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5/28 03:59



[今天歷史-5월9일] 위안스카이 21개조 수락

1915년 5월 9일 위안스카이(袁世凱) 중화민국 총통이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수락했다. 중국인은 이날을‘국치일’로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는 일본에 강제병탄 당한 것을 두고 1910년 간지에 맞추어 경술국치로 지칭하는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중국인은 21개조 수락을 나라를 빼앗긴 것에 비견되는 가장 수치스러운 일로 여긴다는 이야기다 .

1914년 7월28일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제국주의 유럽 강국들, 구체적으로 영불독러 등은 동아시아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이때를 틈타 일본이 중국에 대한 침략을 적극화하였고 이 과정에서 제기된 것이 바로 21개조 요구다.

1914년 8월23일 독일에 선전포고한 일본은 중국 정부에 중립지역을 정하여 일본군이 그곳으로 상륙할 수 있도록 하라고 요청했다.

이는 러일 전쟁을 전후 영일(英日)동맹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서양의 양대 해양 강국 영국과 미국에 밀착한 일본이 유럽 최대 대륙 강국으로 부상하여 이들과 대립한 독일 세력을 구축하는데 동참하겠다는 명분 아래 독일이 중국에서 장악하던 이권을 빼앗기 위한 것이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명분으로 내세웠던 '정명가도(征明假途)', 즉 '명을 치기 위한 길을 빌려달라'는 속이 뻔히 보이는 꼼수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이를 수락했다.

위안스카이의 승낙을 얻어 일본의 대군이 산둥(山東)성 룽커우(龍口)와 라이저우(萊州)에 상륙하여 남으로 진군, 11월7일에 지난(濟南), 칭다오(靑島)와 그리고 자오저우(膠州) 일대의 철도까지 점령하였다.

이는 1894~1895년 한반도에서 청나라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일본이 벌였던 청일전쟁의 중국 대륙 버전이다.

1915년 1월18일 베이징(北京) 주재 일본 공사 히오키마스(日置益)은 위안스카이를 만나‘21개조’를 제시하고 이를 수용하고 비밀을 지킬 것을 요구하였다.

21개조는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 앞 네 부분은 다음과 같다.

- 독일이 산둥성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권리를 일본에 넘겨준다.

- 중국은 산둥성과 연해 섬들을 타국에 양도하거나 조차해 주어서는 안 되며 일본은 산둥성 내에 철도를 부설하고 주요 도시를 통상항구로 개설한다.

- 뤼순(旅順), 다롄(大連)의 조계 기한과 남만주(南滿洲), 안펑(安奉) 철도 조차 기한을 모두 99년으로 연장하며 일본인은 남만주와 동부 내몽골에서 토지 차용권 혹은 소유권, 거주권 및 광산개발권을 가진다.

- 한예핑(漢冶萍) 회사를 중국과 일본이 공동 경영한다.

다섯 번 째 부문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일본인을 정치, 재정, 군사 고문으로 초빙해야 하며, 일본이 중국에서 세운 병원과 학교는 토지 소유권을 인정해야 하고, 경찰 행정과 무기 공장은 중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경영해야 한다.

- 우창(武昌), 쥐장(九江), 난창(南昌) 사이 및 난창과 항저우(杭州), 차오저우(潮州) 사의 철도와 푸젠(福建) 성 내에 철도를 부설하고 광산을 개발하는 것에 일본이 우선권을 가진다.

21개조 요구는 중국을 일본의 보호국, 더 나아가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의도 하에 작성된 것이었다. 이는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과 사법권과 경찰권을 빼앗고 차관 통치의 길을 열어낸 1907년 정미 7조약을 뭉뚱그려 하나로 압축한 것이었다.

일본은 서구 열강이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중국에 대한 독점적 식민 지배를 꿈꾸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심 청나라의 뒤를 잇는 새 왕조의 황제에 대한 야심을 키우고 있던 위안스카이는 일본으로부터 제정제로 전환하는 데 대한 보증을 얻기 위해 21개조 중 일부 조항만을 제외하고는 받아들일 결심을 하였다.

그는 외교총장 루정샹(陸征祥)과 차장 차오루린(曹汝霖)을 내세워 일본 공사 히오키마스와 협상했다. 다섯번 째 내용에 대해서는 협상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논의를 지속하였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5월7일 히오키마스는 중국 외교부에 5월9일 오후 6시 시한의 최후통첩을 보내고 위안스카이는 결국 이를 받아들인다는 회답을 보냈다.

5월25일 쌍방은 정식으로 조약서에 서명하였다. 다섯째 부분의 핵심 내용은 이후 다시 협상하기로 하고 앞의 네 부분은 선포하고 다른 부수적인 조례는 일본의 요구대로 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인은 5월9일을 국치일로 선언하고 강력한 반대운동을 일으켜 일본 제국주의 침략음모의 실현을 일단 저지시켰다.

일본은 1919년 1차대전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 평화회의에서 중국에 대한 21개조 요구를 제기, 서구열강으로부터 승인을 얻었고 이는 중국의 5 · 4 운동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문제의 21개조 요구 조약은 결국 1922년 워싱턴 회의에서 파기되었다.

일본은 무력 시위를 앞세워 외교적 압력을 통한 저강도 중국 식민화가 실패하자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노골적인 무력으로 이를 실현하려 하였다.

결국 일본의 과대망상적 침략 야욕은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중국과 자국을 포함, 아시아 국가에 많은 물적, 인적 피해를 남긴 채 막을 내렸다.

위안스카이가 강압적인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수락한 지 만 101 년을 닷새 앞둔 2016년 4월30일 중국 왕이(王毅) 외교부장은 중국을 방문한 일본 외상에게 '4개항 이행 요구'를 제시했다. 일본은 이를 강압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101년 전에는 대륙으로 팽창하던 일본이 중국을 압박한 것이었다면 101년 뒤에는 대양으로 뻗는 중국이 일본을 압박하는 것이다. 역사의 드라마틱한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중국 왕이 외교 ‘4개항 이행 요구’ 파문…일본 ‘불쾌감’ 2016/05/02 21:14

2018/05/09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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