 평화협정의 두 핵심 주역은 헨리 키신저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과 레둑토 북베트남 공산당 정치국원이었다.

키신저 보좌관은 1972년 닉슨의 재선 성공에 따라 1973년 2기 닉슨 행정부출범과 함께 국무장관에 임명되었고 1973년도 노벨 평화상을 레둑토와 함께 공동 수상했다.

그러나 레둑토는 수상을 거부했다. 파리 평화협상에 대한 불만의 표시였다. 이는 베트남 분단 체제 유지라는 약속을 언제든 파기하겠다는 시사였고 이는 불과 2년도 못가 실행됐고 성공했다.

닉슨의 기뢰 봉쇄령으로부터 만 3년에서 하루 모자라는 1975년 5월7일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닉슨의 후임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파리 평화협정 위반인 북베트남의 남베트남 군사점령을 받아들이고 베트남전의 종전을 선언했다.

이는 미국이 개입한 전쟁에서 미국의 첫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미국이 '베트남전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1991년조지 부시(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1차 이라크 전쟁( 걸프전)에서 승리를 거두면서였다.

10년 후 조지 W 부시 (아들 부시 ) 대통령은 2001년, 2003년 아프간 침공과 이라크 침공을 단행,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는데 베트남전 때와는 달리 상대국의 수도를 점령하는 2차대전 전략 개념을 채택했다.

1차 이라크전 당시 아버지 부시가 유프라테스강에서 전진을 멈춘 것은 한국전과 베트남전 처리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전투기 조종사로 2차대전에 참전했던 아버지 부시와는 달리 베트남전 당시 주방위군 근무로 전쟁의 총탄을 피했던 아들 부시는 미국 본토의 심장부가 테러 공격을 당하는 상황에서 냉전 당시의 제한전이 아닌 2차대전 방식의 전면전을 선택한 것이다.

이는 냉전 종식으로 미국이 유일 초강대국이 된 상황 변화가 큰 몫을 했다.

베트남전에서는 소련과 중국이 이미 미국이 17도선 이남의 유지라는 제한적 전략 목표 아래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가운데 북베트남의 버팀목 역할을 견지했다.

또한 미국이 냉전말기 주적 소련과 군비경쟁에 집중하면서 무기 분야에서 첨단 기술의 발전과 군사 전략 목표를 신속하게 이행할 수 있도록 뒷받침한 가공하게 업그레이드된 현대적인 병참 지원 능력의 향상도 큰 역할을 했다.

이런 가운데 국제 테러조직 알카에다 오사마 빈 라덴의 2001년 9·11 테러 성공은 '초대박의 치명적 독배'였다.

빈 라덴과 그의 후견자 역할을 자임해온 아프간 탈레반 정권의 최고 지도자 오마르와 이라크의 최고지도자 사담 후세인은 미국이 베트남전 패배의 계기를 마련한 1968년 1월31일 베트콩의 테트 공세를 상기하며 느긋해 하였지만 미국지도자와 국민은 1968년처럼 분열하지 않고 60년 전 1941년 12월7일 진주만 기습 때 처럼 일치단결했다.

결국 사담, 빈 라덴과 오마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집요한 미국의 추적과 공격 앞에 죽었고 그들의 체제도 붕괴했다.

이를 미군의 군사 전략 변화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2차대전의 참전 군인이며 한국전과 베트남전을 지켜보았던 아버지 부시는 미국의 최고통수권자로서 한국전 당시 군사 전략적 실패를 의식했다.

한국전 때 서울 수복 뒤 압록강과 두만강 등 한중 국경선까지 진격한 것은 미국이 전혀 예상치 않았던 신생 공산중국의 개입을 불러 왔다고 미국 전략가들은 복기했다.

미군이 대동강선과 원산만 선에서 머물럿다면 공산중국의 개입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부시는 유프라테스선을 이라크의 '두만강- 원산만' 선으로 간주한 것이다.

물론 아버지 부시는 베트남전의 과오를 의식, 사담 후세인 정권의 막강한 군사력을 완전 괴멸시켰다.

이는 사담의 이라크가 쿠웨이트 침공과 같은 도발을 더 이상 엄두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이라크 권력 이너서클이 자체적으로 사담을 제거하기를 기대했다.

사담의 사위들이 중심이 되어 사담 제거가 시도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2001년 9.11 테러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 벌어지자 미군은 10년 사이 한층 업그레이드된 전략 개념 아래 전쟁을 벌였다.

그것은 2차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적국의 수도를 점령하고 또 그 최고 지도자를 '참수'하는 결과를 가져올 때라야만 군사적 의미에서 전쟁의 종식으로 본다는 것이엇다.

아들 부시가 2001년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2003년 이라크 침공에서는 주저 없이 수도인 카불과 바그다드까지 진격했고 그 최고 지도자인 오마르와 사담을 추적했다.

사담을 체포하여 이라크 법정에 세워 그 반대 세력에 의해 교수형으로 처형되게 하였다. 그리고 아프간 탈레반 정권의 최고 지도자 오마르는 피신 중에 병사하도록 몰아갔다.

이로써 미군은 바뀐 군사전략 구체적으로 적국 수도 점령과 최고 지도자 참수라는 결과를 성취했다.

걸프전과 이라크 침공은 공화당 정권 하에서 이루어졌지만 알카에다 빈 라덴에 대한 '참수'는 2011년 민주당 정권에 의해 수행됏다.

빈 라덴의 '처형 집행'은 그가 미국 민간 시민을 2000명 가까이 살해하였고 국가가 아닌 테러 조직의 우두머리였기에 법적 절차를 밟지않고 미국이 직접 집행했다.

그것도 빈 라덴이 은신하던 파키스탄이 동맹국이었음에도 불구 사전에 알리지 않았다.

미군 특수부대 네이버실 대원에 의한 빈 라덴의 처형 장면은 백악관에 실시간 원격 영상 중계됐다.

그 장면은 대통령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도 지켜보았다.

오바마는 미군 최고 통수권자이다. 그러나 또 한편 노벨평화상 수상자이다. 여성인 힐러리는 순간 입을 막아 잔혹한 장면때문에 터져 나온 비명 소리를 막았다고 한다.

정리하면 21세기 들어선 뒤부터 미국의 군사전략은 적대세력과 전쟁을 벌일 경우, 상대국의 수도를 점령하고 그 최고지도자에 대해서는 '참수작전'을 집행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참수작전에 대한 미국의 직접 집행 여부는 미국인에 대한 직접 살해 여부와 국가 최고지도자 여부가 고려된다.

국가 최고지도자의 경우 그나라 국민에 의해서거나(리비아 무아마르 카다피), 간접적인 방법(아프간 오마르)이거나 법적 절차(이라크 사담 )를 밟는다.

하지만 알 카에다 경우 특수부대 대원에 발견 즉시 사살이라는 집행 명령이 사전 부여됐다.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

남북한이 사상 첫 직교역을 갖고 설탕과 소주를 교환했다(1993).

2018/05/08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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